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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분황사 할머니 / 김광희

 


할머니, 재齋 지낸 분황사에

어여쁜 할미꽃으로 현신했다

큼지막한 돌부처 옆에 엎드려

쉿, 할머니 집에 가요

저리 일찍 그 쪽으로 걸어 들어간 불두화며 상사화

경 읽느라 바쁘던 귀뚜라미 숨죽인다

발아래 수련중인 질경이가 이슬땀 흘린다

한 뼘 너머 팠는데 경전 같이 야문

땅덩어리 할머닐 잡고 놓지 않는다

육십 년 넘게 할머니 붙잡았던 바탕골 같다

놔 줘요 제발, 잘 모실게요

살기 힘든 곳일 수록 뿌리는 더 깊이 내린다고,

깊이 판다 수렁 같은 내 속을 판다

할머니, 발 좀 풀어요

아무도 안 본다고, 안 본다고 허둥대는 날 본다

돌부처가 기댄 내 엉덩일 서늘하게 한다

풍경이 군지렁 군지렁 주억거린다

부드럽게 간지럽히는 솜털피부! 할머닐

검은 비닐봉지로 눈 가려 나오는데

뒤 당겨 돌아본다 시침 뚝 떼는 모전탑 깊게

굽어보는 어둠, 별들 총총 따라 온다 서둘러 닫은

현관문 식구들 단내 환하다

 

 

 

 

발뒤꿈치도 들어 올리면 날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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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경주를 걸으며 / 정나연

 

 

먼지 쌓인 역사책의 한 페이지를 넘기자

영화의 필름이 돌아가듯

신라 역사가 한 가득 쏟아져 나온다

 

산고의 고통 끝에 태어났던 한 나라

화려했던 신라

그 천년의 걸음은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이 되어

길을 만들고

역사를 만들고

지도 속 경주 안에 박혀 있다

 

손바닥 안에 경주의 지도를 펼쳐놓고

손금처럼 뻗은 경주의 길을 걸으며

보물찾기를 하듯

신라라는 이름의 보물을 찾는다.

 

쏟아지는 여름의 태양 아래

뜨거운 가슴으로 경주가 돌아눕는 순간

나는 신라를 만난다

햇볕아래 반짝이는 나뭇잎도 지붕도 하늘도

역사책을 읽듯이 조용하고 차분하게

신라를 품고 있는 경주와

그 안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쏟아지는 노을 속의 경주

쓰러지지만 곧 다시 일어설 지 둥근 생명처럼

신라의 역사가 담겨 있는 둥글고 팽팽한 씨앗이

경주 안에 박혀 끊임없이 자라고 있다

 

 

 

 

 

[심사평]

 

전체 응모작 중 의욕적인 작품들이 많았지만, 의욕이 앞서고 문학적 형상화에서 미흡한 작품들이 많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신라에 대해서 듣고 공부한 내용을 시에 넣어 쓰거나, 경주의 신라 문화에 대해서 찬양하는 자세로 일관하거나, 사변적인 내용은 좀 곤란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신라는 유물로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경주와 연관될 때 그 의미가 새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당선작인 "할머니를 모시고 오다"는 죽은 신라가 아니라 오늘과 대비시킨 살아있는 신라의 이미지로 시적 완성도가 뛰어납니다. 현대성과 고전의 조화가 무르익었다고나 할까요. 신라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로 내려오는 문맥성을 가지고 있음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제목은 "분황사의 할머니"로 하는 게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헌화가"도 새로운 문맥에서 구성한 시적 자질이 보입니다. 가작인 "경주를 걸으며"는 현재의 지도 속에서 신라를 끌어내는 솜씨가 인정되는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는 정서의 산물이며, 외적 지식은 시 속에서 완전히 녹아 있을 때 시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응모자들은 유의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할머니를 모시고 오다"는 시인의 삶에 근거한 깊은 체험을 우려내어 박제화된 신라가 아니라 현재와 연결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높이 사 당선작으로 선정하였고, "경주를 걸으며" 역시 지도 속에서 신라를 발견하는 발상의 참신함으로 시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었기에 가작으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밖에 "굴불사지" 작품도 깨끗하였고,"신라고분의 재미" 등도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심사위원 이임수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손진은 경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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