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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 / 김현희

 

 

후박나무가 젖은 잠을 털어내고

며칠 품었던 그늘을 꺼내 펼쳐놓는다

나무가 제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바로 이때,

햇빛은 나무들의 거울이다

이리저리 몸을 비추느라 눈이 부신 나무들

거울의 각도에 따라 키는 늘어나고 줄어든다

 

나무의 품을 통과한 빛은 오직 검은 빛

제 몸이 푸르다는 걸 아는 나무는 세상에 없다

 

키만큼 깔리는 그늘멍석

둥근 그늘 속으로 한바탕 새소리가 내려앉는다

부리에 쪼인 그늘에 구멍이 났다

입이 가려운 참새들, 수다스런 풍경을 물고 건너편 회화나무로 날아간다

가지마다 소리가 열리고

저편 하늘이 넓어졌다

 

새들의 부산한 날갯짓에 낮은 한 뼘씩 줄어든다

 

이곳에 먼저 터를 잡은 후박나무, 가장 넓은 평수를 차지했다

지난여름 뼈마디를 늘리던 손

바람에 그늘이 찢어지고 나무의 거울도 금이 갔다

 

폭설에 팔 하나를 잃고 끙끙 앓던 나무

아름드리 저 품에 우레를 피해 몸을 웅크리던 절박한 순간들이 숨어있다

사라진 가지를 기억하는 박새가 후박나무를 맴도는 동안

나무는 내내 환상통을 앓았다

 

바람이 후박향을 물고 빠져 나간다

바람의 손짓 따라 그늘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당선소감] 진심이 담긴 시를 짓겠다

무언가 뒷덜미를 당기는 증상에 잔병치례를 했던 날들, 원인 모를 고열이 온 몸에 열꽃으로 피던 날, 원인은 나에게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문학이 나를 치유했다. 중년을 새롭게 설계하는 힘이었다. 조금 늦게 만났지만 나의 결핍을 시로 메우리라.

공백으로 남을 뻔했던 나의 이력에 새로운 파일을 첨부해주신 평화신문과 이승하ㆍ정호승 두 분 심사위원님께 거듭 감사를 드린다. 잡초 가득한 묵정밭에 시의 씨를 뿌리게 해주신 마경덕 선생님, 방송대 국문과 교수님들께도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함께 공부한 문우들과 친구 강옥, 내 시의 첫 번째 독자인 아들 이안, 철 지난 공부에 불평없는 외조를 해준 남편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모두에게 진심이 통하는 시를 짓는 시인이 되고 싶다. 일찍 고인이 된 부모님이 무척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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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자연스럽게 와 닿는 주제의식, 수난을 통해 존재감 얻어가는 과정도 신선

투고자들이 '평화신문'이라는 발표 지면을 염두에 두지 않고 시를 쓰고 있어서 이 점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종교인으로서 전교나 신앙심 표현을 위해 의도성을 갖고 쓴 작품이라면 문학적 진실에 못 미칠 수 있어 내심 걱정하며 심사에 임했는데 그런 작품이 많지는 않았다.

<책의 장례>를 쓴 김은호, <나는 풍경이 아니다>를 쓴 정지윤, <손톱>을 쓴 예시인, <오징어먹물 B2, 혹은 자산어보에 대한 고찰>을 쓴 황옥경, <목이>를 쓴 김현희 다섯 분은 모두 운이 따라주지 않아서 아직 등단을 못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군의 작품이 눈에 안 띄는 대신 다 일정 수준에 이르러 있어 상대적으로 흠결이 덜한 작품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수준이 상향됐다고 할까, 평화신문 신춘문예의 위상이 높아진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다.

<책의 장례>는 초반부와 중반부의 신선함을 후반부에 가서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잘 끌고 가다가 전환점에서 "할머니 강아지 '토토' 돌아가셨다" 하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가버렸다. 마지막 연도 밋밋하다. <나는 풍경이 아니다>는 표현은 상당히 세련돼 있는데 궁극적으로 무슨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것인지,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것인지 잘 파악되지 않는다. 나는 풍경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시의 본문에 '않는다'라는 부정적 표현이 다섯 번이나 나오는 것도 이 시의 주제를 흐리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손톱>은 10개가 넘은 쉼표를 쓰면서 중문과 복문이 많은 산문시로써 시의 운율이 완전히 죽어버린 결함이 있지만 손톱을 유리창으로 본 발상의 참신함과 시적 표현의 세련됨, 현란한 이미지 묘사는 선외로 밀치는 것을 망설이게 했다. <오징어먹물 B2…>는 좋은 소재를 찾아냈지만 '고찰'까지 이르지 못했다.

김현희의 투고작 중 제일 앞의 <목이>는 세련된 감각이 돋보였지만 표현기법이 낯익은 것이 문제였다. 제일 뒤에 있는 <그늘>은 생명체의 생명 유지 비밀을 캐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후박나무를 키우는 것은 햇빛만이 아니다. 나무를 의인화한 뒤에 그늘과 바람과 새와 폭설의 의미를 짚어보면서, 생명이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는 유아독존해서 안 되고 주변의 모든 사물과 교류해야 함을 말해주는 주제가 자연스럽게 와 닿는다. 나무가 수난을 통해 존재감을 얻어가는 과정도 신선한 발견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정진해줄 것을 당부한다.

- 심사위원 이승하, 정호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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