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관한 단상 / 김효순
1. 거미
날개는 없지만
공중에 떠 있다
보금자리는 아니지만
늘 집을 짓는다
입으로 눈으로
집을 짓는다
희고 투명한 기억들만을
허공 중에 매달아
기다림의 긴 터널을 뚫는다
길 없는 길을 잇고 또 이어 만든
하얗게 반짝이는 미로 속의 집
집은 두 팔을 벌리고
집은 아가리를 벌리고
집은 두 눈을 부릅뜨고
숨죽여 찾아 올 손님을 기다린다
공중에 뜬 채
힘없고 나약한 짐승만을
기다리는 집
집은 늘 위태롭다
집은 덧없는 덫,
덫이다 아니
무덤이다
2. 나방
날개는 있지만
늘 주저앉고야 만다
다 그놈의 불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녀석에게 뛰어
들었다가
한쪽 날개의 끝을 데었다
그날 이후
악몽만이 남았다
더 이상
제대로된 비행 따윈 할 수 없다.
기울어진 날개
지치고 아파서
아무런 말조차 할 수 없다.
한때
사랑이 집이라고 믿었다
이제 누군가를 기다리지 못한다
나만의 동굴을 찾아
지친 날개를 퍼덕일 뿐
멀리 어슴프레 하얀 집이 보인다
이번엔 집이 확실하다
그 집에게 안긴다
그 집에게 속삭인다
너만이 내 영원한 안식이라고
너만이 내 맨 처음 자궁이라고
3. 달팽이
날개도 없고 다리도 없지만
있는 힘껏 바닥을 기어다닌다
내 슬픔은
너무 오래...
딱딱하게 굳어져 옹이가 되었다
이젠 그 슬픔들이
눈과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집이 되었다
그는
파도소리를 듣고
어느날 찾아왔다
그는
소용돌이가 두렵다며
어느날 떠났다
지문처럼
나이테처럼
언제나 걸어온 길들을
둥글게 말아
짊어지고 다닌다
내 집은
작은 섬
이젠 그 오랜
路毒과 그리움이
더듬이보다 단단하게
앞길을
짚.어.준.다.
[당선소감]
안개가 무성하다. 저 희디흰 눈동자들, 어둠 속에서 발목 잡는 수많은 눈동자들을 뿌리치며 길을 걷는다.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 느낌. 뺨에 와 닿는 미끌미끌한 그 눈동자들이 숨이 막히다. 그렇게 그 시선들을 외면하며 걸어왔다. 마음은 늘 안개 속, 물 속을 허우적거렸다. 3년 전 중환자실에서 혼수상태의 아버지를 밤새 지키던 그 해 성탄절이 생각난다. 유난히 하얗게 내리던 눈가루들이 내 눈앞에선 안개가 되어 온통 시야를 가리던 그 때. 아무도 내게 위로가 될 수 없음에 혼자 견디며 무슨 주문처럼 중얼거리던 시구 하나 떠올린다.
충분히/흔들리며/고통에게로/가자//뿌리/없이/흔들리는/부평초잎이라도//물/고이면/꽃은/피거니//....캄캄한/밤이라도/하늘/아래선//마주잡을/손/하나/오고/있거니//
그 때 비로소 알았다. 한 줄 시가 실낱같은 불빛이 되어 앞길을 비추어줄 수도 있음을, 내게 시가 다가와 손잡아주는 밤이었다. 그런 시를 쓰고 싶다. 따뜻한 시... 상한 영혼들에게 기도보다 훈훈한 온기를 주는 시... 사람을 견디게 하는, 사람보다 단단한 시를 쓰고 싶다. 이제 첫발을 내딛는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고 아득하지만 내가 선택한 이 길에 이정표를 제시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아직 병원에 누워 계신 아버지, 그리고 시힘을 돋워주신 이지엽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심사평] 정서적 흡인력 가능성 기대
예심을 거쳐 올라온 40명 중에서 김효순·이종숙·하재청·성향숙 등의 작품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다.
이종숙의 `저녁, 거리에서'는 안정된 호흡과 섬세한 필치로 시간이 흘러가는 풍경을 선연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시들의 밀도가 현저하게 떨어져서 충분한 신뢰감을 가지기 어려웠다. `공단세탁소'를 비롯한 하재청의 시는 결이 고르고 생활의 실감을 지니고 있다. 개성적인 묘사를 이끌어내는 재기발랄함도 돋보이지만,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기 위해서 재치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성향숙의 `나무의 근성' 등은 소재를 다루는 솜씨가 날렵하고 착상도 재미있지만 일정한 틀에 갇혀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 틀을 과감하게 깨뜨릴 때 좀더 생동감 있는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당선작으로 뽑은 김효순의 `집에 관한 단상'은 일반적인 신춘문예형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이다. 거미, 나방, 달팽이의 입을 빌어 집에 관한 생각을 전개해가는 이 시는 대상에 대한 겹눈을 지님으로써 단선적인 사유를 넘어서고 있다. 지나치게 알레고리에 의존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다른 시들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발성법이나 정서적 흡인력이 그의 가능성에 대해 기대를 걸게 했다.
한 사람의 시인을 세상에 낸다는 것은 현재 상태의 우열뿐 아니라 그 가능성까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를 당선자로 결정했다.
심사위원 나희덕, 강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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