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수수밭 / 연용호
수수꽃이 파하고 열렸다 최불암같다
붉은 벽돌집 사는 여자 공리여,
붉은 수수꽃 피는 날 만나 그곳에서 사랑을 나눴고
그들은 그렇게 부부가 되었다
누가 뭐래도 붉은 수수팥떡하고 그 여자는 잘 어울렸다
파하고 웃으면 붉은 수수 알이 오소소 떨어져
깨가 쏟아지게 행복하게 잘 살았다
그리고 껍질을 벗겨내면 마침내 하얀 속살을 뽀얗게 드러낸 그것이
서방님하고 달려들 때
파하는 웃음도 오냐 어디 하고 놀라서 함께 날뛰었다
매일 너무도 행복했다
그래서 수수꽃 피는 때만 되면
붉은 벽돌집 그 여자 공리는
그 밭가에 나와 앉아 최불암처럼 파하고
웃어줄 서방님만 기다린다
[당선소감] 영원히 잃어버릴 뻔한 소중한 꿈 한 조각
오전 일과를 마치고 쉬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여느 때와는 달리 왠지 떨리는 기분, 잊고 있었던 어느 회상 한 조각이 날아와 안겨드는 느낌은 침잠하다기보다 푸른 정광(精光)이면서 조화로운 것이었다. 가슴 벅차고 떨린다는 기분이 이런 것이었나, 그러면서도 영원히 잃어버릴 뻔한 소중한 어느 꿈 한 조각을 비로소 찾아온 듯한 그런 안도감이 드는 것은 왜일까?
수많은 문학도들이 안고 있을 열정, 꿈, 그리고 생명보다 더 진실한 법의(法意)와도 같은 그 실심(實心), 종교와도 같이 고양되어진 집념이, 나에게도 그런 게 있었나, 그렇게 아파하고 앓은 흔적이 오늘과 같은 결론을 얻을 만큼 충분히 있었나, 진실로 그래야만했던 것은 아닌가.
이제 막 도착한 무궁화호 열차, 역사 밖에 서서 길들을 바라본다 하는 느낌은 이런 뜻에서의 말인가. 처음 다니러온 고장에 첫발을 내디딜 때 그 기분, 정겁(情劫)처럼 닥쳐오는 생각들을 끌어안고 그저 안쓰러워할 줄밖에 모르는 나에게, 그저 치기와도 같은 그 어설픈 감정의 행렬들이 저 창가에 쏟아져 들어오는 아직도 이른 두꺼운 봄기운처럼 내게 현실로 다가들 날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직도 시인이 된다는 그 말이 이렇게 어색하게 들리는 것은 아마도 혼자서 가꿔오던 꿈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들켜버린 그런 기분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감사할 분들이 너무 많다. 내게 맨 처음 시라는 형식에 대해 인연을 맺게 해 준 문우 설영과 깊은 우정으로 격려를 대신해준 영헌, 남로, 그리고 변함없는 관심과 우려를 함께 보내준 고향 친구들에게도 감사하며, 어머니, 당신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아픕니다.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내사랑하는 가족 친지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부족함이 많은 저에게 문학이란 천형의 꿈을 안겨주신 심사위원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두 분께서 안겨주신 꿈 소중히 간직하며 열심히 가꿔가겠습니다. 좋은 시를 써서 이 모든 분들께 보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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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능숙한 시어, 이미지 단련 빼어난 수작
무려 1500여편의 작품이 들어 왔다. 단단하고 시적 긴장감을 주는 작품도 다른 해보다 많았다.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무게도 그만큼 중량감이 있다는 보증일 것이다.
조금씩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책임감도 함께 갖는 일이다. 해서 좀더 좋은 시를 고르기 위해 어느 때보다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예선을 거쳐 마지막 당선 겨루기를 한 작품은 다섯 편이었다. 이혜순씨의 '그 동네는 지도가 없다'와 박금숙씨의 '씨앗', 김순미씨의 '홍역'과 '여우비 다녀간 뒤' 2편, 연용호씨의 '붉은 수수밭'을 두고 오래 토론이 벌어졌다. 모두 당선작의 역량이 있는 작품들이었다.
'그 동네는 지도가 없다'는 시의 기본 틀을 잡는 데는 무리가 없었으나 이미지가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있었으며, '씨앗'은 "바람이 가는대로 모래에는 바람의 발자국이 찍혔다"라는 섬세한 표현으로 시를 농밀한 분위기로 이끌어 가는 힘은 인정되나 전체적 함축력은 부족했다는 평가였다.
역시 '홍역'과 '여우비 다녀간 뒤'도 끝까지 남아 맞겨루기를 했지만, 총체적 시적 함량으로는 시선을 끄는 작품이었으나 어딘가 미진하다는 결론이었다.
짜임새가 있으면 내용에서 아쉬움이 있고, 시어의 특출한 효과를 누리는 재치가 있으면 전반적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붉은 수수밭'으로 결과가 났다. 시의 분위기가 밝고, 시어를 다루는 법이 능숙하고, 이미지의 단련이 돋보였으며, 매우 개성적이다. 다른 작품들도 가능성이 보이며, 앞으로 시작 생활에 신뢰가 있어 두 심사위원은 마음을 합쳤다.
완전한 모범답안을 원하지는 않았고, 가능성의 믿음을 크게 점수 받은 것으로 생각해 주면 좋겠다. 좋은 시인으로 활약해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신춘문예의 문을 나간 사람으로 빛을 내기 바란다.
- 심사위원 김종철ㆍ신달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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