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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네 / 정현종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나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견딜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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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미당문학상은 시집 한 권 이상을 펴낸 시인이 지난 1년간 새로 발표한 시 중 최고의 시 한편에 주어진다.

 

심사대상으로 오른 시인 15백명의 시 6562편 중 중견 시인.문학평론가 50명의 추천, 5명의 예심, 5명의 본심 등 3심을 통해 수상작을 선정했다.

 

본심의 대상은 시인 열분의 작품이었으며, 이들 모두 한결같이 우리 시의 높은 열정과 언어조직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심사자들은 먼저 심사기준을 정하고 각자 의견을 나눈 다음 투표를 통해 각기 세분의 시인을 추천하고 그들을 대상으로 다시 논의한 다음, 그들 중 가장 탁월한 작품을 골라 압축, 토론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 결과 만장일치로 정현종 시인의 '견딜 수 없네' 를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심사기준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시의 멋과 맛, 명민한 감각이 잘 드러나야 한다는 점인데, 이러한 기준은 시가 노래라는 사실에 대한 원초적 인식과 무관할 수 없었다.

 

굳이 미당의 시정신과 결부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타당성이 결여된 설명조.산문화 등은 바람직한 시의 미학일 수 없을 것이다. 답답한 작품들이 없지 않다는 불만도 이런 차원에서 제기되었다.

 

둘째, 시는 서사와 달리 메시지가 요구되지 않는 반면, 상상력과 이미지 사이의 역동적인 힘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상상력은 분방하지만 그것을 조형한 이미지가 걸맞지 않는다든지, 이미지는 아름다우나 그 속의 상상력이 빈한하다면 시의 긴장도, 재미도, 창조적 즐거움도 기대하기 힘들다.

 

본심에 나온 열분의 작품은 모두 이런 관점에서 세심하게 읽혀졌고 검토됐다. 그 결과 수상작 이외의 작품에 대해서도 심사자들은 대체로 깊은 공감과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여기서 밝혀둘 일은, 황동규 시인의 경우 그의 부친되는 황순원 문학상이 미당문학상과 함께 시행되는 관계로 첫회에는 아예 본심 심사에서 다루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합의 아래 시인의 작품들을 심사에서 제외하였다는 점이다. 황씨와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1회 미당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된 정현종 시인은 한국 시단의 수준을 세계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려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대표시인이다.

 

수상작으로 결정된 '견딜 수 없네' 의 탁월함은, 이 작품이 슬픔과 즐거움의 앰비밸런스(양가성) 를 융합시키면서 그것을 노래로 읊조리고 있다는 점에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시는 노래를 상실하고 있는 느낌을 주는데, 감사하게도 정시인의 많은 시들은 메마르고 뻣뻣해진 채 감정.생각.이념을 그대로 토해놓는 많은 시들 속에서 유니크한 가락으로 슬픔마저 흥겹게 노래하는 시의 왕국을 건설해 왔다.

 

'견딜 수 없네' 가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은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이라는 소박한 것들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확실히 '모범적' 시인은 아니다. 그의 이같은 특성, 쉽게 흉내낼 수도, 흉내내서도 안될 성격에 관해서는, 그의 언어가 '솟아오르며 춤춘다' 거나, '시의 심장부로 직행하고 있다' 는 평가가 심사자들 사이에서 나왔다.

 

대상과 표현 사이를 직접적으로 오고 가는 단순성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도저한 시의 주관성은 때로 뒤집기를 거듭하면서, 때로 그 스스로를 풀어버리면서 탄력적인 역동성을 얻어간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슬픔이 비관 대신 흥겨움으로 변하는 것은 시의 가장 바람직스러운 초월이다.

 

심사위원 이어령. 유종호. 홍기삼. 김주연. 김화영

 

 

 

 

견딜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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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 시인의 세계

 

"내 최근의 시가 칭찬받은 것이니 좋고, 시 한편의 값을 이만큼 높인 것도 유쾌한 일입니다. 다만 소설과 차별한 것은 잘못된 것 같고, 다른 시인들에게 미안합니다. 우리 현대시에서 미당의 시는 유례없을 정도로 뛰어나고, 뮤즈가 있다면 바로 미당 아니겠습니까. 정치적 실수에 대해서는 참 어처구니없고, 비판받을 만하지만 그렇다고 미당의 시를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요새 죽이는 말들이 넘치는데 창조와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부정과 함께 긍정적인 정신이 필요합니다. "

 

시 한편의 값으로는 한국, 아니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은 이번 수상작 '견딜 수 없네' 를 읽고 독자들도 단박 알아차릴 수 있듯 정현종 시인의 시는 곧바로 노래가 될 수 있다. 시 자체도 리드미컬하지만 가곡이나 대중가요로 불려도 아주 좋을 것이다. 정씨의 시는 그만큼 품격과 함께 대중적 울림도 지니고 있다.

 

"우리네 삶은 늘 무겁고 고통스럽습니다. 살아가면서 더욱 더 그렇게 느껴집니다. 시가, 예술이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삶을 견디게 하는 힘 아니겠습니까. 시인, 시 자체가 무거워가지고는 삶의 무거움을 견딜 수도, 풀어줄 수도 없습니다. 시인은 무거운 것을 가볍게 실을 수 있는 부하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시에서 나는 늘 가벼움을 이야기해왔습니다. "

 

무거운 삶을 가볍고 환하게 들어올리는 시, 그래서 고통까지도 환하게 투사해 축제가 되게 하는 시와 언어를 정씨 자신은 '-언어' '-언어' 라 부른다.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억압은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상적 삶의 제약으로부터의 자유를 우리는 바란다. 지칭하는 대상에 그대로 꽉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언어도 시에 들어오면 자유를 꿈꾼다.

 

억압과 대상을 떠나 환하게 날아오르며 너울너울 춤을 추는 언어, 그래 삶에 활력과 자재로움을 주는 깃털과 빛의 언어가 정씨의 시다.

 

65'현대문학' 을 통해 문단에 나온 정씨는 시에서 변함없이 '언어의 탄력' 에 관심을 기울여오고 있다.

 

초기 시집 고통의 축제의 제목처럼 '고통' '축제' 라는 이율배반을 동시에 아우르는 시적 탄력성, 마침내 고통을 축제로 뒤바꿀 수 있는 시를 통해 인간의 삶도 그렇게 환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내 젊은 시절의 시들은 애를 많이 써서 쓰여졌으며 다듬으려 고심한 흔적도 여러 군데 있어 지금 보면 면구스러운 면도 없지 않습니다. 뒤로 오면서는 시가 우러나온다고나 할까, 그렇게 쓰여집니다. 좋은 시를 가리는 기준은 많겠지만 술처럼 잘 익어 저절로 나오는 것이겠지요. 이번의 수상작도 저절로 나와 거의 고친 데가 없는 작품입니다. "

 

그러나 어찌 좋은 시가 저절로 나올 수 있겠는가. '부하능력' 이 충전된 상태에서 정신과 감각을 민감하게, 한껏 열어놓아 그 에너지가 정점에 이른 순간 세계가 익어터지듯 시가 터져나오게 해야 읽는 사람도 신명나지 않겠느냐고 정씨는 말한다.

 

수상작 전편에 '견딜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듯 정씨는 요즘 시에는 시간이 많이 나온다.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는 "시간은 역사가 발가벗은 모습이다" 고 했다.

 

정씨는 "시의 언어는 역사에 뿌리를 박되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고 한다.

 

역사는 정치적.경제적 측면 등에서 인간들이 벌이는 일이다. 그러나흐르는 시간 속에서 인간은 그런 일들만 벌이는가. 시간 속으로는 역사를 포함해 모든 인간적.우주적인 일들이 흘러간다. 때문에 삶과 세계를 입체적으로 살피는 것이 시간에 대한 관심이라 정씨는 말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어떤 시를 쓰려 하는가" 라는 참으로 어리석은 질문을 올해 최고의 시인에게 던졌다.

 

"한 편의 시를 쓸 때도 그 시가 어떤 모습을 띨지 모르는데 앞으로의 시 계획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 '자유의 현상' 그 자체인 시, 그 시를 일상의 계획을 짜뜻, 아니면 역사나 과학 등 시 아닌 것들에 붙들어매 시를 쓰고 있는 시인들도 있기에 던져본 우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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