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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사북역, 이름 없는 열차 / 정재돈

 

불빛이 죽어버린 탄광촌, 차츰 이름이 희미해져가는 열차가 있다
허름한 옷 입은 오후가 아쉬운 탄식을 쏟아내며 갱 입구로 나왔다 
닫힌 탄광의 문 앞에 서서 입은 옷을 벗으려 하는 햇살, 아련한 옛 기억을 더듬고 있는 것일까

 

누구나 한때 헐벗은 적이 있지만 햇살은 연탄처럼 누더기 옷을 기워가며 입던 때를 잊으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녹슨 철문 출입금지 푯말, 마치 외부와 단절하고 살아온 독거노인을 보는 것 같다 삭막한 오후의 하품이 갱 입구에 눌어붙었다

 

광부들의 땀 냄새 묻은 철로, 자식이 꿈이고 희망이었을 고된 삶의 현장, 생존의 끈으로 묶여있던 인차가 덩그러니 멈춰있다. 차츰 이름이 지워져 가는 열차들, 사북역 철로를 따라 가장들의 텁텁했던 한숨이 갱 입구까지 줄지어 앉아있다

 

만차의 꿈을 달리던 사북의 시간은 멈췄고 지난날 산업 전사들의 애끓는 숨소리도 멈춰있다. 나는 문득 갱 입구, 군데군데 남아있는 시커먼 흔적들에게 미안했다. 낡은 철로는 차츰 밤으로 향하고 희미한 달빛 속으로 마지막 석탄냄새가 풍겼다

 

광부들의 혼이 피어난 사북역, 그들의 애끓는 가슴앓이가 지천의 산에 애잔한 야생화로 피어났다. 갱도 안에 별처럼 아름답게 박힌 흔적들, 문득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석탄을 가득실고 나에게 깜냥깜냥 다가올 것만 같다

 

 

 

 

 

 

   

[우수상] 마지막 기차와 기관사 / 이숙희

   

아까시나무의 집* 남자가 기차에 올랐다

영원히 닿지 못할 행성의 간이역들을 향해

같은 속도를 내며 그는 타원으로 돌고 있었다

기차는 알 약 한 봉을 목구멍에 털어 넣고

마지막 운행을 위해 레일 위에 섰다

몇 몇 사람들은 잿빛 코트를 입고

창가 의자에 기댄 채 캡슐처럼 녹고 있었다

경춘선 기차의 가뿐 숨소리가 그르렁 거리며

지나왔던 과거의 길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아직식지 않은 커피 잔에는 벽보의 낙서들이 흔들린다

남자는 햇살의 밸브를 열어 언 강물 위에 풀어 놓았다

어디로 갔을까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물새소리

철길 옆 나뭇가지엔 흉흉한 소문들이 웅성였다

산의 허물을 밀어내고 터널을 빠져 나오던

기차는마디마디 꺾어진 몸뚱이 봉합하듯 어둠을 메워 넣고

바퀴에 감겨있던 기억들을 녹슨 레일 위에 펼쳐놓았다

강둑을 돌아 산모퉁이를 기어오르다 돌아보며

등 뒤에 버려진 무관심의 껍데기를 바라본다

그때 철컥철컥 귓전에 울리는 마지막 기침소리

멈춤 신호등 멈춤 신호등 멈춤 신호등

고독한 절지동물이 더듬이를 땅에 내려놓는 날

봄나물이 가득한 밥상을 누군가 흰 눈으로 덮어주었다

방금 전 폐역이 된 종착역이 쾡 해진 눈으로 작별인사를 한다

남자가 기차에서 내려 길을 걷는다

한때는 차창 밖으로 보였을 풍경들이 뒤 따라 오고 있다

오래된 철근 구조물이 링거를 맞고 폐목이 새 삶을 꿈꾸는 곳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제복 입은 남자는

어느 경치 좋은 강변 가를 달리는 꿈을 꾸고 있을까

텅 빈 철로 위에 레일의 자유로운 영혼이 두 팔 벌려 누워있다

 

* 아까시나무의 집-정우영 유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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