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망坐忘 / 원구식
1
어느 돌은 여기
어느 돌은 저기
온 우주의 신비가 여기저기
흐르는 천년의 세월이 여기저기
그저 무심히 이 돌을 보다
그저 무심히 저 돌을 보다
아, 오늘도
하루 해가 다 갔구나.
어느 돌은 여기
어느 돌은 저기.
2
강가에 앉아 시간의 미이라인 돌을 본다. 이것은 정지된 시간의 풍경. 돌이 흐르는 물속에 멈춰져 있다. 마지막엔 물처럼 시간을 잊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돌은 더 딱딱해져야 할 것이다. 물은 옆에서 끊임없이 시간을 풀어놓는다. 생로병사의 바람이 순식간에 그 물기를 말려버렸지만, 아직 멀었다. 돌 속의 시간은 여전히 촉촉하다. 네가 감히 하루아침에 일생의 환락을 저 돌 속에 넣을 수 있겠느냐? 하루아침에 앉은 채로 머리털이 하얘지고, 구부러진 허리가 안락을 향해 하염없이 무너져 내려도, 이승의 육신이 물처럼 온전히 흘러가 버릴 수 있겠느냐? 윤회의 맷돌이 멈추기 전에, 마지막으로 시간을 잊어야 할 것이다.
3
흐르는 물소리
부는 바람소리
이 장엄한 아침 햇빛으로 보아
그림자도 붉은 저녁 놀빛으로 보아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돌이 시간을 먹고
딱딱해진다.
흐르는 물소리
부는 바람소리
[수상소감] 대책 없이 앉아 있는 자세에 대하여
때로, 마약의 도움이 없이 환각에 이르는 순간이 있다. 멍청히 서 있을 수 없으니까 앉는 것이다. 그럴 때 시간이 정지되고 풍경이 독약처럼 풀려 참선에 드는 것이다. 좌망이다. 사물과의 대화가 시작된다. 하염없는 시간이 내게로 전이된다. 세상의 모든 이유를 너무나 갑자기 처절하게 깨닫고 만다. 그러니까, 환각이 돈오라면 좌망은 점수다. 풍경은 강과 숲과 계곡의 시간을 물처럼 빨아먹는다. 무심히 돌아앉은 돌들도 다 시간 부자이다. 바람이 대책 없이 풀잎을 흔들어댄다. 어쩌란 말이냐? 나는 앉아 있는데, 서 있을 수 없어서 앉아 있는데, 끊임없이 풍경의 뒤통수가 열린다. 우주의 배꼽이 보인다. 나는 강가에 앉아 데려가기의 명수인 물과 바람에 몸을 맡긴다. 물이 내게 말한다. 바람이 네게 준 건 호흡이 아니라 율동이다. 아, 그렇구나. 그러니 앉아서 흔들리지 않는 춤을 춰라. 너는 이미 사물들에게 이해되었다. 아, 그렇구나.
그런 날이면 마틴 백패커를 메고 완행열차를 타고 싶다. 하염없이 덜거덕거리다가 이름 없는 역에 내려 닭똥을 사고 싶다. 그걸 가방에 넣고 산으로 들어가 세상에 거름을 주고 싶다. 나의 기타는 바람의 현을 탄주할 것이다. 그러면 열릴 것이다. 천국에 이르는 길이. 갑자기 앙리 미쇼의 한 마디가 떠오른다. “마약은 필요 없다. 다른 방법으로 살기를 선택한 자에겐 모든 것이 마약이다.” 나는 지금 대책 없이 앉아 있다. 풍경의 내부가 열린다.
[심사경위]
제1회 『시와표현』 작품상 선정을 위해 편집위원들이 2011년 봄호(창간호)부터 2011년 겨울호에 발표된 모든 신작시를 대상으로 예심을 하였다. 편집위원들이 각자 열편씩 선정한 작품을 대상으로 다득표를 집계한 결과 다음과 같이 9편의 작품이 본심에 선정되었다
김길나 「휴지, 그 붉은 흔적」(가을호)
리 산 「수용미학」(봄호)
박은정 「죽음을 완성하는 손」(가을호)
신달자 「광야에게」(여름호)
원구식 「좌망坐忘」(봄호)
이기철 「활자생애」(겨울호)
장만호 「유령」(봄호)
정병근 「석양의 콘크리트」(여름호)
조말선 「손에서 발까지」(겨울호)
작품상 심사위원회는 9편의 후보작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검토했다. 문학상이 아닌 작품상이므로 문학적 공헌이나 경력을 모두 지우고 한편의 작품이 달성한 시적 완성도와 시세계의 성취가 기준이었다. 모두 일정한 시적 성취를 보여준 작품들이어서 결정이 쉽지 않았다. 심사위원들은 긴 논의 끝에 원구식의 「좌망坐忘」을 제1회 『시와표현』 작품상으로 결정하였다.
원구식의 「좌망坐忘」은 간결한 시적구도와 형식에 도가道家적 사유의 깊이를 집약한 점이 좋게 생각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이 도가적 사유를 형상화하였으나 ‘무위無爲’라는 주제에 집착한 나머지 초월적 사유를 철학적 개념으로 드러내는 일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많았다. ‘시란 성정性情을 드러내는 일이다’라는 동양 시학의 정신에 비추면 ‘성性’을 중요시한 셈이다. 시란 사유의 깊이와 더불어 희로애락을 드러내는 서정抒情의 깊이가 같이 확보되어야 한다. 시작에서는 양자의 균형이 쉽지 않다. 대개의 작품들은 어느 한쪽의 과부하 때문에 시적 완성도를 망치고 만다. 그러나 원구식의 「좌망坐忘」은 포착한 제재를 집요하게 형상화하고자 하는 ‘정情’의 깊이도 확보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편은 ‘모두가 밝은 세상에 있는데 나만이 홀로 우매하고나’하는 노자의 성찰을 「좌망坐忘」으로 드러낸 수작이다.
원구식은 과작을 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과작인 만큼 작품에 들이는 힘과 에너지의 집중도가 좋다. 제1회 『시와표현』 작품상이 원구식 시인의 시 창작 인생에 화려한 불꽃을 위한 기름이 되길 기원한다.
심사위원 (예심) 송기한 이성혁 서안나 김영찬 / (본심) 오세영 김백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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