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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항아리 / 정재돈

 

 

어머니는 줄곧 항아리처럼

둥글고 잘 발효된 가정을 만드시길 원하셨다.

갓 빚은 항아리에 가정의 안위를 담그시고

오랜 기간 모정의 효소로

자식들을 맛깔나게 숙성시키셨다.

행여나 음지에서 부식되지는 않을까

뚜껑 열어 햇살이 드는 곳에 말리셨고

우설(雨雪)의 세례엔 포근한 품으로 감싸 안으며

남몰래 스미는 한기를 떠 안으셨다

무르던 된장과 고추장이

숙성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시며

언젠가 많은 이들에게 그윽한 맛을

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내심 흐뭇하셨다

품안에 익어가는 자식들 보며

평생 흙에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업을

마다하지 않으시며 기쁘게 깜냥깜냥 맞이하셨다

지금은 항아리처럼 짙은 황토 빛 얼굴

오돌토돌해져 주름진 살갗

오늘 문득, 그 위에

일터에 나가려던 햇살이 부리나케 앉는다.

유난히 광휘한 빛이 눈부시다

 

 

 

 

맑은 누리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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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마지막 정거장 / 김옥란

 

 

이승에서 임기를 마친 이들이 모여 있다

당신의 몸을 열어 이 땅에 사람을 보내고

달고 쓰고 독하고 험한 것들을 다스려

아이를 키우고 가르쳤던

그 전지전능을 까맣게 잊은 이들이

당신들이 온 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머물고 있다

 

팔딱이는 어린 심장이 뛰어들던 넓은 가슴과

깜깜하고 낯설던 세계를

등불로 길을 내듯 밝혀 보이던 푸른 경지는

여기까지 오는 어느 길에서 탈탈 털어 버렸는지

몸도 마음도 지닌 것이 없다

 

길이 보이지 않는 가난의 벽 앞에서도

당당하게 무릎 세우던 당신

주고 또 주어 샘 같던 손은

망각의 바다를 헤엄치느라

허공 한 줌만 쥔 채 고요하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놀라거나 넘어질 때

우리는 기도하듯 당신을 불렀고

종교처럼 의지했다

죽어 가는 사람이 찾던 비명 같은 이름들이

불 꺼진 밤처럼 닫히고 있는 요양병원

신의 능력을 상실한 어머니들이

이승의 마지막 정거장에서 쉬고 있다.

 

 

 

 

 

5회 백교문학상대상 수상작으로 정재돈(43·수원)씨의 시 항아리가 선정됐다.

 

백교문학회(회장 권혁승)는 효친사상과 애향심이 담긴 문학 작품을 공모, 대상을 비롯해 수필과 시 등 2개 부문의 수상작을 30일 발표했다.

 

우수상은 시 부문에 김옥란(57·강릉)씨의 마지막 정거장’, 수필 부문에 황인숙(49·대구)씨의 문패와 김소희(60·부산)씨의 할미꽃이 각각 선정됐다.

 

시상식은 오는 2일 오후 2시 강릉 경포동 핸다리마을 사모정공원에서 열린다.

 

백교문학상은 백교문학회가 젊은세대에게 효친사상을 일깨워 주고 애향심을 고취·함양시키기 위해 2010년부터 매년 효와 사친(思親)을 주제로 한 시와 수필을 공모해 시상하고 있는 효친문학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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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최재영

 

 

처음 나는 겸손한 흙이었다
진흙 층층이 쌓인 어둠을 밀어내고
누군가와 끈끈하게 얽혀진 숨결
불룩한 옆구리를 뽐내며
어느 집의 연륜을 저장하는,
도대체 우화를 꿈꾸지 않았건만
나는 햇살을 움켜쥐고
내 안의 목록을 삭여내는 중이다
아주 오랫동안
해마다 비밀스런 내력을 보태며
맛과 맛, 그 아귀를 맞추는 시간들은
서로 맥박을 주고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때마다
번쩍이는 세월의 빗금하나 그어지고
그리운 것에 대한 열망으로
짜고 싱거움에 길들여진 것들
손꼽아 여닫히던 햇살들
점점 순도 높은 깊은 맛을 우러낸다
내게 저장된 세월을
프리스틱 통에 담아가는 사람들,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
겸손한 덕담 하나씩 건네준다.

 

 

 

꽃피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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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詩 쓰는 동안 행복과 고통이”

 

많은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내게 있어 詩를 쓴다는 것에 대해 뭐라고 정의 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때그때 당면한 문제들에 최선을 다해왔다고 생각한다.
한 편 한 편 완성하기 위해 보낸 많은 불면의 밤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그래서 나 스스로를 검증할 수 있게 되었지 않나 싶다.
詩를 쓰는 동안은 행복하고 또한 고통스럽다.
문장을 지우고 고쳐가면서 더 나은 글이 완성될 때의 그 만족스러운 순간들이 여기까지 오게 했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는 겸허한 시인이 되고 싶다.
지난 일년을 어떻게 보냈나 싶게 빠르게 흘러간 시간들이다.
바쁘다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았던 것 같다. 그 시간들 속에 함께 해 주신 많은 분들께 고맙다.
詩가 뭔지도 모르면서 다만 엄마가 지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좋아하는 아이들과 우리 가족을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해 주는 남편, 무엇보다도 고맙고 감사하다.
詩가 임재할 진정성에 대해 가르쳐 주신 박경원 선생님, 고맙습니다.
만나면 즐겁고 편안한 시원 동인 선배님들, 제가 한턱 단단히 쏘겠습니다.
詩의 길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신문사와 부족한 작품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쓸 것을 다짐하며 감사드립니다.

 

 

 

 

루파나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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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순도높은 깊은 맛 우러나오길

양의 풍성함과는 달리 질이 그것에 미치질 못해 실망스런 심사였음을 먼저 밝혀둔다. 한동안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들이 일정한 수준을 견지했던 점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이상한 일이다. 응모하신 분들이 스스로의 문학적 진지성과 치열성을 한번쯤 되돌아봐야 할 것 같다.


대부분의 응모작들이 경험의 지루한 서술이나 단순한 풍경의 묘사에 빠져 의미있는 언어의 장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었고, 어떤 응모작들은 맥락 없는 언어의 남용, 단절된 이미지들의 혼란, 장식적 비유의 화사함에 갇혀 스스로 시적 품격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또 어떤 응모작들은 자기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인지 개별성이 보편성으로 이어지질 않아 유의미한 소통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몇몇은 나름대로의 장점을 갖고 있었다. 주대생 씨의 경우 언어의 재치가, 고옥희 씨의 경우 비유의 참신성이 살만했고, 강란숙 씨는 일상적 체험에 대한 성찰이, 오영희 씨는 서사의 무게가 돋보였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주제의식의 밀도라든가, 시적 구조의 짜임새 등이 튼실하지 못하여 더 이상의 바람직한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였다.


최재영 씨는 시적 자질이 그 중 나아보였다. 언어의 운용이 자연스럽고, 시를 얽어매는 솜씨가 꽤나 세련되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평범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주제의식이 뚜렷한 것과 너무 빤한 얘기를 드러내는 것은 구별되는 것이다. 언어의 질박함이 미덕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표현의 수일성의 결함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신인임에랴.


정직하게 말하면, 나로서는 어느 것도 당선작으로 밀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많은 젊은 문학도들의 기대와 희망을 헛되게 저버릴 수가 없다는 핑계로 나는 나 자신과 타협을 했다. 아쉬운 대로 최재영 씨의 「항아리」를 당선작으로 내보내는 까닭이다. 최재영 씨는 시의 길에 더욱 정진하여 ‘겸손한 덕담’만이 아니라 정말 ‘순도 높은 깊은 맛’을 우려낼 수 있는 항아리로 성장하길 바란다. 아울러 뽑히지 못한 많은 분들도 실망하질 말고 자신의 시업을 꿋꿋이 가꾸어 나갔으면 한다.

 

심사위원 김승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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