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들이쌀 / 김남수
이사하면서 지하실 구석진 곳에
슬그머니 놓고 왔다
묶인 짐들이 제자리를 찾는 사나흘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주소 바뀐 집에서
놓고 온 좀들이쌀 항아리를 생각했다
오래된 기억들이 출렁거렸다
뒤주 옆 좀들이쌀 항아리
바닥 긁는 소리 단잠을 깨우는 날이면
만장기도 없는 상여 한 채가 절뚝절뚝
뚝방 길을 밀고 떠나갔다
둘째 언니는 여전히 아침저녁
놋숟가락으로 어른 수만큼 쌀을 덜어냈다
항아리에 조금씩 쌓이는 좀들이쌀
이장집 할머니가 함지박 이고 사립문을 들어서면
반도 못 찬 항아리가 텅 비었다
그런 날이면 상여 한 채가 뚝방 너머로 사라지거나
타지에서 흘러온 영월댁이 몸을 풀었다며
어른들의 근심이 우물가로 모여들었다
이사한 지 두 주일 지나
손잡이 떨어져 나간 그 항아리를 찾아 나섰다
마음 앞세우고 서둘러 가는 길
예고 없이 비가 내렸다
골목의 수평이 기우뚱 발목을 적셨다
- 김남수 시집 <둥근 것을 보면 아프다>(상상인 시선 010)
[당선소감]
"에미야 오늘 쉬는 날인데, 방문 콕 닫고 들어가더니 어찌 이제 나오냐? 나는 네가 안 나올 줄 알면서도 옥중 춘향 이도령 기다리듯 했어야."
내 방문 앞까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해거름까지 말벗을 기다리던 당신. 닫힌 방문 앞에서 기다려준 시간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직장에 다니며 뒤늦게 시를 쓰겠다고 열심을 내는 막내딸을 대견스러워 하면서도, 때로는 투정처럼 외로움을 하소연하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한동안 시를 접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더 컸습니다.
다시는 써질 것 같지 않던 시(詩), 마음 추스르며 버려둔 원고 뭉치를 들여다보았습니다. 나는 오래 시에 주려 있었습니다.
시를 찾아 먼 길을 걸어와 뒤늦게 이제 시를 만납니다.
제 손을 들어주신 심사위원님과 주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시밭을 깊게 갈아 엎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가꾸어 나가겠습니다.
한 분 한 분 이름을 부르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분들이 있습니다. 시의 길로 불러주신 고 임영조 선생님, 걸음마를 떼게 하신 이승훈 한양대 교수님, 이지엽 경기대 교수님, 문효치 선생님, 식어 가는 심지에 불을 지펴주신 마경덕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늘 곁에서 응원해주던 딸 우리와 시인의 아들이 되고 싶다던 기철이에게도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심사평]
지난해보다 작품 수는 무거웠다. 질도 훨씬 키가 높았다. 평화신문 신춘시의 수준이 여기에 닿았다고 흐뭇해 하며 심사를 했다.
심은섭씨의 '내비게이션'은 상상력과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각별하며 신시대 흐름에 따르는 새로움을 차고 들어가는 가동력이 있긴 했지만, 덜 삭은 듯 어색한 표현들이 아쉬웠다.
서옥섭씨의 '류(柳)가 들고 온 네프리솔 250'은 산뜻하고 유쾌한 표현과 이미지가 눈길을 끌었고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신선미가 마음을 끌었는데도, 선뜻 당선작으로 하기엔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것이 심사위원이 일치하는 의견이었다. "너무 눈부셔 늙어가는 그 여자 바람났네/한 3일 구멍 뚫린 무처럼 바람들었네" 등의 표현은 글솜씨의 진경에 들지 않고는 만들 수 없는 구절들이다. 안타깝게 생각한다.
정작 마지막까지 시간을 끌면서 당선작을 내지 못하고 숙고하게 한 것은 강미성씨의 '직소폭포'와 김남수씨의 '좀들이쌀'이었다. '직소폭포'는 세련된 문장과 시를 몰고가는 역동적 힘이 보통 수준을 넘었고, 오랜 연륜을 느끼게하는 그의 시의 근육은 탄탄하기만 했다. 약점이라면 여러 편의 시가 고른 수준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 지적됐다.
김남순씨의 <좀들이 쌀>도 만만치 않은 연륜과 흘러간 시절의 작은 항아리 하나에 한 시대의 슬픔과 배경을 끌어 모아 잔잔한 감동을 쉽게 놓지 못하게 하는 내성의 깊이가 누구도 따를 수가 없었다. 더욱 다섯 편의 시가 고른 수작이었고,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해도 될 듯했다. 시의 분위기가 좀 어둡다는 것이 흠이라는 지적은 있었다. 그러나 시의 완성도가 그쯤의 흠을 누를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당연 당선작으로 할 만하다는 것이 심사위원들 생각이었다. 강미성씨는 어디에서든 좋은 소식이 있을 것으로 믿고 아쉬움을 전한다.
- 심사 위원 김종철ㆍ신달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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