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의 철학
1. 헬레니즘 시대의 성격
우리는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한 기원전 323년부터 중세 기독교 시대가 시작하기까지 약 700년 동안의 이 시기를 흔히 헬레니즘 시대(The Hellenistic period)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고대 그리스 문명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대와는 그 성격이 매우 달랐다. 그리스의 아테네는 기원전 5세기에 페리클레스 치하에서 예술적 ․ 정치적으로 장관의 극을 이루었지만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의 침입으로 마케도니아에 통합되어 정치적 자유를 상실하고 말았다. 삶의 터전인 폴리스(polis)를 상실한 그들에게는 국가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상실하고 다만 소극적 내면적 세계로 빠져 들어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철학은 다분히 개인적인 처신을 둘러싼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처세 철학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알렉산더 대왕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 문화는 도시국가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 동방 문화와 융합되는 보편성과 세계성을 띠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찍부터 세계정복의 꿈을 안고 있던 알렉산더는 마침내 지중해 연안의 유럽과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점령해 세계를 하나의 제국으로 만들고, 아프리카 동북부에 자기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수도에서 세계를 지배하려는 뜻을 세웠다. 그리고 모든 야만적인 문명을 몰아내고 그리스 사상과 예술과 철학을 모든 점령지에 보급시켜 하나의 광대한 정신세계를 형성하고자 했던 것이 현실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제국을 건설했던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원정에 나섰다가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를 점령한 후 기원전 327경에는 군대를 인도에까지 진출시켰다. 인도를 바로 목전에 두고 모든 부하장병들이 전쟁에 지쳐 고향에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을 보고 알렉산더는 회군(回軍)을 결심한다. 그는 바다 끝까지 정복하고 싶었으나 그 뜻을 포기하고 점령한 모든 지역을 통치하는 일에 착수하기로 생각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회군하던 도중에 역병을 얻어 33세의 젊은 나이로 그만 객사(客死)를 하게 되었다. 그의 꿈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고, 점령당했던 국가들은 앞을 다투어 국권회복에 나섰다. 그 가운데 로마(Rome)의 힘은 날로 커져서 지중해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예속시키기 시작하였다. 로마의 지배하에 신음하던 여러 민족들은 인간의 무력함을 느끼고, 초인적인 신의 힘에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 시기의 철학은 다분히 종교적인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철학자들은 세속적인 일을 제어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을 포기하고, 고난으로부터 조용한 피난처를 찾는데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인간이 숙명적으로 타고난 유한성을 탄식하고 싸움 없는 평화, 공격 없는 안전, 혹은 어떤 초자연적인 근원으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는 정치적 ․ 군사적으로는 로마에 예속되었을지 몰라도 로마의 문화와 사상을 지배하였다. 로마는 법제 분야를 제외하고는 그리스 시대보다 독창성이 적었다. 이 시대에 학문은 주로 빌려온 사상을 제 것으로 만들고, 절충적 종합을 이룩하며, 선행 철학자들에 대한 해박한 주석을 꾸미는 경향 때문에 창조적 사유보다는 박학다식(博學多識)함이 존중되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중요한 두 학파로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가 있다.
2. 에피쿠로스의 생애
(1) 에피쿠로스에 대한 오해
에피쿠로스(Epicuros, 기원전 342~271)는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많은 비난과 편견에 시달려야했던 사람 중의 하나이다. 고대 그리스 때부터 이런 편견과 비난은 있었다. 중세 이후에는 에피쿠로스 철학의 반(反)그리스도교적 특징 때문에 에피쿠로스에 대한 편견과 비난은 극단적인 수준에 이를 정도였다. 한 전승에 의하면 에피쿠로스는 지나치게 먹고 마시는 탐닉에 빠진 사람이었다. 너무 많이 먹은 탓에 하루에도 몇 번씩 먹은 것을 토해내야 했다는 것이다. 그는 밤마다 벌어지는 연회에서 자신의 정력을 모두 탕진해 버렸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너무 지나칠 정도로 사랑의 향락에 흠뻑 빠져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몇몇 단편에 포함되어 있는 창기와의 잦은 서신교환은 그 자체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그 중 한 여자와 그 여자의 집에서 동거했다는 사실은 특히나 매우 대단한 스캔들이었다. 그 외에도 악의 있는 어떤 적대자는 12통의 음란한 편지를 그가 쓴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이 모든 못된 짓을 하느라고 진지한 학문연구를 등한시 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에피쿠로스를 여지없이 깎아내리고 평가절하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엄격한 스토아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그를 단 한마디로 방탕자라고 부른다. 또 다른 후세 사람은 에피쿠로스와 그의 제자들을 심지어 에피쿠로스의 돼지들이라고까지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비난을 전승해 주는 보고들에 대해서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이런 전승들의 출처는 대부분 비(非)에피쿠로스 계열, 특히 라이벌 관계에 있던 다른 학파 계열이거나 아님 이런 전승들 중 상당수가 고대 후기 혹은 중세 초기의 그리스도교 교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사람들은 에피쿠로스학파의 영향력을 어떻게 하든지 감소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이런 의도는 에피쿠로스의 역사적 모습에 대한 왜곡된 혹은 과장된 기술을 유발할 수 있었음을 우리가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의 제자들과 후대의 추종자들이 스승의 이런 모습을 극구 부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우리는 이들의 증언에 대해서도 귀를 열어야한다. 라이벌 관계에 있는 타 학파의 증언이 아니라 이들 제자들의 증언이 에피쿠로스의 역사적 모습에 대한 정당한 재구성에 기여하는 바가 더 클 수 있음을 우리는 배제해서는 안 된다. 이들 제자들에 따르면 에피쿠로스는 금욕주의자로 칭송받았다. 학파 내부에서는 어쩌다가 가끔 기껏해야 딱 한잔의 포도주만을 마셨을 뿐, 대개는 물을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또한 아주 어려운 시절에는 보잘것없는 콩 요리로 연명했다. 어떤 제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생활을 다른 사람의 생활과 비교해 볼 때, 사람들은 그의 온화함과 자기만족을 보면 그의 생활을 하나의 신화라 부른다.” 또한 그의 말에 따르자면, 에피쿠로스를 비난하는 사람들과는 정반대로 에피쿠로스는 관능적인 사랑을 삼가 했다고 한다. 에피쿠로스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더 있다. 그는 그의 가족과 친구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세심하게 배려하였다고 한다. 나아가 노예와도 인간적인 유대관계를 맺었다. 노예에게도 철학적인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유언장에는 노예를 해방시킬 것을 지시하였다.
(2) 에피쿠로스의 생애
모든 전해지는 전승들을 종합할 때 에피쿠로스의 인생사는 아래와 같이 정리된다. 에피쿠로스는 기원전 341년에 사모스(Samos) 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테네의 시민권을 지녔으며, 에피쿠로스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아테네에 거주한 적이 있었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에 대해 기록하기를, 이미 14세에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관심을 한 번도 등한시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18세가 되었을 때 아테네로 가서 희극 시인 메난드로스(Menandros)의 곁에서 그 당시 시민의 의무인 군복무를 2년 동안 수행했다. 그 후 15년 동안 그가 보인 행적에 대해서는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가 페르시아 본토에 있는 사모스 북서쪽의 작은 마을 콜로폰(Kolophon)에서 잠시 교사로 재직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쳤을지도 모르는데, 당시 그곳에는 그의 가족이 살고 있었다.
에피쿠로스는 31세부터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짧은 시간 동안 레스보스(Lesbos)에 있는 뮈틸레네(Mytilene)에, 그 다음에는 고대 트로이아(Troia) 유적지 부근에 있는 항구 람프사코스(Lampsakos)에 철학 학교를 세웠으며, 기원전 306년에 36세의 나이로 아테네에 돌아왔다. 에피쿠로스가 아테네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통해, 이제 철학의 중심지에서 제자를 모을 자신감이 그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교외에 정원(garden)을 샀는데, 그 정원을 따라 훗날 그의 학교는 ‘에피쿠로스의 정원’이라고도 불렸다. 에피쿠로스는 이 정원에서 메트로도로스, 헤르마르코스 등 그의 가장 중요한 동료들 및 친구들과 기원전 271년에 죽을 때까지 생활하고 연구했다. 정원은 이들 모두에게 있어 학교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학문의 공동체를 넘어서서 삶의 공동체이자 정서적 공동체였다. 이런 점에서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플라톤의 학교 아카데미아(Akademia)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교 뤼케이온(Lycheion)과 분명히 달랐다.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의 공동생활은 구성원들 상호간의 우정과 스승에 대한 공동의 존경에 기초한 것이었다. 스승은 자신의 추종자들을 다름 아닌 철학을 통해 미신과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롭게 해주었거니와, 추종자들도 행복한 삶에 대한 스승의 철학 및 교훈들을 그들의 공동체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공동체에는 여자들과 노예들도 속해 있었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인종, 성, 신분, 빈부격차의 제약이 없는 자유의 해방구였다. 그 해방은 철학이라는 엄밀하고도 섬세한 지적 기획에 의해 매개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 해방구는 단지 지적인 성격만 갖는 것은 아니었다. 구성원들 상호 간의 존중과 우정 그리고 가족보다 강한 정서적 유대가 거기에 있었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역사상 보기 드문 실험적 삶의 양식이었다.
3. 소극적 쾌락주의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포스트 알렉산드리아 철학자들이 모두 그렇듯이 과학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고 선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주로 탐구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 이후 ‘선한 삶’이라는 개념은 오히려 크게 퇴보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고 정치에 관심과 책임을 가지는 것을 자기 계발의 일환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개인적인 창의성으로는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고, 로마 제국의 거대하고 비인간적인 관료제 속으로 흡수되면서 각각의 개인들은 무기력감을 느꼈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에피쿠로스도 삶의 목표는 행복이라고 믿었으나 그는 행복을 단지 쾌락과 같은 것으로 여겼다.
“쾌락은 축복받은 삶의 시작과 끝이다.” 그리고 “쾌락은 우리 인간 최초의 공통적인 선(善)이다. … 쾌락은 모든 선택과 혐오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1)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쾌락을 낳지 않는 것이라면 어떤 행동도 할 필요가 없고, 고통을 낳지 않는 것이라면 어떤 행동도 반대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며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를 결정함에 있어 쾌락의 종류를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욕구에는 두 가지가 있으므로 그 욕구를 충족함으로써 얻어지는 쾌락에도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곧 자연스러운 욕구와 헛된 욕구이다.2)
1. 자연스러운 욕구
(1) 필요한 욕구 : 식욕, 수면욕
(2) 불필요한 욕구 : 성욕
2. 헛된 욕구 : 사치와 식탐 등
자연스럽고 필요한 욕구는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며 또 쉽게 충족될 수 있다. 그런 욕구는 선하고 이상적인 쾌락을 낳으며,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는 경우는 거의 없다. 헛된 욕구는 충족될 필요가 없고 충족되기도 쉽지 않다. 그런 욕구에는 자연스러운 제한이라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칫하면 도를 지나치게 되고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게 되는 경우가 아주 많다. 성욕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대개는 극복할 수 있다. 또한 극복할 수 있다면 성욕은 극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욕의 충족은 지나치게 격렬한 쾌락을 낳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욕이 주는 쾌락은 대개 궁극적으로는 쾌락이라기보다는 고통에 가까우며 때로는 극단적인 고통가지 수반하는 경우가 있다. 자연스럽고 필요한 욕구들 중에서 에피쿠로스가 특히 중시하는 것은 휴식의 욕구이다. 여기서 휴식이란 몸과 마음 모두의 휴식을 가리킨다. 진정으로 선한 사람 즉 가장 큰 쾌락을 경험하는 사람은 모든 불필요한 욕구들을 극복하고 자신의 필요한 욕구들을 가장 적당한 방식으로 충족시키며, 많은 시간을 몸과 마음의 휴식으로 보내고 걱정거리가 없는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에피쿠로스의 쾌락에 대한 정의가 소극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에피쿠로스가 신체적인 즐거움을 경멸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신체적인 즐거움을 에피쿠로스적 쾌락의 대표 유형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에피쿠로스가 생각하는 쾌락의 극치는 정신의 아름답고도 지속적인 황홀경에서 구현된다. 즉 대화를 나누고, 음악에 귀 기울이며,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특히 무엇보다도 철학함이라는 지적 수행을 통해 경험하는 쾌락이 에피쿠로스적 쾌락의 대표적인 유형이다. ‘냉정한 추론’은 엄밀하고도 집중적인 지적 탐구, 특별히 철학적 탐구를 말한다. 이런 쾌락은 육체적 · 감각적 쾌처럼 순간순간 발생했다가 이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이고 사적인 감각의 차원에서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에피쿠로스적 쾌락은 전 일생을 통해서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유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사적인 것도 아니다. 에피쿠로스가 생각하는 쾌락은 강력한 자극이라기보다는 은은하면서도 부드러운, 그리고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다. 그것은 나만 느끼는 것이라기보다는 타인과 나눌 수 있는 것이며 타인에게 전파 혹은 감염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에피쿠로스의 쾌락 개념은 공(空, empty) 개념이다. 어떤 의미에서 에피쿠로스적 쾌락은 없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고통의 부재(不在)’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쾌락은 정의상 ‘고통과 혼란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쾌락은 적극적으로 만족된다기보다는 고통이나 괴로움을 제거함을 통해서 실현된다. 고통과 괴로움이 하나도 없을 때 진정한 쾌락이 구현된다. 그때에는 쾌락이 ‘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고통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런 의미에서 쾌락은 공 개념이다. 혹은 보다 약화시켜 말하자면, 쾌락은 적극적 개념이 아니라 소극적 혹은 부정적(negative) 개념이다. 따라서 우리는 쾌락주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우리는 에피쿠로스로부터 배울 수 있다. 쾌락의 본질을 육체적 자극의 최대화로서 이해하는 방식은 속류적인 쾌락주의이며, 에피쿠로스는 다름 아니라 속류적인 쾌락주의와 싸우고자 했다.
불행한 자는 육체적으로 고통을 느끼는 사람만은 아니다. 정신적인 괴로움에 시달리는 사람, 지문의 용어로 표현하면, ‘영혼의 혼란’ 속에 빠진 사람은 더 불행하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런 영혼의 혼란을 흔히 ‘정념’(情念, passion)이라 불렀다. 두려움, 공포, 탐닉, 욕망, 증오, 후회, 시기, 질투, 슬픔, 절망 등은 우리를 뒤흔들어 놓는 정념의 예들이다. 불행한 자의 삶은 정념으로 뒤덮여 있다. 에피쿠로스는 정념을 하나의 ‘격렬한 운동’으로 보았다. 이런 정념에 우리가 빠져있을 때에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제어할 수가 없다. 마치 브레이크가 터져버린 기관차의 운전자가 어찌할 줄 모르면서 기관차의 질주 방향대로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는 경험을 하듯이, 정념에 빠졌을 때 우리는 정념이 우리 삶을 모는 방향으로 우리를 맡길 수밖에 없는 체험을 한다. 우리는 정념의 운동에 의하여 지배당하는 것이다. 정념은 격렬한 운동 중에 있는 정신적 사건들의 연속이다. 행복은 격렬한 운동과 반대 관계에 있다. 호수 표면처럼 잔잔하고 고요함이 행복의 증후이다. 행복은 지극히 안정적이고도 지속적인 상태이다. 따라서 쾌락은 ‘영혼의 혼란으로부터의 해방’, 즉 ‘정념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정의된다. 이런 상태를 에피쿠로스는 ‘평정심’(ataraxia)이라 불렀다.
에피쿠로스를 추종하던 일부 로마 학자들은 에피쿠로스의 ‘쾌락’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여 ‘적극적인 쾌감’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이 극단론자들 덕분에 오늘날 에피쿠로스주의하면 대개 관능적인 쾌락주의를 가리키는 뜻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이론은 주요한 철학적 운동으로까지 연결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제자들은 그리스와 로마에서 몇 세기동안이나 계속 이어졌다. 그의 가장 유명한 주종자는 로마의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이다. 그는 기원전 1세기에 《만물의 본성에 대하여》라는 장문의 철학 시를 통해 스승의 철학을 설명했다. 오늘날 에피쿠로스이 사상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루크레티우스의 그 시 덕분이다.
4.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
(1) 죽음의 공포
인간 불행의 가장 큰 원인 중에 하나는 바로 죽음의 공포이다. 그러나 이 공포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며 삶과 죽음의 본성과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에피쿠로스는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 쾌락이란 육체적인 고통과 마음의 근심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에피쿠로스가 조잡한 관능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쾌락에 대해서 이러한 소극적인 정의 때문이다. 이런 정의의 문제점은 그것을 논리적 극단으로 밀고 갈 경우에 차라리 삶의 부재가 삶 자체보다 낫다는 결론에 이른다는 점이다.3) 이러한 추론은 사실 역설적인 면이 있다. 에피쿠로스 자신은 그의 철학에서 죽음 공포를 없앤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영향을 받아 에피쿠로스는 죽음이란 단지 감각과 의식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감각이나 의식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죽음이 찾아왔을 때는 이미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이며, 내가 살아있는 한 죽음이 나를 찾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4)
그렇다면 사람의 유일한 악은,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바로 고통이다. 만일 어떤 사건이 우리에게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것을 두려워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러나 고통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살아 있어야만 한다. 감각능력은 생명을 필요로 한다. 죽은 후 시신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의 죽음은 감각능력이 끝나는 것이므로 죽은 후에는 아무런 쾌락도 고통도 느낄 수 없다고 에피쿠로스는 주장한다. 만일 죽은 후에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죽음은 우리에게 어떤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직 고통만이 우리에게 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더욱이 죽음을 예상하는 것은 아무런 고통도 일으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음을 두려워하기로 선택하지 않는 한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어떤 해도 입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두려움
에피쿠로스가 살던 당시 대부분의 그리스인들은 올림포스 신들이 자신들과 공존하고 있다는 신화적 전통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신들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었다. 이러한 두려움은 에피쿠로스가 추구하는 ‘평정심’(ataraxia)의 상태를 유지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에피쿠로스는 완전한 존재로서의 신들은 인간의 불행한 사건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신들은 결코 죽지 않으며 더없이 행복한 존재들이다. 인간의 일에 개입하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정념과 편애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성질은 조금도 흔들리지 신들의 평온함과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다. 완전한 존재들은 스스로 아무런 문제도 갖고 있지 않으며 또한 다른 어떤 존재에게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분노와 편애 같은 감정을 지니지 않는다. 그런 감정들은 나약함을 의미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즉 간섭하고 화내고 편애하는 것은 최고의 행복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므로 그들은 인간의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세계는 원자들의 운동을 규정하는 엄격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러한 규칙과 법칙을 전제할 때 신들이 물리적 세계를 조종하여 인간을 처벌하거나 칭찬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해진다. 자연의 세께는 자신의 장치에 따라 작동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신을 전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신들은 자연이나 인간의 영역과는 전혀 동떨어진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5. 원자론적 유물론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Democritus)가 전개하였던 원자론적 유물론5)에 몇 가지 독창적인 변형을 가하여 자신의 형이상학을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그는 원자론적 유물론으로부터 유래한 쾌락주의를 완전하게 전개하였다. 원자론적 유물론에 따르면 현존하는 모든 것은 허공을 운동하는 원자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물질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원자들 자체는 매우 작지만 그 크기와 형태, 구조가 서로 다르다. 각각의 원자들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며 더 이상 작은 부분으로 나누어 질 수도 없다. 이 우주에는 무수한 수의 원자들이 존재하는데 이는 곧 이런 모든 원자들을 포함하기 위하여 공간 자체도 무한해야 함을 의미한다. 원자들도 무게가 있으며6) 이런 특성 때문에 원자들은 자연적인 상태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운동을 한다. 원자들은 허공중에서 일정한 운동을 하기 때문에 그들은 최초에는 어떤 저항도 받지 않으며 최초의 운동 속도는 서로 동일하다.
원자론적 유물론에 따르면 인간은 원자로 구성된 물리적 대상에 지나지 않으며 특정한 개인 또한 일정한 기간 동안 안정된 상태로 동일성을 유지하는 원자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모든 측면을 오직 원자 운동과 관련해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정교한 이론을 제시하였다. 즉 운동하는 원자들이 우리의 육체에 충돌하게 되면 이로부터 정신적인 활동과 사건을 형성하는 내부적 운동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각이란 외부적 대상으로부터 방출된 매우 미세하게 유출된 원자들이 우리의 감각기관에 충돌하여 여기에 운동을 일으킨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사고는 외부적 대상으로부터 생겨난 보다 미세한 원자들이 감각기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우리의 정신에 스며들어서 사고라는 운동을 일으키게 된 결과이다. 특히 쾌락과 고통의 느낌은 정신과 육체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원자들의 운동인데 육체 외부의 운동이 육체에 충돌한 결과로 생겨날 수도 있고, 사고에 의해서 생겨날 수도 있다. 그러나 느낌들 자체는 일종의 운동이다.
마지막으로 에피쿠로스에게 있어서 영혼은 순전히 물질적인 것으로서 매우 미세하며, 부드럽고, 둥글며, 크기가 작고 따라서 빠르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원자들로 구성된다. 영혼을 이루는 원자들은 육체를 이루는 원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또한 영향을 받기도 한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영혼을 감각의 제일 원인이라고 믿었다. 영혼을 이루는 원자들이 육체의 운동에 의해서 자극받아 움직이게 되면 그 결과 이 원자들은 쾌락과 고통이라고 불리는 감각들을 육체에 산출하게 된다. 육체가 죽으면 영혼은 사라지게 되며 이와 더불어 생명과 운동, 감각도 없어진다. 따라서 죽음에 이르면 인간은 더 이상 고통을 느낄 수 없다.
6. 에피쿠로스 비판
에피쿠로스는 쾌락과 고통이 서로 모순관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즉 우리가 최소한 육체적인 측면을 포함한 쾌락의 상태에 있다면 우리는 동시에 고통의 상태에 있을 수 없으며, 그 역 또한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는 고통의 부재는 곧 쾌락이라는 에피쿠로스의 주장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만일 쾌락과 고통이 서로 모순관계를 이룬다면 마찬가지로 쾌락의 부재는 곧 고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닌 듯하다. 우리는 자주 쾌락의 부재 상태에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체험한 바 있다. 에피쿠로스가 추천한 최고선인 ‘평정심’(ataraxia)의 상태는 분명히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느낄 수 없는 어떤 상태이다. 이처럼 고통과 쾌락은 어떤 종류의 감각과 동일시할 수 없다.
에피쿠로스는 단지 쾌락을 우리가 즐기고 좋아하는 모든 것과 동일시하고 고통을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모든 것과 동일시한 것처럼 보인다. 즉 우리는 평정심의 상태를 즐기므로 그것은 쾌락을 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결국 모든 사람은 자신이 즐기는 것을 즐기며,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피하는 것을 피한다는 식의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쾌락으로 충만하고 고통 없는 삶을 추구하라’는 에피쿠로스적인 의무는 우리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고 피하는 것을 피하라는 무의미한 충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고통과 쾌락에 대한 더욱 분명하고 구체적인 정의가 없는 한 그의 주장은 순전히 공허한 주장일 뿐인 것이다.
<참고문헌>
1. 로버트 L. 애링턴, 김성호 옮김,《서양윤리학사》, 서광사, 2005.
2. R. 샤하트 지음, 정영기, 최희봉 옮김,『근대철학사』, 서광사, 1993.
3. 스털링, P. 램프레히트 지음, 김태길 외 옮김,『서양철학사』, 을유문화사, 1996.
4. 김형석 지음,『서양철학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7.
5. 쉬퇴리히 지음, 하재창 역,『세계철학사』,(상) 배재서관,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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