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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 / 한수남

 

 

혼백상자 등에다 지고

가슴앞에 두렁박 차고

한 손에 빗장 쥐고

한 손에 호미 쥐고

한 질 두 질 수지픈 물 속

허위적 허위적 들어간다

이여싸나 이여도싸나

 

섬에 와서 노래를 배웠다. 민박집 주인 할매는 죽은 할머니와 여러 군데 닮았다. 담배도 잘 피우고 욕도 잘하고 이여싸나 이여도싸나 큰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방바닥 장단을 두드리더니 숭한 년, 옆집 살던 과부 욕을 해댔다. 고데구리배 그물이 몸땡이 감아드는 줄도 모르고 젊은 것이 욕심을 부렸다고, 해삼이고 전복이고 소라고 하나 더 따믄 뭣에 쓸 거냐고, 온 동네 발칵 뒤집힌 사연 날수를 헤아리다 아껴둔 소주병을 꺼냈다. 홍합을 까먹으며 매운 소주를 마시며 섬에 온 지 사흘째 나던 밤이었다. 네일 아침배로 어서 떠나라고 육지가시네 갯바람 들면 탈난다고 해놓고 뜨건 국물을 자꾸 부어주고 있었다. 열여덟에 시집와서 어언 오십년 물질 안하고 놀면 몸살 나는 내력을 조곤조곤 털어놓고 있었다. 비닐장판이 익어가는 아랫목 스르르 잠이 들면 꿈에서 꼭 이어도를 볼 것만 같은 밤이었다. 낭창한 허리에 볼그족족 뺨이 붉었다는 그 젊은 과부가 살고 있을까 이여싸나 이어도싸나 마당가 빨랫줄에 걸린 검정 고무 옷도 휘잉 휘이잉 슬픈 노래를 부르던 밤이었다.

 

 

 

 

 

 

 

[심사평]

 

쉬워서만이 아니다.

 

다른 작품들이 거의 예외 없이 너무 빠른 이들의 짱구 돌리기나 너무 늦은 이들의 詠物詩차원이어서 지겨운 탓만도 아니다.

 

현재 우리시의 가장 큰 문제점인 다음 세 가지에 대해 자의식을 우선 갖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점, 몇 마디 하겠다.

 

첫째, 노래와 줄글이 함께 있다. 물론 그 자체로서 온전치는 않다. 그러나 기왕의 전통 音譜律지옥이라는 폄하까지 곁들여 대책 없이 내던지고 줄글로 무장해제하는 것에 대한 경계와 자각이 분명히 깔려 있는 점은 우선 중요하다. 산문이 혼돈 그 자체는 아니다. 散調에도 本疾이라는 미학적 규범의 조건이 분명 있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국권상실과 함께 이미 있었던 이른바 허튼소리의 전통까지도 다 잃어버린 점이다. 사설시조로 봐도 한양가에는 노래와 줄글의 엇섞임이 있다. 이런 엇섞임이나마 되살리고 싶은 의지가 은연중 서려있는 점 때문에 감히 당선작으로 고른다. 겉으론 줄글이지만 그 밑에 서양식 비트가 집요하게 거늘려 있는 요즘의 시유행 따위는 도무지 봐줄 건덕지가 없다. 그리고 은 특별히 성교소리(voice of sex)’라고 부른다. 높낮이도 없는 평균적인 퉁퉁퉁과 왔다 갔다 뿐이니 애당초 지루하다. 성교도 사랑이 있을 땐 높낮이는 상식 아닌가!

 

지금 우리시의 제일 명제는 새 차원에서 들숨 날숨의 장단을 회복하는 것이다. 장단위에서 그 나름으로 줄글이다. 박둥을 잡아야만 바람직한 요즘의 엇 그늘이 생기는데 해녀는 일단 그 소망에 접근하고 있다.

 

둘째, 분명 민중시 계열임에도 남성 코드가 아닌 여성적인 바다감성이다. 이것은 앞으로 다가오는 여성중심의 음개벽에서 매우 중요하다.

 

셋째, 머지않아 흰 그늘의 네오, 르네상스는 시산기의 상식이 될 것이다. 그 전제가 지금 대유행중인 色魔性에서 惡魔性에로의 검은 그림자 이동 현상인데 바람직한 것은 그 검은 그림자말고 툭 터진 열과 색정의 세계, 그야말로 흰 그늘일 것이다.

 

해녀들의 그 큰 엉덩이의 숭한 이나 낭창한 허리에 볼그족족 뺨이 붉은 젊은 과부등의 그 칙칙한 색정의 그늘은 이여싸나 이여도싸나의 저 새하얀 신비의 섬 이어도의 투명한 빛과 융합된다.

 

15세기 피렌체 르네상스의 미학적 열쇠말은 어스름한 저녁 그늘 속에 문득 솟아오르는 흰빛인데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말의 부정적 출처가 다름 아니라 당대한 젊은 시인의 다음의 시 구절이었다는 사실이다.

 

흰눈부심을 거느린 검은 악마들의 시위마지막으로 해녀玄覽性(여성스럽게 아기스러움)이 앞으로 큰, 목포문학의 큰 미덕이 될 것이다.

 

- 심사위원 : 김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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