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로 가는 기차 / 하수현
1
뽀얗게 얼어 입을 다물고 있는
그 겨울 차창을 통해
낯선 설국(雪國)을 오래오래 내다보았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에 몸을 실었을 때
설원은 아직도 눈보라가 있는 바다였고,
나는 나비인 채 눈보라를 헤치며
겨울을 꿈결처럼 순항(巡航)하고 있었지.
겨울밤에 남긴 독한 술이
여행 가방 안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에는
눈꽃으로 피어난 나뭇가지들이 찬바람과 수런거렸네
내 가슴을 통째로 흔드는 저 눈꽃은
달리는 열차에 시선(視線)을 보내기도 했지만
두고 온 먼 고향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결국 안겨 주었네
내게 시선을 보낸 것은 눈꽃만이 아니라
농가의 나무집들, 뿔이 무성한 순록들,
시베리안허스키의 검은 눈망울도 마찬가지였지.
눈보라의 군무(群舞)에 하얗게 질려 있는
자작나무의 행렬,
그 행렬과 함께 설원을 흐르는 열차는
하바롭스크역을 몇 번의 기적(汽笛)으로 깨웠네
이제 막 눈을 뜬 플랫폼에
도열해 있는 저 하얀 입김들은
아시아인, 유럽인, 그리고 지구촌 가족들이 지닌
꿈의 명찰이었네
플랫폼에서 잠시 뜨거운 숨을 고른 후에
열차는 설원의 서쪽을 향해 다시 달음질쳤네.
2
마침내 저 멀리에,
장대(長大)한 바이칼 호수의 수면에서
생명의 물안개가 쉼 없이 피어오르는 것을
가슴을 열고 온몸으로 보았네
저것은 유라시아의 젖줄, 우리의 시원(始原)이었지
바이칼 호수의 남쪽 언저리를
혹은, 호수에서 피는 안개의 허리를 감싸 안고
열차는 이르쿠츠크를 향해 가고 있었네.
기나긴 철로 위를 갈 때에
눈보라의 견고한 발톱이 열차를 붙잡기도 했네
삶이란 바로 저 철로를 가는 것이라 여기며
언제나 전력(全力)을 다해 달리지만
삶에도 역(驛)이 있어서 영혼들은 잠시 쉬어 가는데,
그건 마치 날갯짓에 지친 새들이
햇살이 누운 산록에 날개를 내리는 것과도 같지.
지친 발걸음을 좀 더 가볍게 하기 위하여
발목마저 벗어 던질 수는 없었네
삶의 궤도를 강물처럼 흘러가야 하는데
흘러가는 일조차 저절로 되진 않으니 내 어쩌나,
열차는 겨울의 한 자락을 언 입으로 꼭 물고서
기나긴 시베리아를 미끄러지듯 흐르는데
아아, 저 설원의 함성이,
알 수 없는 절규의 행렬이 자꾸만
내 등 뒤로 비켜 가는 것을 어찌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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