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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속의 두 와불 / 정성수

 

차창은 풍경들을 계속 뒤로 던지고 신문의 끝장을 펴 들었을 때였다

문득 어깨에 얹혀오는 머리

가만히 밀어냈다 여자가 몸을 한 번 뒤척인다

또 다시 얹혀오는 머리

가벼이 코 고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반쯤 누워있는 와불이다

어깨를 뺀다는 것은 이승에서 죄를 짓는 일일 것 같아서

나도 등받이에 몸을 맡기고 함께

와불이 되기로 하였다

생면부지 남여가 순간 살림을 차렸다

남자가 산에서 나무를 해오고 여자가 밥을 짓고

시시덕거리며 소꿉장난 같은

신접살림을 차린 것이다

기차가 터널을 뚫고 들을 지나 소리치며 강을 건너가는 사이

두 와불은 만리장성을 쌓고

억겁의 인연으로 서로를 묶었다

한 말의 깨가 쏟아지고 있는데

안내방송이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남자와 여자는 황망히 꿈속에서 이승으로 돌아왔다

나는 비몽사몽이었고

여자는 날렵한 솜씨로 화장을 고친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울역 에스케러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여자

뒤를 돌아본다

기차가 마지막 어깨를 한 번 들썩인다 여기가 인연의 종점이라고

 

 

 

 

 

젓가락 위를 달리는 기차 / 김봉래

 

삼촌은 누워서도 빨간 깃발을 흔들었다

한 낮에는 가슴까지 러닝셔츠를 밀어올리고

앙상한 갈비뼈를 따라 두 손가락이 칙칙폭폭 달렸다

열차가 목적지에 다다를 때쯤엔

대기하던 한 쪽 팔이 어김없이 번쩍 들렸다

삼십여 년 넘게 반복해온 수신호이기에

생각하지 않아도 반응하는 것이리라

삼촌이 기차놀이를 시작한 시기는

그의 며느리에게 존댓말을 할 무렵부터이다

어느 날은 부엌의 모든 젓가락으로

하루 종일 철로를 만들었다

언제나 자로 잰 듯 정확하던 삼촌은

누구에게나 균등한 간격으로 침목을 놓았었다

단 한 줄, 생의 구김조차도 허락할 수 없었는지

제복은 물론이고 깃발에도 다림질을 하곤 했다

레일이 땅속으로 이동하고

건널목 관리소가 철거된 후에도

한쪽 벽에 단정히 걸어둔 역무복을

한동안은 매일아침 입어 보던 삼촌,

한 해를 꼬박 기차놀이에 몰두하더니

불현듯 그만두고 액자 속으로 들어갔다

삼촌의 영정 앞에는 작은 향로와 젓가락이

건널목 관리소와 레일처럼 놓여있다

기억 저편으로부터 열차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곧이어 삼촌의 젓가락위로 열차가 진입하자

환하게 웃고 있던 삼촌은

아직 벽에 걸려있는 제복 속으로

스르르 스며든다

 

 

 

 

해발435m* 기적 소리 / 정석교

 

길이란 죄다 돌아가야 하는 줄 알았던, 철로의 시작은 내 곁에서 출발했다. 골골마다 억척스런 삶을 토닥이고 폐탄장 돌아 온 기적 소리 플랫폼 안겨오면 느티나무아래 숨어 은밀한 편지 읽던 누이며 시절과 평행선을 긋던 응어리진 삼촌의 마음도 강물은 검다는 동심을 마중하던영동선 열차, 마분지 차표 한 장 덥석 받아주었다

 

이별과 재회, 옹송옹송한 이야기 지그재그 단숨에 풀어낼 수 없는 스위치 백 73년 가파른 길, 해마다 속으로만 붉게 익는 무화과 태생처럼 한 길로만 지켜내던 수줍은 긴 연정(戀情) 가파른 길 몇 번의 늘임표 쉼표를 찍으며 직진이 아니어도 후진으로도 넘을 수 있다는 것 앞만보고 달린 내 생의 과석방지 턱 같은 나한정역, 모든 기차는 여기서 보란 듯 명쾌한 기적을 울렸다

 

플랫폼 빨간 장미꽃 오래 기억하는 부부 장승 사진 한 장 찰칵, 기적소리처럼 찍혀가는 유월 산내마을 골골 푸른 메아리로 곱게 펴 너른 캔버스에 하나둘 그려내는 수채화 속도를 탐하지 않는 뜨거운 것 목이 메었다. 강릉 발 1686 무궁화호 대전 발 3225 화물열차 전송하는 깃발 속으로 오르내리는 해발435m 그 길, 저 우렁찬 것 품은 아름다운이별 받아들여야 한다

 

쉬이 오르고 싶었을 그 정상의 행렬 바쁜 세월의 갈증을 풀고 한 박자 쉰 여유 해발435m 기적 소리, 샐빛 그리운 막장 안 노광부 오랜 기침소리 관통하고 솔안터널 열어가는 청량리 발 1641 무궁화호, 딴딴한 산맥의 푸른 꿈 새로운 타전을 시작한다. 굽은 길 높은 길 열었던 73년 기적 소리 품고,

 

* 스위치백(Switch Back) 구간인 삼척시 도계역과 통리역 사이의 고도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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