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 최승호
하늘이라는 무한(無限) 화면에는
구름의 드라마,
늘 실시간으로 생방송으로 진행되네.
연출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수줍은지
전혀 얼굴을 드러내지 않네.
이번 여름의 주인공은
태풍 루사가 아니었을까.
루사는 비석과 무덤들을 무너뜨렸고
오랜만에 뼈들은 진흙더미에서 나와
붉은 강물에 뛰어들었네.
불멸을 향한 절규들,
울음 울던 말매미들이 사라지고
단풍이 높은 산봉우리에서 내려오네.
나는 천성이 게으르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인지
산 좋아하는 이들을 마지못해 따라나서도
개울가에서 그냥 혼자 어슬렁거리고 싶네.
누가 염치도 없이 버렸을까.
휑하니 껍데기만 남은 텔레비전이
무슨 면목없는 삐딱한 영정처럼
바위투성이 개울 한구석에 처박혀 있네.
텅 빈 텔레비전에서는
쉬임없이
서늘한 가을물이 흘러내리네.
[심사평] 서정과 비판의 융합 한국시의 희망 읽혀
제3회 미당문학상 후보로 올라온 열 명의 시인들은 한결같이 오늘의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분들로서, 그들 모두 자신의 방향에서 일가를 이루거나 혹은 열정적인 기세로 자기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는 이들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시적 지향들을 향해 동일한 시선으로 시의 선호를 나타내는 일을 피하면서, 보다 젊고 역동적인 한국시의 전망을 제시하는 일에 기여하는 것이 심사의 과제가 됐다.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시단의 중진들이 수상자가 된 1~2회 때와 달리 이번 심사는 이 때문에 상당한 시간과 토론이 소요됐다. 그 결과 논의는 최승호.천양희.이성복.나희덕 제씨로 압축됐고, 다시 최승호, 천양희 두 시인이 섬세한 분석과 엄정한 평가의 대상이 됐다.
최종 결정은 보다 연배가 젊은 최승호 시인 쪽으로 났으나, 수상 여부가 그 시인의 시적 능력과 수준을 총체적으로 판단하는 일과 항상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결심에 오른 모든 시인에게 다시 한 번 말씀드린다. 수상자가 된 최승호씨에게 축하를, 그리고 다른 여러분에게도 격려와 감사를 드린다.
최승호 시인은 그와 동년배의 몇몇 시인과 더불어 우리 시단의 대표적인 중견이다.
그는 데뷔 이래 20여 년 간 풍부한 상상력과 시적 재치, 그리고 현실의 환부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의 안목으로 우리 시의 공간을 더 넓게, 더 깊게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데에 큰몫을 해온 탁월한 시적 재능으로서, 이미 많은 독자의 기억 속에 확실한 자리를 차지한다.
수상작 '텔레비전'에서 '불멸을 향한 절규들'과 같은 표현은 그 자체로는 진부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태풍으로 무너진 무덤에서 붉은 강물로 '뛰어든' 뼈들과 울음우는 말매미들 사이에서 그 표현은 오히려 강력한 시적 이중성(二重性)의 힘을 발휘한다.
이러한 이중성을 바탕으로 이 작품은 하늘/강물/개울의 자연과 버려진 텔레비전이라는 폐기물 사이의 대비를 은밀하게 행한다.
사실 시의 서정은 오늘날 목가적 서정으로서 그 진실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과 기계, 혹은 도시나 소비적 풍경이 새로운 서정으로 대체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 사이에서 발생하는 진실의 개연성이며 그것은 이러한 공존.병치의 풍경 속에서 고도의 시적 관찰과 기법을 요구한다.
그러나 가장 좋은 시는 역시 전통적 서정의 미덕 안에서 현실의 복합성을 수용하고, 그 전체적 풍경을 새롭게 비판해내는 능력이다. 최승호의 '텔레비전'은 이 같은 시 독자들의 희망에 근접해있다. 이 시는 하늘과 강물과 개울을 말하면서도 그것들을 붙들지 않는다.
또한 버려진 텔레비전의 쓸쓸한 모습을 그려내면서도 그것으로 대변되는 영상문화의 부도덕 혹은 불가피성에 대해 선적(禪的).지적 판단을 행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문명의 피곤을 중심으로 한 시인의 깊은 고뇌와 담담한 자기 표현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시 아닌가. 시인 스스로의 삶 깊은 곳에서 길어올린 아름다운 마음들을 형상화 한 천양희의 아름다운 작품들을 수상작 밖에 놓아두는 아쉬움도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아울러 적어 놓는다.
심사위원 김주연.유종호.이어령.홍기삼.황동규
"나를 지우면서 詩를 쓰고 싶다"
"(시를 쓰는데 있어)시적 형상화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이 자신의 고통과 슬픔, 사상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독자들이 향유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시적 형상화를 중시하다 보니 좀 건조한 문체를 스타일로 얻게 됐습니다. 한편 시를 쓰면서 제 자신에게 반복해 던지는 물음은 '무엇이 시를 예술이게 하느냐'는 문제입니다."
3회 미당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시인 최승호(崔勝鎬.49)씨는 수상소감을 묻기 전에 준비된 발언을 꺼냈다. 바둑 아마 3단다운 선수(先手)였다. 최씨는 말 사이사이 충분한 호흡을 두고 리듬감 있게, 그러면서도 나직하게 소감을 밝혔다.
듣고보니 수상소감이라기보다 자신의 시론(詩論)에 가까웠다. 그의 나직한 시론은 시의 생사여탈이 문제가 된 가상의 상황에서 시를 옹호하는 최후 변론 같은 힘이 있었다. 얼렁뚱땅 소감을 바꿔치기한 그의 시론은 미당론으로 이어졌다.
"그런 물음을 던지다 보면 우리는 미당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당이야말로 말의 음악성, 말의 회화성을 조화시킨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당의 시를 읽으면서 '이건 시가 아닌데' 하는 의문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조금 생뚱맞게 시작한 수상 인터뷰는 내처 최씨의 시론에 대한 문답으로 치달았다. "미당과 소월의 시는 천년 동안 강물로 흘러가고 백년도 못사는 독자는 그 강을 건너가는 사람일 뿐"이라는 최씨의 말꼬리를 잡아 "당신의 어떤 시가 시의 강물이 되어 흘러갈 거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독자가 건너가야만 시가 강이 되는 것입니다. 한편의 시가 흘러가길 바라지 않습니다. 몇편의 시가 흘러갈 수 있다면 행복한 시인이겠죠"라는, 듣기에 따라서 자신만만한 대답이 돌아왔다.
최씨는 꼬집어 말하지 않았지만 1982년 '오늘의 작가상'을 안긴 대표작 '대설주의보'를 그의 '강물'로 꼽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대설주의보'가 보여준 광활하고 막막한 장면의 감동, 충만한 긴장감은 20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하다. 문학평론가 이광호의 지적대로 시 속에 사용된 '계엄령'이라는 단어는 당시의 정치현실과 관련, 폭력과 공포를 떠올리게 하는 정치적 외연을 지닌 기표였다.
문학평론가 김우창은 '대설주의보'를 포함한 최씨의 첫 시집 '대설주의보'(1983년)의 세계를 '뛰어난 사실적 관찰과 상상력의 결합, 그것을 통해 새로운 지각과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으로 분석했었다.
최씨는 '대설주의보' 시절부터 자신의 시에 일관된 특징으로 '말의 회화성'을 꼽았다. "말의 회화성, 말의 건축, 말의 조소(彫塑),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갖고 시를 써왔다"는 것이다. 미당 시의 두박자 중 한박자는 갖춘 셈이다.
최씨가 시에서 자주 써왔다고 밝힌 데페이즈망(depaysement.轉置) 기법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 의외의 물건을 갖다 붙여 낯선 충격을 주기 위해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사용했던 기법이다. 수상작 '텔레비전'에서도 최씨는 산행길 개울가에 버려진 껍데기만 남은 텔레비전에서 삐딱한 영정을 떠올린다.
"제 자신 말의 음악성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초기에는 불협화음 같은 것을 추구했지만 요즘은 말의 자연스러움, 음악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나만의 시의 음악성을 어떻게 가질 것인가를 열등감 속에 모색하고 공부 중입니다."
그동안 말의 회화성에만 치우쳤다는 반성은 최씨를 자연스럽게 말의 음악성에 대한 추구로 이끌었다. 최씨가 보기에 우리 시단에 대상과 자기 자신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인은 많지만 정작 언어 자체에 깊은 관심을 갖는 시인은 드물다.
"말의 음악성과 역동성에 있어 가장 탁월한 시인이었던 김수영, 언어예술로서의 시에 충실했던 김종삼.박용래 등"이 그래서 아쉽다.
'말의 회화성에서 음악성으로의 관심 변화'로 최씨의 시력 20여년을 압축할 수는 없다. '대설주의보'와 이번주에 출간된 최신작 시집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사이에는 '세속도시의 즐거움' '회저의 밤' '그로테스크'같은 시집들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최씨 스스로는 시와 함께한 20년을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초기▶'회저의 밤' 이후 인간 내면에 관심을 기울였던 시기▶'그로테스크' 무렵 시작된 이전 두시기의 종합 등으로 정리했다.
요즘 최씨는 "나를 지우고 싶다. 나를 지우면서 시를 쓰고 싶다. 그랬을 때 더 큰 세계가 열린다"는 생각에 골몰해 있다. 감수성이라는 시인의 필터를 깨끗하게 유지하겠다는 다짐으로 들린다. 필터를 깨끗이 하기 위해 최씨는 선사(禪師)들의 어록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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