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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 / 이은규

 

 

어느 날부터 그들은

바람을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람은 형상을 거부하므로 우상이 아니다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

그 이름에는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새의 고단한 깃털 하나가 흩날리고 있을 것 같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

작은 침대를 초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건기의 초원에 바람만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은 건기를 맞아 바람 맞는 일이

혹은 바람을 동경하는 일이, 일이 될 참이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

이미 유목의 피는 멈출 수 없다는 끝을 가진다

 

오늘밤도 베개를 베지 않고 잠이 든 그

유목민들은 멀리서의 말발굽 소리를 듣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땅에 귀를 댄 채로 잠이 든다지

생각난 듯 바람의 목소리만 길게 울린다지

말발굽 소리는 길 위에 잠시 머무는 집마저

허물고 말겠다는 불편한 소식을 싣고 온다지

그러나 침대위의 영혼에게 종종 닿는 소식이란

불편이 끝내 불구의 기억이 되었다는

몹쓸 예감의 확인일 때가 많았다

 

,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

바람의 낮은 목소리만이 읊을 수 있다

동경하는 것을 닮아갈 때

피는 그 쪽으로 흐르고 그 쪽으로 떠돈다

地名을 잊는다, 한 점 바람

 

 

 

 

2008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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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최초의 시는 시의 몸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시가 아닌 것에서 시의 속살을 만나다니, 새삼 ()()이 아닐 수 없다.

 

열두 살의 아이는 어느 날 고분의 등잔 사진을 보게 된다. 복숭아모양의 등잔을 보는 순간 몸 안의 혈액들이 출렁, 그 후 어두운 무덤 내부가 등잔 빛에 환히 열리는 환영에 시달리며 혹시, 저것은 시가 아닐까 자문하는 날이 길었다. 시를 알기 전 시적인 것에 생의 운율이 출렁이다니.

 

영혼의 심지에 불을 놓았을 어느 손길. 불빛으로 한 생의 삶의 폭을 넓히겠다는 기원과, 한기에 영영 얼지 말라며 다독였을 시정(詩情)이 거기 있다. 마음속으로 간절한 주문을 외웠겠지. 그 주문은 언어이면서 언어의 배후. 침묵은 언어의 배후로 알맞지, 꽃의 배후가 허공인 것처럼.

 

누군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하는 시는 무엇인가. 새삼 ()()이 아닐 수 없다.

 

늘 존재 자체로 시이신 고재종 선생님과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님들, 객지에서의 새움을 틔우는데 도움을 주신 박해람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가족들과 바람으로라도 가닿고 싶은 정처(定處)에게 마음을 전한다. 끝으로 심사위원들 그리고 나의 나와 도약의 지점에 대한 약속을 맺는다. 머리맡에 시를 두고 자는 밤이 길 것이다. 그 밤들을 생이 함께 지새워줄 것.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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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예심을 통과한 15명 투고자들의 작품을 읽고 검토한 결과 두 명의 작품이 최종적으로 남게 되었다.

 

무릎5편의 작품을 투고한 조율의 경우 일상적 삶의 구체성에 바탕을 둔 치밀한 관찰과 묘사가 눈길을 끌었다. 그의 시는 감상이나 과장을 멀리한 채 삶의 신산함과 남루함을 적절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그러나 이 투고자의 시적 발상이나 화법은 새롭다기보다는 기존의 유형화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또 시를 떠받치는 인식이 아무래도 소품 지향적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반면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경전)’ 5편을 투고한 이은규의 경우 일상에서 시를 출발시키기보다는 관념에서 시를 끌어오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추상적 경향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작품을 관류하는 활달한 상상력 덕분에 요즘 시에서 보기 힘든 탁 트인 느낌과 더불어 세련된 이미지와 진술의 어울림이 주는 감흥을 맛볼 수 있었다. 잠언풍의 시는 자칫하면 시적 긴장을 이완시킬 수 있는데 그는 이런 함정을 잘 피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두 선자는 이번 심사에서 일상의 세목에 대한 충실보다는 바람을 동경하는’ ‘유목의 피에 잠재된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당선자의 시가 한국시의 비좁은 영토를 열어젖히고 나아가는 언어의 모험으로 연결되기를 희망한다.

 

- 심사위원 이시영(시인) 남진우(시인·문학평론가) / (예심 박형준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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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보를 짓다 / 이은규

 

 

그믐, 공명 쟁쟁한 방에 외할머니 앉아 있네요 오롯한 자태가 새색시처럼 아슴아슴 하네요 쉿, 그녀는 요즘하늘에 뜬 저것이 해이다냐 달이다냐, 세상이 가물가물 한다네요 오늘따라 총기까지 어린 눈빛, 오방색 반짇고리 옆에 끼고 앉아 환히 열린 그녀, 그 웃음자락에서 꽃술 향이 피어나기는 어찌 아니 피어날까요 시방 그녀는 한 땀 한 땀 시침질하며 의 조각보를 짓고 있네요 허공 속에 자투리로 남아있을 어제의 어제들 살살 달래며, 그 옆에서 달뜬 호명을 기다렸을, 아직 스러움이 서려 있는 오늘의 오늘들을 공들여 덧대네요 때마침 그믐에 걸린 구름이 얼씨구 몸을 푸는데, 세상에서 제일 바쁜 마고할멈 절씨구 밤 마실 나왔나 봐요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선 그녀 옆에 척하니, 그 큰 궁둥이를 들이대더라고요 그러더니 공든 조각보가 어찌 곱지 않으랴, 조각보에 공이 깃들면 집안에 복인들 왜 안 실리랴, 이러구러 밉지 않은 훈수를 두네요 마치 깨진 기와조각으로 옹송옹송 살림 차리던 소꿉친구 모양새로 앉아서는 말이지요 마고할멈의 넓은 오지랖이야 천지가 다 아는 일, 그 말씀 받아 모신 그녀는 손끝을 더욱 맵차게 다독이네요 한때 치자빛으로 터지던 환희들이 어울렁, 석류잇속 같이 아린 화상의 점점들이 더울렁, 쪽빛 머금은 서늘한 기원들까지 어울렁더울렁 바삐 감침질 되네요 의 감칠맛을 더하던, 갖은 양념 같은 농지거리들도 착착 감기며 공글리기 되더니, 이내 그 들 어우러져 빛의 시나위 휘몰아치네요 드디어, 우주를 찢고 한 장의 조각보가 첫 숨을 탔네요 금방이라도 선율 고운 장단이 들썩이며 펄럭일 것 같네요 저만치 아직 조각보에 실리지 않은 시간들은 羽化登仙이라 적힌 만장을 펄럭이며 서있네요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마고 할멈, 다 빠져버린 이빨 설겅설겅한 잇바디 내보이며 방짜유기빛으로 쨍하게 웃고요 외할머니야 그 조각보를 가슴에 안고 어린애처럼 좋아라, 술렁술렁 일렁일렁 거리네요 마침 장지문 밖에서 그믐달이 막 玄牝之門으로 드는 때 말이지요

 

 

 

다정한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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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는 달게 받아야 할 고통이자 희열

추사의 '사난결(寫蘭訣)'에는 "인품이 고고특절 하여야 화품도 높아지는 것인데 세인이 공연히 형상만
같이하기에 애를 쓰거나 혹은 화법으로만 꾸려가려고 애쓰는 이들이 있다. 또 비록 9천 9백 99분까지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나 9천 9백 99분까지 갔다고 난이 되는 것이 아니요, 그 9천 9백 99분까지 간 나머지 1분이 가장 중요한 난관이니 이 난관을 돌파하고서야 비로소 난을 그린다 할 것이다"라는 크고 깊은 문장이 나온다.

화(畵)의 길과 시(詩)의 길은 일맥이며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추사가 "나머지 1분의 경지는 누구나 다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하자면 인력으로 되는 경지가 아니요, 그렇다고 인력 이외의 것도 아니라"고 한 그 1분의 경지는 내겐 먼 먼 미래의 이야기이다. 오히려 그 미래를 위해 이제 비로소 9천 9백 99분까지의 험한 행로가 눈앞에 준비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게 시는 달게 받아 모실 고통이자 희열이고, 또 푸른 미래이다.

시인으로 살아가는 고통과 희열을 늘 몸소 보여주시는 고재종 선생님과 남도의 미풍으로 다가오는 광
주대 문창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 천금같은 내 귀인께도 어여쁜 절 올리고 싶다. 아울러 가능성 하나만을 믿고 내 시가 세상 첫 숨을 타도록 도와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와 함께 부지런히 쓰겠다는 다짐을 올릴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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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토속의 기운 신선하게 느껴져
 

선자(選者)에게 넘겨진 시편들은 예심을 거쳐 온 작품이라서, 어느 정도의 시적 성취가 고루 엿보였다. 그러나 습작기의 신인들에게서 흔히 살펴지는 판에 박힌 수사나 장식적 언술에서는 모두들 비켜서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검토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들은 이하정의 '합천 가는 길', 이인주의 '모자를 쓴 사철나무', 이은규의 '조각보를 짓다' 등 세 편이었다.

이하정의 시에서는 한 세대 전의 자옥했던 체험이 조밀하게 읽혀진다. 그러나 낡은 화폭을 대하는 듯한 느낌은 화자가 선택한 회상의 어조가 고루한 문맥 위에 얹혀있는 탓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인주의 응모작들이 보여주는 신선한 문체는 평가받을 만하였다. 시화의 선택이나 상상
력의 밀도 또한 감각적이었다. 그러나 시의 힘을 한데 모으려는 집중력에서는 신뢰가 떨어진다. 집중력은 작품을 관통해가려는 시적 긴장감의 바탕이자 일관성의 핵심인 것이다.

 이은규의 시편에서도 여러 결점들이 눈에 띄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선작으로 뽑힌 '조각보를 짓다' 역시
수다스러운 언사에 필적할 만한 감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더구나 '현빈지문(玄牝之門)'처럼 공연한 현학이 이 시에 무슨 보탬이 되었는지는 곰곰이 따져보아야 한다. 노자(老子)에 기댄 이 구절은 '만물을 낳게 하는 근원의 길'을 가리키지만, 그런 어사가 아니더라도 모성(母性)의 주술적 분위기를 감각적으로 살려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겹겹의 말에 감싸인 '마고(麻姑) 할미'와 같이 토속에의 생식적 기운이 이 시의 신화적 토대가 되어 작품의 일체감을 어느 정도 건사해내고 있다는 점에 심사위원들은 함께 공감하였다. 당선을 축하하며 거듭 정진하길 당부한다.

 

심사위원 김명인·오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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