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 그 기억의 방/ 최옥향
굴곡진 삶
지도위의 협곡같은 몸을
동그랗게 말아 안은 둥근 동굴의 소리를 듣는다
어디하나 싹 틔울 씨눈조차 보이지 않게
으스러져라 껴안고
골마다 바람도 없이 풍장되어 가던
깜깜한 벽속의 간극을 재어 보던 소리
늙은 동굴 같은 안방에선
언제나 할아버지의 깊은 시름을 알리는
염주 굴리던 소리가 났었지
손수 앉힌 마당의 징검돌을 건너면
그 끝에서 빛나던 항아리들처럼
한때는 고소한 젖빛 냄새로 흐르던 방들
다시는 정정한 한 그루 나무로 서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앉은뱅이로 홀로 견뎌야 했던
목수였던 당신의 호두빛 깊은 주름
달그락, 달그락
둥근 방문 고리를 흔드는 바람소리와
집 모퉁이에 서서 늙어 버린 지팡이처럼
언제나 마른 삭정이 냄새가 나던 그 기억의 방
툭, 딱딱하게 굳은 손아귀에서 마지막 떨어져 구르다
목침 위에 나란히 놓였던
유난히 반질거리던 그 두 알의 호두
결코 소멸되지 않을 단단한 기억 하나가
지금 흔들리며 걷는 내 호주머니 속에서
자꾸만 환한 밖을 기웃거리고 있다
[당선소감] “슬픔과 할아버지가 생각나”
오래된 아픔이나 슬픔을 만지작거리면 그것이 곧 구원처럼 시로 왔다
결코 먼지처럼 툭, 툭 털어 낼 수도 없는
이 딱딱하고 푸석거리던 상처들이 말랑말랑해 질 때까지
어떻게든 시에 매달려 볼 심산이었다
삼각형도 아닌
사각형도 아닌
그렇다고 원통형도 아닌
그 어떤 형태도 갖추지 못한 채
수없이 접었던 자욱만이 어지럽게 널린 내 어줍잖은 필력을 생각하면
이 얼마나 가당찮은 일인가
당선 통보를 받고 한동안 두려움으로 무언가 단단히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안절부절 못했다
창 밖엔 잔설 위에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유년의 집 마당을 가로지르던 징검돌
제삿날이면 나박김치에 분홍물을 우려내던 맨드라미가 핀 장독대
그곳을 생각하면 늘 아릿한 슬픔과 함께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고향에 홀로 계신 팔순의 내 어머니에게 이 소식을 전할 수 있어 무엇보다 기쁘다
시민대학의 이지엽 교수님 그리고 항상 옆에서 술 친구가 되어준 최재연·박연순 문우님, 구본홍 시인님과 뜸 시회원에 고마움을 전하며
졸작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심사평] “내면심리 형상화 솜씨 뛰어나”
단 한편의 당선작을 선정하는 기준은 무엇보다도 작품이 구조적으로 뛰어난 예술성을 지녀야 한다고 보고, 참신성과 독창성, 그리고 시어 선택의 적절성 등을 중시해서 심사하기로 하였다.
예심에서 넘어온 작품을 놓고 위와 같은 점을 고려하여 심사위원 간의 의견을 집약한 결과, 〈호두, 그 기억의 방〉 〈오래 된 꽃상여〉 〈민들레〉 〈심전도〉 〈아버지의 봄〉 등 5편이 최종심에 올랐다. 그 중에서 〈아버지의 봄〉과 〈심전도〉는 농촌의 어려움을 표현한 작품으로, 현실 문제를 호소력 있게 다룬 점이 돋보였으나, 주제가 단조롭고 지나치게 서술적인 점이 눈에 거슬렸다. 〈민들레〉와 〈오래 된 꽃상여〉는 시어를 다루는 솜씨가 비범하고 서정성이 짙었으나, 시의 구조가 평면적이어서 현대시가 갖추어야 할 시대적 상황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되어, 최종적으로 〈호두, 그 기억의 방〉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호두, 그 기억의 방〉은 호두 자체의 내밀한 구조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입체적으로 조화시킴으로써, 과거에 관한 기억을 담고 있는 복잡한 내면 심리의 세계를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솜씨가 뛰어나,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신규호, 문효치, 손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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