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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고 향기로운 실탄 / 정재영

 

 

드티봉 숲길을 타다가 느닷없이 총을 겨누고 나오는

딱총나무에게 딱 걸려 발을 뗄 수가 없다

우듬지마다 한 클립씩 장전된 다크레트의 탄환들

그와글와글 불땀을 일으킨 잉걸 빛 열매를 따 네게 건넨다

실은 햇솜처럼 피어오르는 네 영혼을 향하여

붉게 무르익은 과육을 팡팡 쏘고 싶은 것이다

선홍빛에 조금 어둠이 밴 딱총나무 열매에 붙어

이놈들 보게,알락수염노린재 두 마리가 꽁지를 맞대고

저희들도 한창 실탄을 장전 중이다

딱총을 쏘듯 불같은 알을 낳고 싶은 것이다

그게 네 뺨에 딱총나무 붉은 과육 빛을 번지게 해서

갑자기 확 산색이 짙어지고

내 가슴에서 때 아닌 다듬이질 소리가 들리고...

막장 같은 초록에 갇히면 누구든 한 번쯤 쏘고 싶을 것이다

새처럼 여린 가슴에 붉고 향긋한 과육의 실탄을

딱총나무만이 총알을 장전하는 게 아니라고

딱다구리가 나무둥치에 화약을 넣고

여문 외로움을 딱딱 쪼아대는 해 설핏 기운 오후

멀리서 뻐꾸기 짝을 부르는 소리 딱총나무 열매 빛 목청

딱총나무의 초록이 슬어 놓은 잉걸 빛 알들이

겨누는 위험한 숲 내 손을 잡는다.

 

 

 

 

2007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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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치열한 삶 속 시 '당금질'은 계속 돼"

 

어느 날 갑자기시가 내게 온지 꼭 20년이 지났다. 시는 고향역의 대합실 벤치에 새우처럼 웅크리고 잠에 빠진 노숙자의 등을 타고 내게 왔다. 시에서는 모름지기 사람 냄새가 나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기 이전에 시는 이미 그 단서를 가지고 내게 온 것이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습작기의 내 의식을 지배해 온 것은 새우처럼 웅크린 노숙자의 그 등이었다. 그 시는 웅크렸던 등을 대고 잠 한 번 깊이 청할 수 있는 따뜻한 구들장이 되지 못한다. 다만, 나에게 있어 시는 남루한 생의 뜯어진 옷자락 사이로 언뜻 언뜻 내비치는 흰 살빛 같은 각성이 되었다.

 

20년 세월, 내 지각은 너무 느려터지고 아둔했던 것일까? 내게 주어진 단서는 자명한 것이었지만 내 앞에는 늘 왜곡과 착시의 갈림길이 가지를 뻗고 있었다. 내 시에서 한 조각 살빛의 각성이 읽히고 삶의 결이 잡힐 때까지 나는 얼마나 더 내 무딤을 벼려야 하는가?

 

내 습작기는 지금부터가 새로운 시작이다. 생의 치열한 연소 속에서 내 시의 담금질과 매질은 계속될 것이다. 시와 삶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호작용만이 내 시의 방법론임을 잘 알기에 내 범상한 일상을 탓하기에 앞서 나는 앞으로 낯설고 거친 풍경을 찾아 모험도 불사하는 생의 에너지를 키우는 쪽으로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엎드려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빗나간 내 시의 안목을 바뤄 주시느라 노심초사 애쓰시고 심려가 많으신 박제천 선생님께 큰절 올린다.

 

직장 동료로서 늘 격려를 마지않았던 이영식, 황상순, 시인님 그리고 문학아카데미 시창작반 문우들과도 당선의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준 아내와 두 아이들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꽃 등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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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역동적인 생명력 거대 물결 이뤄

 

장시간 600명에 가까운 이들의 시를 읽으면서도 지루한 줄 몰랐다. 문학의 위기나, 시의 죽음이니들 해도, 상당수의 투고작들이 저마다의 얼굴을 반듯하게 갖추고 있었고, 저마다의 매력적인 향기를 뿜고 있엇다. 전반적인 수준이 만족할 만 했다.

 

고른 수준을 보이는 이,앞으로의 창작 활동에 대한 신뢰감을 주는 이 등을 골라서 열다섯 명을 뽑았다. 모두 손색없는 작품들이었다.

 

그래도 어쩌랴,서정적 진정성이,언어적 숙련도와 개성의 깊이 등을 기준으로 다시 다섯명을 뽑았다. 모두 수작들이었다. 그러나 한 편의 당선작을 위해 다섯명의 흠을 잡아보기로 했다.

 

김경미씨의 투고작들은 참신한 언어 감각이 돋보였다. 동시에 이 장점은 씨의 한계로 지적되기도 했다. 젊은 언어 감각이 언어적 경박성으로까지 치달아 버린 것이다.

 

김명희씨는 사물과 일체되는 물활론적 감수성으로 단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산문적인 서술을 지양하고 보다 응축된 표현을 해야 하겠다는 주문이 따랐다.

 

김영건씨는 지나친 노련함과 산문성으로 트집 잡혔다. 하지만 위트가 시적 재능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그의 유쾌한 상상력은 돋보였다

 

정재영씨는 이들 중에서 가장 많은 시를 투고하였을 뿐 아니라 한결같이 높은 수준의 역작들을 보여주었다. 그중에서 당선작으로 정한 시 '붉고 향기로운 실탄'은 한마디로 역동적인 생명을 보여주는 시이다. 산문적인 서술로는 이룰 수 없는,말소리의 조직과 오감을 통해 서정을 주입하는 시이다. 불필요한 이인칭 청자,수사적 어법의 과용 등이 흠이 된다는 지적도 있긴 하였으나 이를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는 반대가 없었다.

 

한 편을 뽑는 일은 괴로웠다. 하지만 심사자 셋은 한동안 향기로운 시의 바디를 유영하고 나오는 달콤한 나른함을 나눌 수 있었다.

 

심사위원 김종해, 안도현, 신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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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저울눈 / 정재영


푸줏간 주인이 고기 한 칼 썩썩 썰어
척, 저울에 올리자 바늘이 바르르 떤다
그의 손대중이 저울눈 하나를 겨냥해
잠시 그 경계를 넘나들다가 딱 그 눈금에서 멎는다
얼마나 칼질을 해댔으면……
칼 쥔 손에 저울눈 하나가 직감처럼 꽂힐 때까지
마음의 저울추가 수도 없이 진자운동을 거듭했으리라
모자라서 보태고, 넘쳐서 덜어내는
모자람과 넘침이 오락가락 셀 수도 없었으리라
내 몸에 던져지는 생의 부하를 짚어내면서
내 안에서도 저 저울처럼 바늘 하나가 수도 없이 흔들렸다
모자람과 넘침 사이에서 흔들림이 계속되고 있다
살코기 한 덩이에 요동치는 저울처럼 내 몸도
등짐이라도 끙, 지고 일어설 때면 바르르 떨던 것이다
나는 내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가늠하며
저 푸줏간의 저울처럼 참 많이도 흔들리며 살아온다
저울은 이제 평정을 되찾았다
생의 무게를 내려놓고서야
꺾인 허리 반듯이 펴지던 어머니처럼.

 

 

 

 

꽃 등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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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갈증과 결핍감이 내 습작의 동력

 

시는 나에게 갈증 같은 것이었다. 마셔도 마셔도 가시지 않는 목마름 같은 것이었다. 이 갈증과 결핍감이 내 습작의 동력이었다. 건천의 돌밭 같은 언어의 지층에 깊숙이 가라앉은 시의 물줄기를 찾아 바닥을 헤매온 지 어언 20년. 어쩌면 내 삶 자체가 늘 조갈에 시달리며 콸콸치솟는 수맥을 찾아가는 도정일 테지만, 오늘은 건천의 돌바닥에 단비가 뿌려지듯 해갈의 소식. 기쁘다. 나는 금세 축축이 젖었다.


맨손으로 건천의 돌밭을 파헤치듯 시는 머리가 아니라 손끝에서 우러나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이 언뜻 머리를 스친다. 언어 이전에 현실에 밀착하고, 삶에 밀착할 때 시는 한 줄기 청량한 수맥으로 그 정체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스승은 또 내 목마름을, 나를 넘어 타자를 향해 투사하는 연민을 시의 방법론으로 가르치셨다. 그것은 세상 모든 물상들로부터 영성을 이끌어내는 물활론에 닿아있었다. 내 시는 불볕에 달궈진 건천의 돌밭에서 단비를 갈망하는 눈빛을 읽어내는 것이었다. 대상을 향한 자아의 투사로 요약되는 이 시 창작의 기조를 계속 유지하면서 나는 이제부터 새로운 습작기로 들어선다는 마음가짐으로 시를 살고 삶을 살 것이다.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엎드려 감사의 말씀 올린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빗나간 내 시의 안목을 바뤄 주시느라 노심초사 애쓰시고 심려가 많으신 박제천 선생님께 큰절 올린다. 시에 대한 열정을 키워오면서 서로 격려와 조언을 마지않았던 문학아카데미 시창작반 문우들과 당선의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준 아내와 두 아이들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심사평] 일상에 독특한 시선탄탄한 구성력 돋보여

 

모두 열네 명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왔다. 평균 다섯 편 안팎을 응모했으니 예순 편쯤 되는 작품을 읽은 셈이다.


이 가운데 정재영(‘몸의 저울눈’ 외), 이병철(‘수평선’ 외), 변호이(‘길’ 외) 세 명을 최종심에 올리는 데는 어렵지 않게 의견을 모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도 본심에 올랐던 만큼 일정한 수준을 갖추었고 소양도 충분했지만, 크게 다음과 같은 단점들이 눈에 띄었다.


첫째,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알고 있으나 무엇을 써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 (쓸 거리가 보이지 않는 시, 즉 왜 썼는지를 모르겠는 시) 둘째, 위와는 반대로 소재나 주제는 괜찮은데 시적 효과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셋째, 기성시인의 작품이라면 문예지 등에 발표해도 무난하겠지만, 신예의 등단 작품으로는 아쉽다. (패기나 참신함이 없다. 혹은 밋밋한 소품이다.)


변호이의 시 ‘길’은 여러 미덕을 갖췄다. 독창적이고 내성적이고 시를 밀고 나가는 사고의 힘도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덴마크 장기(臟器) 어디쯤/숨어계셨습니다 감쪽같이/스물 세 해를 속았습니다” 같은 구절이 보풀처럼 걸렸다.
정재영과 이병철을 놓고 으뜸과 버금을 가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 다 제가끔 탄탄한 세계를 보여줬다.
이병철의 ‘수평선’은 감각적 표현이 돋보이는 섬세하고 깔끔한 시다. 요즘 우리 시단에 이런 시의 수혈이 필요하다는 데 심사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이 작품을 떨구는 데는 적잖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근간 다른 매체를 통해서라도 그의 시들을 만나게 되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정재영이 데뷔하는 무대에 에스코터가 된 것을 우리는 기쁘게 생각한다. 당선작 ‘몸의 저울눈’은 작은 일상적 사건에서 삶의 무게와 균형과 흔들림을 짚어내는 솜씨가 인상적이었다.


응모한 시 전부 힘 있는 게 아주 긍정적이다. 거듭 축하하며 문운과 건필을 빈다.

 

심사위원 도종환,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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