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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신라는 발효 중 /  봉윤숙

 

 

백자 달 항아리가 보인다

이음새 말끔히 다듬어진 둥근 궤적 따라

동굴처럼 깊어지는 몰입의 경지

침묵의 모퉁이 돌아 나오는 망치질 소리

발효의 시간

 

그 백자 항아리 속

햇살 구워지고 소나무 향이 번지면

시간의 장작은 붉게 타 오르고

무심한 아름다움이

균열의 틈을 메우는데

 

거기 대나무 숲이 있는가

달빛은 어둠으로 휘어지며

새의 사랑은 변방에서 깊어지는데

더러 빠지는 깃털은 누구의 것인지

금낭화도 야윈 몸을 늘어뜨리며

고요의 목덜미를 적신다

허공의 뼈대를 세운다

 

숨겨진 달 항아리는

그늘 냄새를 풍기는 어둠

어둠의 주름이 환하게 펴지면

향기의 다락방엔 삐걱이는 사다리 뿐

 

그 곳에서 신라가 발효 중이다

 

 

 

 

꽃 앞의 계절

 

nefing.com

 

 

 

[당선소감]

 

불광불급 (不狂不及) 이라 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미쳐야 미친다. 미치려면 미쳐라. 지켜보는 이에게 광기로 비칠 만큼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미친듯이 몰두하지 않고는 결코 남들보다 우뚝한 보람을 나타낼 수가 없다. 정민의 "미쳐야 미친다"에 나오는 글귀다.

 

늘 미안했다. 시에게, 발꿈치 들고 담 너머를 기웃거리는 아이처럼 주변만 맴돌았다. 그러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벌써 저만치 가 있었다. 그렇지만 맴돌기를 멈출 수는 없다. 무뚝뚝한 담벼락이 나에게 답을 주는 그날까지 아니 밀랍인형처럼 흥건히 녹아내릴 때까지,

 

폭설이다. 강원도에만 눈이 온 것은 아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도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다. 실제와 상상이 흩날리는 곳에서, 내부와 외부가 서로 조응하는 곳에서, 멋진 저녁으로의 초대를 받을 것이다. 지상에 내리는 눈들은 제가 누울 곳을 찾아서 가는 것은 아닐까 아직도 시에 온전히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뒤돌아봅니다. 부족한 저에게 넘치는 가족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시의 손을 잡을 수 있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신 숭의여대 강형철, 전기철 선생님 고맙습니다. 몇 해 동안 메타포와 오른쪽, 왼쪽 날개를 달 수 있게 깨우쳐 주신 김영남 선생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던 " 정동진역" 식구들, 함께한 시간들이 있어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부족한 저의 시를 이렇게 큰 상으로 보답해주신 경부문협 성춘복, 김후란, 김송배 선생님 깊은 감사 드립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큰 모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심사평] 시적 구도와 주제의 투명성

 

현대시의 작품경향은 대체로 시적 소재와 구도의 설정에서 투명하고 명징한 주제의 투영이 창작의 본령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6백여 편의 응모작품들을 읽은 결과 모두가 이와 같은 시적 상황과 전개 과정에서 창출하는 주제에 부응하는 언어의 융합과 함께 각자의 개성에 따라 적절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문학대상이라는 역사와 전통이 작품의 수준과 응모자들의 시정신의 예측을 위해서는 우선 언어의 역량을 살피는 일이었다. 이는 시와 언어의 상관성은 그 작품의 성패를 가늠하는 일차적인 기준이 되어 시적 대상물에 대한 신선하면서도 함축된 의미의 요소들을 응축하고 있는가에 중점을 두고 심사에 임했다.

 

이 결과 <물 위에 지은 탑> < 지금 신라는 발효 중> 그리고 <감은사지에서> 등 세 편이 마지막까지 장시간의 논의를 필요로 했다. 이는 심사위원들이 정한 기준에 따라서 언어의 구사와 주제의 투명성이 작품의 골격으로 현현되어 그 메시지가 선명하게 전해지고 있는지를 몇 차례의 독해를 거쳐서 < 지금 신라는 발효 중> 을 당선작으로 선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 백자 달 항아리' 를 통해서 탐색하는 '신라가 발효'하는 시적 구도와 접근이 '허공의 뼈대''어둠의 주름'이라는 이미지가 적시하는 언어와 동시에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서 이러한 시적 정황들이 현대시의 의미성과 근접하게 발현되는 언어가 감응을 유로해서 공감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현대시는 이미지의 창출에서 함축된 주제가 바로 언어와의 조화가 가장 적절하게 나타날 때 그 작품은 수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더욱 정진해서 좋은 작품 창작하기를 기원한다.

 

심사위원 성춘복, 김송배, 김후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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