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들장 / 최동호
인기척에 놀라 단풍잎 흩날리는 가을
망월사 앞마당
구들장 뒤집어 불의 심장을 말리고 있었다
생솔가지 지피며 눈물 감추던 겨울
돌의 숨결에
침묵의 먹을 갈던 구들장 돌부처
홀연히 그가 밟고 간 먹구름 뒤의
천둥소리 환한
절 마당에 작파해버린 경판 조각들
지옥의 유황불 치달린 가을 말발굽
망월사 앞마당
구들장을 뒤집어 바람의 갈기를 다듬고 있었다
[수상소감]
문학상을 주관하시는 선생님으로부터 수상소식을 들었을 때 잠시 망연한 기분에 빠져 들었다. 얼마 전 땅 끝 마을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망연함이 되살아 나왔다. 맑은 바람과 푸른 바다 그리고 무량한 햇빛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해왔는가 돌아보았다. 손에 잡히는 것도 눈에 보이는 것도 구체적인 것은 나에게 아무 것도 없었다.
이제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 이외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시를 공부하고 시를 써보겠다는 마음으로 조지훈 선생을 찾아 국문학과에 진학한 다음 시 쓰기보다는 책읽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긴 생애를 돌아 다시 처음 자리 거기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대학 시절 읽었던 예이츠의 <이니스프리 호도>의 여운을 잊지 못해 2005년 여름 예이츠의 고향을 찾아간 적이 있다. 적막한 석양 무렵의 맑고 고요한 호면을 바라보며 번잡한 도회 생활 중에도 유년시절의 이니스프리를 잊지 못하던 그를 생각하며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시 쓰기에 전념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돌아왔었다. 그러나 시간은 덧없이 지나가고 내 손에는 번거로운 책들의 알 수 없는 문자만 이리저리 떠나지 않았다.
1966년 대학에 입학했을 때 나는 엘리엇과 같은 비평적 지성과 그의 <황무지>와 같은 대작을 써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적이 있다. 그로 인해 지난 40 여 년 동안 창작과 비평이라는 감성과 지성의 상충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나에게는 최대의 명제였다. 공부를 많이 하면 멀리 갈 수 있다는 옛 스승의 말씀에 따라 열심히 학문의 길을 걸어왔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길은 여기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조바심도 적지 않게 있었다. 그러나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더라도 느리게 멀리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의 조바심은 조금씩 사라져갔다.
해남 녹우당 앞에서 나는 수 백 년 묵은 우람한 은행나무의 장관을 보고 다시 땅 끝에서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길이 끝나자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한 비평가의 말을 다시 떠올리면서 느리지만 천천히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박두진 선생님은 나의 은사이신 조지훈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시인이셨다는 점에서 남다른 감회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박두진 선생님의 개결한 정신과 높은 품격의 시들은 나에게 언제나 존경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 분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문학상을 받게 된다는 것은 너무 황송하고 외람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 지하에 계신 지훈 선생께서 한 말씀 거들지 않고는 이런 인연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가야만 하고 갈 수밖에 없는 나의 길을 최선을 다해 걸어 이번 수상의 영광에 진심으로 보답하고 싶다. 심사에 임해 주신 문단의 선배 심사위원 선생님들 그리고 이 상을 운영하시는 관계자 여러 분들에게도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심사평]
이번 제4회 박두진 문학상 심사는, 예심을 통과한 여섯 분의 중견 시인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지난 1년 동안 문예지에 발표한 시편들을 차분하게 읽어나가면서 진행되었다. 여섯 분 모두 우리 시단에서 남다른 위상을 점하고 있는 중견 시인들이어서, 시적 성취의 높고 낮음은 이미 차이를 두기 어려웠고, 각자 그 나름의 개성적 음역을 갖추고 있었다고 심사위원들은 판단하였다.
오랜 토론 끝에 최동호 시인의 최근 시적 성취가 괄목할 만한 것이며, ‘박두진 문학상’이 가지는 여러 기율들을 충족하고 있다고 심사위원들은 합의를 이루었다. 곧 그의 시편들이, 혜산 시학이 가지고 있는 호방함을 갖추고 있고, 진중한 사유와 구체적 감각을 두루 결합하여 혜산 시학의 정신적 상승과 단단한 견인의 의지를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최동호 시인은, 서구의 근대 시학과는 대척점에 있는 이른바 정신주의의 맥락 혹은 동양 시학의 정수를 혼신을 다해 정초(定礎)해왔다. 그 실례로 심사위원들은 「구들장」이라는 작품을 눈여겨보았다. 이 시편은 비유컨대 불과 물과 바람과 꽃과 돌이 이루어내는 일종의 경전이다. 그 경전이 결국 구들장 돌부처의 성스러움에 가 닿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시인은 사물과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통찰을 깊이 있게 각인한 것이다. 그리고 「아일랜드 시편」 연작에서는, 아일랜드와 우리의 경험적 유대를 통해, 각별한 역사적 상상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 모두가 최동호 근작의 진화 과정을 보여주는 뚜렷한 사례라고 판단되었다.
완미한 미적 성취를 거둔 수상자에게 축하의 마음을 전하면서, 더욱 정진하기를 마음 모아 부탁드린다.
심사위원 유종호(위원장, 문학평론가, 전 연세대 석좌교수, 예술원 회원) 김용직(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학술원 회원) 이영섭(시인, 경원대 교수) 조남철(문학평론가, 방송통신대 교수, 박두진문학제 운영위원장)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이번 제4회 혜산 박두진 문학상 수상자로 최동호(崔東鎬, 고려대학교 교수) 시인, 문학평론가가 선정되었다.
혜산 박두진 시인의 시세계를 기리는 취지로 안성시에서 주최하고 있는 이 상은, 그동안 제1회 신대철 시인, 제2회 천양희 시인, 제3회 최문자 시인을 선정하였고, 이번에도 공정하게 구성된 심사위원회를 통해 최동호 시인을 선정하게 되었다.
심사위원은 유종호(위원장, 문학평론가, 예술원 회원), 김용직(문학평론가, 학술원 회원), 이영섭(시인, 경원대 교수), 조남철(방송통신대 교수, 박두진문학제 운영위원장),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선생님들이 참여하였다.
최동호 시인은, 서구의 근대 시학과는 대척점에 있는 이른바 정신주의의 맥락 혹은 동양 시학의 정수를 혼신을 다해 정초(定礎)해왔다. 그 실례로 심사위원들은 「구들장」이라는 작품을 눈여겨보았다. 이 시편은 비유컨대 불과 물과 바람과 꽃과 돌이 이루어내는 일종의 경전이다. 그 경전이 결국 구들장 돌부처의 성스러움에 가 닿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시인은 사물과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통찰을 깊이 있게 각인한 것이다. 그리고 「아일랜드 시편」 연작에서는, 아일랜드와 우리의 경험적 유대를 통해, 각별한 역사적 상상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 모두가 최동호 근작의 진화 과정을 보여주는 뚜렷한 사례라고 판단되었다.
이러한 시세계를 기려, 제4회 혜산 박두진 문학상 수상자로 최동호 시인을 결정하였다.
시상식은 10월 31일(토) 오후 3시 경기도 안성시 안성문예회관 공연장에서 제9회 혜산문학제 때 있으며 상금은 일천만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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