꺾임의 미학 / 정영숙
부석사에 오르려면 안양루부터 길이 꺾인다 축이 꺾인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 천왕문에서 요사채, 요사채에서 범종각을 거쳐온 직선의 똑 바른 길을 벗어나야만 부석사의 무량수전에 오를 수가 있다 무량수전의 전면을 볼 수 있다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을 만날 수 있다 지금껏 내가 살아온 날들, 앞만 내다보며 앞으로 난 직선의 길만 꼿꼿이 걸어온 날들, 조금의 구부러짐도 조금의 뒤틀림도 허용치 않았던 나의 길 사물의 옆면만 보았을 뿐,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이제 여기쯤에서 꺾어져야겠다 지금까지 걸어온 직선의 길을 버리고 휘어진 길을 접어들어야겠다 내가 꺾이고나니 부석사 발 아래로 보이는 지붕들이 모두 날개를 단 듯하다 소백산맥 준봉 위를 날아오르는 나를 향해, 무량수전을 지키는 석탑이 불을 켠다 서방정토를 향해 길을 밝힌다
[수상소감]
극작가 김우진 선생님과 차범석 선생님,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소설을 집필하신 여류 소설가 박화성 선생님, 그리고 평론가 김현 선생님을 기리는 뜻깊은 목포문학상에 시부문 본상을 수상하게 되어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황금 벼가 출렁이는 풍성한 계절, 호남지방의 보고인 목포까지 내려와 여러분과 함께 자리를 하게 되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시를 쓴다고 한 지 거의 이십여년이 되었지만 아직 시의 길은 너무나 멀고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동안 밥을 먹듯 시를 썼습니다. 배가 고프면 몸이 밥을 찾듯, 마음이 고프면 연필과 종이를 찾았습니다. 마음의 고픔이란 외로움, 결핍, 그리움, 불안 등의 정서로, 이런 감정들을 뼈속까지 느끼는 시인이란 존재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한층 예민하고 섬세한 촉수를 가지고 사물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외롭거나 슬프고 힘들 때 친구가 되어주었던, 내 영혼의 안식처인 시가 있었기에 행복합니다. 밤잠을 설치며 단어 하나에도 목숨을 걸듯 매달리던, 언제나 목마르고 애타던 지난 시간들이 오늘 이 영광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도정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 하루는 눈꺼풀을 붙이고 한숨 푹 잠을 자도 되겠습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내 삶의 전부인 시는 또다시 나를 깨워 일으킬 것입니다. 오로라처럼 빛나는 아득한 곳에서 김이 모락모락나는 시의 밥상을 차려놓고 내게 어서 달려오라고 손짓할 겝니다.
오늘의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시기 위해 외롭고 쓸쓸한 길을 걸어가신 선배 선생님들의 뜻을 받들어, 이 문학상이 기대하는 큰 시인으로 거듭날 것을 다짐합니다. 지금껏 시를 쓰도록 격려해주신 선생님들과 가족들께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영광을 안겨주신 목포문학관과 부족한 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고개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심사평]
기성시인들 천 편이 넘는 투고작을 심사하는 데 있어 심사위원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인들의 작품은 편차가 심하여 심사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기성문인들의 작품은 다들 은유에 능하기에 몇 번이고 정독하면서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는 작품들을 찾아내야 했다. 문학성에 충실한 작품은 너무 얄팍하고 서사성이 있는 작품은 비유와 상징의 장치가 결여되기 쉬운데 다행이도 금년에 투고한 작품들은 비유와 상징과 더불어 서사성이 있는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팝나무의 답례’외 9인의 작품들이 바로 그러한 작품들이다. 예심자의 판단이 조금치라도 잘못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일정한 수준에 오른 작품은 한 편이라도 빠뜨리지 않으려는 마음이 앞섰다. 더불어 심사하는 동안에 시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다.
예심위원 이수행 (시인) 김재석 (시인)
시인은 아무나 볼 수 없는 감춰져 있는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그 눈이 밝을수록 그 시인의 독자는 행복해 질 수 있다.
이번에 본상 부문의 본심에 올라온 10분의 작품들은 그 시인 나름대로 눈의 시력을 돋워 새로운 세계를 보여내기에 최선을 다한 작품들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중 접수 번호 36의 <꺾임의 미학>, 접수번호 59의<새우잠>, 접수번호 129의 <기록되지 않을 기록> 등 3편을 만지작거리면서 즐거운 고민을 했다. 오랜 생각 끝에 <꺾임의 미학>을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꺾임의 미학>은 기실 휘어짐의 지혜다. 인생을 살만큼 살고 경륜을 쌓은 사람이라야 터득할 만한 삶의 진리다. 어쩌면 금과옥조 같은 경험의 진실을 혜안으로 간파하고 매우 효과적인 은유적 여과장치를 거친 솜씨가 만만치 않다.
본심위원 문효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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