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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논에 백일홍을 심다 / 장옥관

 

 

무논에다 나무를 심은 건 올 봄의 일이다

벼가 자라야 할 논에 나무를 심다니, 아버지가 아시면 크게 혼이 날 일이다.

수백 년 도작한 논에 나무를 심으면서도 아버지와

한마디 의논 없었던 건 분명 잘못한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도 장남인 내게 일언반구도 없이 여길 훌쩍 떠나지 않으셨던가.

풀어헤친 제 가슴을 해집던 아버지

손가락의 감촉을 새긴 논은

이제 사라지겠지만 남풍에 족보처럼 좍 펼쳐지던

물비린내 나는 초록의 페이지 덮고

올 봄엔 두어 마지기 논에 백일홍을 심었다.

백일홀 꽃이 피면

한여름 내내 붉은 그늘이 내 얼굴을 덮으리.

백날의 불빛 꺼지고 어둠 찾아오면 사방 무논으로 둘러싸인 들판 한가운데

나는 북 카페를 낼 것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북 카페를 열 것이다.

천 개의 바람이 졸음 참으며 흰 페이지를 넘기고 적막이 어깨로 문 밀고 들어와 좌정하면

고요는 이마 빛내며 노을빛으로 저물어 갈 것이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활자 앞에 쌀가마니처럼 무겁게 앉아 아버지가 비워 두고 간 여백을 채울 것이다.

무논에 나무를 심은 일이 옳은지 아닌지 그것부터

곰곰 따져 기록할 것이다.

 

 

 

제14회 노작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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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대 문예창작학과 장옥관(58) 교수가 '14회 노작문학상'수상자(상금 2천만원)로 선정됐다.

 

노작문학상은 일제강점기에 동인지 '백조'를 창간, 낭만주의 시를 주도했던 시인이자 극단 '토월회'를 이끌며 신극운동에 참여했던 예술인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 1900~1947)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1년 제정된 문학상으로 그 해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 활동을 펼친 시인에게 수여되고 있다.

 

이번에 선정된 장 교수의 시는 '무논에 백일홍을 심다', '돼지와 봄밤', '옥수수 밭에서', '멍자국', '검은 숲, 부풀어 오르다-영화 <안티 크라이스트>' 5편이다.

 

노작문학상 운영위원회는 "장옥관 시인의 시 세계는 남달리 능숙한 미문이 섬세하고 화사하며 특히 수상작 '무논에 백일홍을 심다'에서 보여주는 발상의 전환과 사물의 이면을 더듬는 감각의 촉수가 그의 시가 가진 감동의 깊이를 더해준다"고 평가했다.

 

장옥관 교수는 "한 잡지의 초대석에서 제가 얼마나 시와 불화하며 살고 있는지 밝히며 이젠 정말 마지막 불꽃을 태워봐야 하겠노라 다짐한 게 불과 보름 전의 일이다. 그런 사람에게 화관(花冠)을 얹어주시니 참으로 민망한 기분이다. 비록 타다만 부지깽이 같은 거친 언어이지만 그것으로 삶이라는 흙 마당에 깊이 획을 긋는 시, 놀라운 감탄보다는 뜨거운 신음을 불러오는 시, 읽을수록 의미가 멀어지고 마음 속 아득함만 가득 차는 시를 꿈꾸고자 한다""더 좋은 시, 더 훌륭한 시인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굳이 제 등을 밀어주신 노작문학상 운영위원회와 심사위원님들의 손길을 화인(火印)으로 깊이 새기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장 교수는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으며 계명대 국문학과(학사),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석사, 박사)을 전공했다. 1987'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고 2007년부터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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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상자 : 장옥관(1955, 張沃錧)

 

 

2. 수상작 : 「가오리 날아오르다」 외 5편


「가오리 날아오르다」



경주 남산 달밤에 가오리들이 날아다닌다
아닌 밤중에 웬 가오리라니

뒤틀리고 꼬여 자라는 것이 남산 소나무들이어서
그 나무들 무릎뼈 펴서 등싯, 만월이다

그럴 즈음은 잡티하나 없는 고요의 대낮이 되어서는 꽃, 새, 바위의 내부가 훤히 다 들여다보이고 당신은 고요히 자신의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때 귀 먹먹하고 숨 갑갑하다면 남산 일대가
바다로 바뀐 탓일 게다

항아리에 차오르는 달빛이 봉우리까지 담겨들면
산꼭대기에 납작 엎드려 있던 삼층석탑 옥개석이 주욱, 지느러미 펼치면서 저런, 저런 소리치며 등짝 검은 가오리 솟구친다
무겁게 어둠 눌려 덮은 오랜 자국이 저 희디흰 배때기여서
그 빛은 참 아뜩한 기쁨이 아닐 수 없겠다

달밤에 천 마리 가오리들이 날아다닌다
골짜기마다 코 떨어지고 목 사라진 돌부처
앉음새 고쳐 앉는 몸에
리기다소나무 같은 굵은 팔뚝이 툭, 툭 불거진다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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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사위원 : 황동규, 정진규, 김명인, 황현산

 

 

4. 심사평

장옥관은 삼년 전쯤 허물을 벗은 시인이다. 그전에도 그의 시는 사물과 사실들의 자상한 묘사와 배치로 매력이 있었지만, 이것이 그의 시 세계다 라고 딱이 말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다가 그는 지난번 시집 『하늘 우물 』의 앞 절반을 채운 시들 예를 들어 「다시 살구꽃 필 때」같은 작품에서 환상과 현실이 역동적으로 만나는 비전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번에 예심을 거쳐 올라온 그의 시들은 그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예를 들어 「가오리 날아오르다」의 첫 2연을 읽어보자.

뒤틀리고 꼬여 자라는 것이 남산 소나무들이어서

그 나무들 무릎뼈 펴서 둥싯, 만월이다


그럴 즈음은 잡티하나 없는 고요의 대낮이 되어서는 꽃, 새, 바위의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고 당신은 고요히 자신의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대 귀 먹먹하고 숨 갑갑하다면 남산 일대가

바다로 바뀐 탓일 게다


현실과 환상의 이렇게 역동적으로 만나는 시를 따로 만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뒤에 나오지만 옥개석이 가오리라니! 달밤에 날아다닌다면 그 모양새가 틀림없이 가오리일 것이다.

「오줌꽃」에서 자신의 오줌버캐가 꽃으로 변모되어 무덤까지 따라오는 비전도 같은 맥락이고, 「지렁이」에서 지렁이를 춤추게하는 상상력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상상력의 역동성을 누그러트리지 말고 다음에 새로 허물을 벗을 때까지 든든히 등에 메고 가길 바란다. 축하한다. (황동규-시인)

 

 

파란 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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