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 신대철
전신주 박혀 있던 태왕릉*
호석** 흩어지고 봉분 패이고
뻥대쑥이 흔들린다. 능 너머로 도굴된 능 너머로 조선족들 밀려간다. 장정들 큰 도시로 떠나가고 퉁거우 평원 빈 자리에 옥수수들 웃자란다. 바람받이 길목에 햇볕만 지글거린다. 평상에 앉아 있던 노인들 장기판 들고 나무 아래로 들어간다. 졸 가고 말 가던 땅에 판 바뀌어 동네 혼령들 드나든다. 독립군이 혼강으로 통화현으로 무기 나르던 시절 혼령들이 길을 안내했단다. 훈수 두던 아낙 슬며시 울안으로 들어가고 어디선가 덜그덕 장독 뚜껑 여닫는 소리, 봉숭아 물들인 소녀들 옥수숫대에 붙어 서서 살랑거린다. 고개 내밀다 눈만 웃는다. 지붕 위로 박넝쿨 호박넝쿨 올라가고 굴렁쇠 굴리고 간 아이들 갈 곳 잃고 녹슨 길 감아 돌아온다. 여산인지 용산인지 뻐꾸기 운다. 먼먼 울음 소리에 흐른 강물 따라와 흐른다.
한밤에 가족 이끌고
옛 땅 숨어들었다가
전답 붙일 새 없이
쫓기고 굶주렸던 농민들
지지난 밤 빗속에
강을 건너온 탈북자들은?
뻐꾸기 울음 그쳐도
강물이 흐른다.
흐른 강물 다 거느리고
압록강이 흐른다.
[수상소감]
혜산 선생님 생전에 그 푸른 그늘에서 삶과 문학을 배웠고 돌아가신 뒤에도 여전히 그 그늘에서 배우고 있는 제가 첫 수상자라니 송구스럽습니다. 우리 현대시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신 선생님의 문학적 위상을 생각하게 되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혜산 선생님은 우리 현대시사에서 한용운, 이육사 등 지사적 시인의 전통을 잇는 민족 시인으로서 일제 강점기에는 조국 광복의 비전을 보여주셨고, 해방 후에는 처음으로 존재에의 용기와 자유 의지를 일깨워 김수영, 김지하 등 후대의 현실 의식 시인들의 정신적 모범이 되셨습니다. 「푸른 하늘 아래」, 「어서 너는 오너라」, 「봄에의 격」, 「우리들의 기빨을 내린 것이 아니다」 등 민족 격변기를 감당하셨던 선생님의 대표시들은 이미 우리 시사에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혜산 선생님은 이렇게 역사적 현실에 준엄한 시선을 가진 예언적 시인이셨지만, 감성적으로는 고향 안성 사갑들에서의 자연의 감화를 잊지 못한 순수 자연인이셨고, 종교적으로는 야콥 뵈메, 썬다 씽 같은 기독교 신비가들의 경건주의로 삶의 지표를 세운 독실한 신앙인이셨습니다. 혜산 선생님이 인류의 비극적인 상황을 노래하면서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꿈꾸신 것도 바로 기독교 정신의 핵심인 ‘포옹무한’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혜산 선생님과 김수영 선생님을 통해 문단에 나왔으면서도 유신 체제하의 억압된 현실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간신히 체험에 기대어 「×」, 「우리들의 땅」 등 시 몇 편을 썼을 뿐입니다. 그리고 오랜 방황 끝에 23년 만에 다시 창작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선생님께 다시 시 쓰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하고 상을 받게 되어 가슴이 아픕니다. 이 자리에 서니 문득 선생님의 모습이 은은히 떠오릅니다. 강 건너 뱃사공을 옆에 있는 사람처럼 ‘어어이!’ 하고 부르시던 선생님, 안개 속에서 그 음성 듣고 ‘예!’ 하고 노 저어오던 뱃사공. 저도 어디서든 선생님의 음성을 듣고 언제나 정신적으로 화답할 수 있는 시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혜산 선생님은 언제나 한결같이 고고하고 학 같은 분이셨습니다. 선생님은 그 인간적 품격을 그대로 시에 발현시켜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불의에 굴하지 않고 역사를 증언하셨습니다. 데뷔작 「향현(香峴)」으로부터 유고 시집 ꡔ당신의 사랑 앞에ꡕ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무한혁명’ 사상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포옹무한’ 정신으로 민족의 통일과 인류의 구원을 노래하셨습니다. 부족하지만 저도 민족과 인류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 시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를 ‘혜산 박두진문학상’의 첫 수상자로 올려주신 여러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제 옆에 미소를 짓고 계신 혜산 선생님, 이 상을 영광스럽게 받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심사평]
예심위원들은 혜산 박두진 선생의 시세계와 친연성이 높고, 문단에서 각별한 경의를 받고 있으며, 작년 11월부터 올해 10월까지 왕성한 작품 발표를 한 시인들 가운데, 2~5인의 추천 시인을 각각 정해 와서 논의하기로 하였다. 예심위원들은 이 가운데, 등단 20년을 넘어섰고, 다른 문학상의 수상 경력이 적은 시인들을 대상으로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또한 혜산 선생과의 시적 친연성도 적극 고려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강은교, 문인수, 박이도, 신대철, 정진규, 조창환, 천양희 등 7인의 시인을 선정하였다. 예심위원들은 이 시인들의 수상 후보작 10편 내외를 수합하여, 본심위원들에게 우송하는 것으로 임무를 마쳤다.
본심위원들은 일곱 분의 역량있는 한국의 대표 시인들 가운데, 혜산 박두진 선생의 시세계와 각별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여주고 있으며, 광활한 대륙적 세계와 지사적인 역사 의식을 보여준 신대철 시인을 수상자로 선정하였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시적 성취를 보여준 시인들에 대해 문학적 경의를 표하면서, 본심위원들은 불가피한 선택 앞에서, 신대철 시인의 그동안의 예술적, 정신적 궤적을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이다. 수상을 축하하며, 더욱 정진하여 제1회 혜산 박두진문학상의 영예를 드높여가기를 소망한다.
심사위원 예심 : 이영섭(경원대 교수), 안경원(시인), 이숭원(서울여대 교수), 이희중(전주대 교수), 유성호(한국교원대 교수) / 본심 : 유종호(위원장, 전 연세대 석좌교수), 김용직(서울대 명예교수), 정공채(시인), 유경환(시인), 조남철(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혜산 박두진문학상 수상자에 신대철 시인
혜산 박두진 문학제운영위원회(위원장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조남철 교수)는 ‘청록집’ 발간 60주년을 맞아 안성시와 동아일보사, 월간 ‘현대시학’의 후원으로 “ 혜산 박두진 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제1회 수상자로 시인 신대철(申大澈, 61세, 국민대 교수)씨를 선정하여 오는 25일 제6회 혜산 문학제 기간 안성시에 있는 박두진 문학자료실에서 시상한다.
수상자는 등단 20년이 경과되고 지난 1년간 작품을 발표한 시인 중에서 혜산 시세계와의 시적 친연성, 시적 성과 등을 고려하여 예심과 본심을 거쳐 선정하였다.
왕성한 시작활동을 하며 광활한 대륙적 세계와 지사적인 역사의식을 보여준 신대철 시인은 대표작 “압록강”에서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민족의 유이민 현상과 민족의 역사적 암울한 현실을 고통스럽게 노래]하고 있다.
본심의 심사위원은 유종호(위원장, 전 연세대 석좌교수, 예술원회원), 김용직(서울대 명예교수), 정공채(전 현대시인협회장), 유경환(전 문화일보 논설위원), 조남철(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이다.
시상식은 25일 박 시인의 고향인 경기 안성의 안성문예회관에서 열렸으며 상금은 1,000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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