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기억해냈을까 / 김기택
방금 딴 사과가 가득한 상자를 들고
사과들이 데굴데굴 굴러 나오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
그녀는 서류 뭉치를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고층 빌딩 사무실 안에서
저 푸르면서도 발그레한 웃음의 빛깔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그 많은 사과들을
사과 속에 핏줄처럼 뻗어 있는 하늘과 물과 바람을
스스로 넘치고 무거워서 떨어지는 웃음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사과를 나르던 발걸음을
발걸음에서 튀어오르는 공기를
공기에서 터져나오려는 햇빛을
햇빛 과즙, 햇빛 향기를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지금 디딘 고층 빌딩이 땅이라는 것을
뿌리처럼 발바닥이 숨쉬어온 흙이라는 것을
흙을 공기처럼 밀어올린 풀이라는 것을
나 몰래 엿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웃음을
그녀의 내부에서 오랜 세월 홀로 자라다가
노래처럼 저절로 익어 흘러나온 웃음을
책상들 사이에서 안 보는 척 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발걸음을
출렁거리며 하늘거리며 홀로 가는 걸음을
걷지 않아도 저절로 나아가는 걸음을
* 윌리엄 워즈워드의 'The Solitary Reaper'에서 인용
[심사평] 삶 관통하는 폭력성 단정한 언어로 묘사
예심에서 넘어온 이 대표적 시인들의 엄청난 다산성에 놀랐다. 흐드러지게 만발한 꽃밭에 들어선 것처럼 감탄과 기대도 크지만 이 많은 노작 중에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단 한편의 시를 뽑아내는 일의 지난함 앞에 걱정이 앞섰다.
어떤 시인의 개별적 시편은 그 자체로 매우 개성적이고 독특한 경지에 도달했으나(시 '별자리''짧은 낮잠' 같은 경우가 특별히 예시되었다) 같은 시인이 발표한 다른 시편들 전체의 수준과 관련지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사실 한 시인이 도달한 시적 성과는 시 한편의 내적 긴장이나 개별적 시상의 높이에 의해 나타날 수도 있지만 결국 한편 한편의 시는 그 시인이 추구하는 시정신의 한 도정으로 다른 시편들의 빛을 받거나 그의 시 작업 전체와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해석되고 음미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들의 놀라운 '다산성'은 때로 부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전체 후보 중에서 특히 몇몇 시인이 전체 심사위원들의 호의적 평가 대상으로 오르내리는 가운데 투표에 의해 우선 6명의 후보로 대상이 압축됐다. 그중 4명이 여성 시인이었다는 점이 눈에 띄었고, 전체 6명 중 김기택 시인이 압도적인 표를 얻었다.
이후 이어진 토의 과정에서 결국 김기택의 시 '어떻게 기억해냈을까'를 수상작으로 정하는 데 전원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 시인은 우리 시단에서 독특한 묘사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보이면서 일찍부터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현상 속에 잠복해 삶의 한복판을 관통하고 있으면서도 습관에 의하여 무반성하게,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고 있는 폭력적이고 그로테스크한 힘들을 일정한 거리에서 정밀하게 관찰하며 지극히 고요하고 단정한 언어로 묘사함으로써 대상과 언어 사이에 미묘한 긴장상태를 빚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인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그로테스크한 힘이나 어두운 현실의 단순한 드러냄에만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면 그의 세계를 지배하는 듯한 폭력과 어둠은 오히려 그 사이를 비집고 솟아오르는 연약한 생명의 힘을 더욱 신선한 것으로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가령 '얼룩''소나무''초록이 세상을 덮는다', 그리고 수상작 '어떻게 기억해냈을까'는 이런 일련의 연약하지만 끈질긴 생명의 힘을 세상 속으로 곧장 뻗쳐 들이밀고 있는 경우다.
여자의 통통 튀는 듯한 웃음이 싱싱한 사과의 둥근 아니마로 되살아나면서 서류뭉치나 빌딩 같은 우리들 현실의 각이 진 아니무스를 땅속에 깊이 뿌리박은 한 그루 거대한 생명나무로 둔갑하게 하는 이 시의 힘은 과연 미당의 힘찬 시정신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시인의 젊음이 오래오래 속으로 강건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김재홍.김화영.유종호.최승호.홍기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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