송전탑이 있는 풍경 / 김승원
누구나 가파른 고개 하나 품고 산다
마른 노간주나무에 금종이 뿌린 듯 달이 뜨면 하수구엔 통증처럼
달라붙은 흰 밥알들, 새벽까지
도둑고양이는 오줌지린 골목 담벼락을 훌쩍훌쩍 뛰어넘고
달빛 가닥을 풀어 지붕 밑에 획득의 눈 시린 그물을 치는 대왕거미들
옆집 미장이시다 김 씨 손놀림보다 든든하다
달이 져도 쉬이 잠들지 못한 사람들, 아슬아슬 살아온 날만큼
가까스로 켜든 알전구 하나 가슴 안쪽에 단단히 밀어 넣고 산다
이제 살아갈 날들이 더욱 아득해 어쩔 수 없이 한 뼘씩 세월을 늘이며
새벽에 출항했다가 늦은 밤 귀가를 한다
능소화가 피워 올린 지난여름도 이 고개에선 언제나 주춤거려야 했다
구부러진 길은 끝내 채울 수 없는 허기로 남고
그 허기, 어느 길목에 내려놓을까
눈보라도 한 번쯤 숨을 고르는 이곳은 영 해발 부근
오르는 사람들만 보인다 아니, 누구나 계단을 오르고 싶은 것이다
밤새 빨랫줄은 젖은 옷 내려놓지 못하고 바람에 내장을 말리고 있다
머리 위를 지나가는 송전선만 파밧파밧
빈 하늘에 고압전류를 흘려보낸다
모두들 가만히 어제의 무게를 달빛 속에 풀어놓는다
[당선소감] 이 세상 모든 시, 나의 스승 / 촌스럽고 투박하지만 시는 유일한 위안
투시력도 없는 주제에 앞만 꿈꾸며 살았다. 사물의 너머를 관통하지 못하고 불안과 망설임에 나를 내맡긴 꼴이다. 가끔 누군가 뒤통수를 잡고 흔들 때면 두통에도 시달려야 했다. 첫 생리통의 날카로움보다 새벽이 남긴 숙취의 묵직함과 닮은, 왼 손바닥을 힘껏 벌려 관자놀이에 지문을 누르면, 남은 손은 뭘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댄다. 열 손가락에 맞춰 디자인 된 자판을 외팔로 다루기란 쉽지 않다. 결국 통증에 굴복하기로 한다.
당선 통지를 받던 날, 사무실 일로 정신이 반쯤 나가있었다. 불현듯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다. 사 분의 사 박자 메트로놈을 닮은 일정한 리듬의 통증 속에서 이 기쁨을 누구와 함께 나눠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잠깐 시를 떠나 있었기 때문일까.
나의 습작기도 늘 이렇게 두통으로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스승이 따로 없어서 이 세상 모든 시가 나의 스승이었다. 내 생에 있어 '시'를 읽는다는 것은 가르침 그 자체를 의미한다. 시가 벗어놓은 묵은 속옷이라도 훔쳐 입을 때면 그 어떤 찐득함이 나를 전율케 했다. 감당하기기 쉽지 않은, 그래서인지, 나의 글은 촌스럽고 투박하다.
금방 불똥이라도 튈 것 같은 전선들이 하늘을 까맣게 메운 골목길 풍경이 좋다. 어쩌면, 매끈한 출퇴근 길에 줄 맞춰 서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사는 내게, 시는 유일한 위안일지 모른다. 자위의 소산물이 이렇게 사고를 칠 때면 난 더욱 부끄러워진다. 졸작을 품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그저 감사할 뿐이다. 머리를 부여잡은 손을 놓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두통이 반가울 때가 다 있다.
못난 딸자식을 마냥 사랑해주시는 부모님, 또 가슴으로 이어진 이들과 이 부끄러움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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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절묘한 시적 배치 돋보여 / 시어 다루는 솜씨에 시를 읽히게 하는 매력
올해에도 투고한 작품 중에는 종교성을 지닌 시편들이 상당수 눈에 띄었다. 신앙을 주제로 시를 썼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시로 충분히 여과시키지 못한 채 정제되지 않은 언어와 사유를 타자에게 전하려 함은 오히려 불편함을 줄 수도 있음을 기억했으면 한다.
투고작 중에서 이석례의 '연무산 일출', 주영숙의 '배롱나무', 도복희의 '겨울나무', 김승원의 '송전탑이 있는 풍경'이 돋보였다. '연무산 일출'은 안개 속의 일출에서 얻어내는 상상력이 뛰어났으나 각 연 구성의 작위성과 시어 수련에 부족함을 드러냈고, '배롱나무'는 정갈하게 다듬어진 작품으로 응모작 전체가 고른 수준을 나타냈지만 독자를 사로잡는 힘이 부족하여 아쉬움으로 남았다.
결국 심사위원들은 도복희와 김승원의 응모작을 놓고 토론에 들어갔다. 도복희의 <겨울나무>는 시를 쓰는 기교가 수준급에 올라 있었지만 작품에 담고 있는 세계가 소품 수준이었고, 시적 상상력의 결여가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김승원의 <송전탑이 있는 풍경>은 시어를 다루는 솜씨가 능수능란하여 시를 읽히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또한 상반된 시적 비유를 통해 그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해 가는 품새가 능청스러울 만큼 자유로웠다. '마른 노간주나무에 금종이 뿌린 듯 달이 뜨면/하수구에 통증처럼 달라붙은 흰 밥알들' 같은 절묘한 시적 배치가 신인답지 않게 노련했고, 함께 응모한 작품들도 고르게 안정되어 있어 당선작으로 뽑는 데 쉽게 의견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여러 시적 상황들을 곡예하듯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자칫하면 언어유희에 빠질 수도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심사위원 김종철, 신달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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