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박 / 김려원
어둑해지는 산길에서 후박꽃들 어두워진다.
어차피 꽃잎의 질서란 밤과 낮을 보고 배운 방식이니까, 저녁은 두껍고 아침의 산길은 한없이 얇아서 모두 후박나무의 차지다.
나는 서둘러 산길을 내려오면서
저 어두운 밤이 모두 축축한 나무들 껍질로 단단해지는 것을 보았다.
흐르는 소리의 소유권을 주장하듯
물길 옆, 나무들 흔들리다가
물길을 닮아 구불구불해지는 것을 꽤 여러 해 지켜보았다.
계곡에 박힌 돌부리들, 물에 걸려 넘어진 저것들은 실상 옆새우나 가재, 도롱뇽이나 개구리와 같은 냄새를 풍기며 모래의 날들로 간다.
후박, 이라 말하고 나면 반드시
오르막과 내리막이 한 호흡 속에 있다.
두꺼워진 후박이 어깨에 내려앉는다.
비늘을 품은 나무껍질들이 어둠을 바짝 끌어당긴다.
[심사평]
본심에서 집중적으로 살펴본 작품은 「창세기」 외 4편, 「마트료시카」 외 7편, 「돼지껍데기집」 외 4편, 「저문 의자」 외 9편이었다. 그중에서도 「돼지껍데기집」 외 4편은 돼지껍데기를 구워먹는 사람들, 날이 갈수록 붓기가 더해가는 아버지와 그를 둘러싼 식구들, 마루에 걸터앉아 옥수수를 먹는 늙은 내외, 저수지의 물결을 경전으로 인식하는 엄마와 아이 등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대상을 품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이 구체적인 묘사를 통해 따스하게 전해온 것이다. 그렇지만 한 작품에서 같은 시어의 중복 사용과 설명식 문장으로 말미암아 작품이 단순하고 긴장감을 갖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
「저문 의자」 외 9편은 의미의 전달이 잘 안 되거나 가볍게 여겨지는 표현들이 눈에 띄어 우려되었지만 「종잇장을 떠도는」「시시각각 메니에르」「후박」 등을 읽으면서 곧 안심되었다. 특히 「후박」의 경우는 서정성을 바탕으로 내용과 형식이, 주제와 표현이 잘 결합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꽃잎의 질서란 밤과 낮을 보고 배운 방식”이라든가 “어두운 밤이 모두 축축한 나무들 껍질로 단단해지는 것”이라는 등의 표현은 이 세계 존재들이 자연과 함께하는 운명이라는 시인 인식을 심화시키고 있다.
미래파로 지칭되는 시인들의 난해한 작품이 시단에 범람해 우리 시의 영역이 확대되기보다는 다른 시인들로부터 또 독자들로부터 외면 받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데, 「후박」에서 그 극복의 가능성을 보았다. 지식 전문가가 아니라 지식인다운 자세를 가지고 우리 시의 세계를 더욱 넓히는 시인이 되기를 기대하고 응원한다.
심사위원 맹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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