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 / 이병일
가마솥에 콩을 넣고 장작불을 지핀다
익은 콩을 절구통에 찧는다
메주는 서늘한 그늘에서 말린다
1
바람 좋은 날에는 가장자리부터 가벼워진다
미세한 햇살조각이 굴절되어 박혀드는 순간에
창을 열듯이 제 가슴을 활짝 열어 벽이 갈리고 있다
거친 난간 위에 포자들은 습한 계곡의 길을 건너고 있을까
밝음과 어둠 속, 빛을 굽는 보름달 아래
숱하게 구멍들이 뚫렸다
담쟁이 넝쿨처럼 곰팡이가 내 몸을 뒤집어썼다
멈출 수 없는 발,
푸른 숨소리 내는 바람 따라 계곡 사이
곰팡이 벌레가 긴 잠을 자고 있었다
2
햇살이 통통거리며 뛰어다니는 속 뜰 가운데
항아리를 묻는다 첫눈을 맑게 틔운 물에
메주, 참숯, 잣, 대추, 고추를 재운다
그 위에 하얀 천을 금실로 싸매고 뚜껑을 덮는다
밤새 애태우다가 헹궈내며 숙성되기 시작한
구수하게 트여오는 숨소리가 밤하늘로 터져버린다
잠에서 깬 새들이 푸른빛을 물어 나르는 아침,
옹글게 견딘 내 몸은 깊은 바닥으로 흩어지는 것일까
어둠에도 눈이 부시는 간기가 흐른다
바가지 닿는 소리가 날 때,
나는 기나긴 여정 속 밥상에 올라와 앉아있을 것이다
- 이병일 시집 <나무는 나무를>(시인수첩 시인선 036)
[당선소감]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하려고 형이 추천해준 책을 읽고 있었다. 뜻밖의 당선소식을 듣고 나는 부끄러웠다. 이제 시에게 한 걸음씩 다가서려고 하는데, 오늘만큼은 모든 것이 낯설어보이는 하루였다.
군에서 전역한 후, 일정하게 책을 읽고 또 시도 열심히 쓰려고 누구보다 많이 노력한 일년이었다. 이번 계기로 좋은 시를 써야겠다는 다짐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할 것이다. 철없는 막내보다 더 기뻐하신 부모님, 그리고 나의 가족들. 문학을 이야기하며 같이 놀아주던 절정 동기들. 고마움의 인사를 전한다.
나를 지켜보고 있는 세상의 사물들이 있기에, 오늘도 거리를 걸으며 메모장에 시를 적는다. 나는 아궁이에 윤기 흐르는 시를 지필 것이다. 그리고 살아 꿈틀거리는 시를 쓰기 위해 자연과 연애할 것이다. 자연 속엔 위대한 잠언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복학해서 같이 공부한 2반 식구들. 그리고 뒤란 식구들. 매순간 힘이 되어준 지훈형, 성우형에게도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시 쓰기를 천직으로 여기라는 장석주 교수님, 어머니 같은 따뜻함으로 부족한 저에게 가르침을 주신 신달자 교수님, 시의 길에서 새로움을 깨닫게 하고 시를 만들게 도와주신 이경교 교수님, 그리고 명지의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미숙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과 평화신문사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앞으로 날카로운 눈을 가진 시인이 될 것을 약속드린다.
- 이병일 시집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창비시선 399)
[심사평]
심사에 앞서 심사위원들은 나름의 원칙에 합의했다. 그것은 좋은 시를 뽑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좋은 시'라는 단순하면서도 복잡 미묘한 정의는 선자(選者)들의 시적 취향과 시적 기준에 의해 약간의 편차를 가질 수밖에 없겠지만, 사물의 마음을 읽어내 줄 수 있어야 하고 타인의 마음에 깃들 수 있어야 한다는 데 전제한 것이다.
이런 기본원칙에 입각하여 본선에 올라온 시편들을 읽어갔다. 그러면서 늘 들어왔던 이야기를 너무나 익숙한 어법으로 전개한 시편들에게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고, 자신의 견고한 내면세계에 천착한 접근불능의 시편들에는 더 이상의 인내를 발휘할 수 없음에 동의했다.
결선에 올라온 네 사람의 작품들은 이런 측면에서 모두 선자(選者)들의 욕심을 채워주었다. 먼저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못하게 하였던 하봉채의 「구두코에 걸린 달빛이 흐리다」는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신선함과 시편 전반에 자리한 단단한 상징들이 미덕이었다. 그리고 정연희의 「나무들 그 거리가 멀다」는 보편적 삶의 가치를 시적 형상화를 통해 일구어내려는 따뜻한 시심을 보여주었고, 이십여 편에 가까운 시를 투고한 심정미의 「개망초 꽃처럼」은 시의 내적 흐름과 서정적 자아의 호흡이 어긋나지 않는 운율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많은 망설임과 고민 끝에 이병일의 「곰팡이」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 이견없이 합의했다. 우선 그의 시는 콩이 숙성과정을 통해 메주가 되어 결국 밥상 위에 오르는 모습을 통해 삶의 긍정적 세계를 펼쳐보여 주었으며, 더불어 시의 근원이 삶에 대한 건강한 성찰임도 잊지 않고 보여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병일의 시편들이 결선에서 겨룬 다른 시편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은 시행과 시행 사이에서 절묘하게 조절되는 긴장과 시편 전체를 통제하고 구성하는 시인의 세련된 시적 장악력 때문이었다.
- 심사위원 김종철, 신달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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