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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소금이 온다 / 김은순

 

장독대 그늘을 짓는 봉숭아 터질 무렵

소금이 온다

신한 비금도에서 소금 가마니를 등진 노새가 온다

수평선에 뜬 해와 달도 지고 온다

비금도와 도초도 사이를 유영하는

숭어와 농어 냄새가 함께 온다

 

밑창 구멍 뚫린 빈 항아리에

소금을 가득 채워 놓으면

종일 출렁이던 비금도 바다가 빠져 나온다

 

어머니는 빠져나온 비금도를 돌배나무꽃이라 불렀다

소금이 와서 바다 향으로 가득 채우던 날

항아리가 깨졌다

소금은 날짐승 길짐승도 찾는다지

발굽과 손톱이 빠지지 않기 위한 까닭이라지

 

이따금 돌배나무에서 배꽃이 피었는데

바다 냄새가 났다, 그런 날엔

부리 다친 새들이 소금꽃을 찾아 날아왔다

 

 

 

 

[금상] 연 / 최규목

 

외줄 위 한 잎, 영토가 광활하다

펄에 뿌리박고 뭍으로 줄기 밀어 올려

우레에 아픈 잎새 청약잎이 벌판이다

 

삼족오 깃발 세우고,

산맥너머 초원으로 군마 달리던 땅이다

새벽마다 펄펄 펴는 향기 진한 홍련백련

어느 왕조가 건져 올린 우리 얼인가

 

줄기 위의 잎사귀에 그늘이 진다

 

넓고 큰 잎에 요동이 진다

백가쟁명 해법들에 분단이 울고 진

 

* 요동 : 요하의 동쪽, 고구려의 옛 땅

 

 





[은상] 양각 / 최류빈

 

양각은 이기적, 배경을 뒤로 보내면서야 탄신한다. 섬처럼 돋아 홀로 잊혀지지 않으려 모든 양각은 듬성듬성 돋아나 정수리를 밝게 빛낸다고 믿었다. 낮게 깔린 저 먼 것들을 뒤로한 채 우뚝 솟은 솟대가 되어 혈관 같은 몸체로 교신하는. 양각의 묘선描線은 때론 날카로운 고함 힘껏 도드라져 볼록한 마루를 타고 내려오는 곡면마다 사연을 주워 담는다. 양각은 그렇게 거칠게 성난 바다의 높은 파고처럼 가라앉을 일 없을 줄, 하나의 장단이자 음각의 대변인 되어 주저앉을 일 없을 줄 알았다

 

불쌍한 양각은 홀로 등대가 되어 스스로 정수리가 되길 자처한다. 빛을 발하는 양각은 하나의 광-원이지만 밝게 빛나는 전력은 소진될 날 기다리는 죄수의 애달픔, 양각은 마모되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그의 모질게 용맹한 실선과 함께 막 태어난 새처럼 말랑거리는 주둥이 오물거리는 저 먼 뒤편의 음각들, 케케묵은 둥지에 겹겹으로 쌓아놓고 양각은 몸을 치장하고 밤바다로 나선다. 이기적인 양각은 호흡기관의 말단 책이 들이키는 공기로 먼저 목축이고, 도장의 마찰력으로 선두에 서 용맹하게 지휘한다. 이기적인 양각은, 이기적인 양각은 한 보 앞장선 만큼 고꾸라질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슬하에 헤일 수 없는 것들을 쓸어담고 홀로 이기적인 ………






 

[은상] 이를 뽑다 / 유영희

 

좀 전까지도 아무렇지 않던 이가

들이댄 거짓말 탐지기에 쏙 뽑혀 나왔다

변명할 틈 없던 입이 벙어리장갑처럼 불룩해졌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사랑 한번 하지 못한 죄

결백을 주장하기엔 너무 늦었다

 

내 몸에 싱크홀 하나 생겼다

뿌리 뽑힌 나무의 구덩이

이장을 한 구멍 같기도 하고

숭숭 뚫린 골다공 같기도 하다

 

실뿌리 끝에서 뽑아 올린 수액이 말라가는 동안

함박눈 내리던 정월 초닷새

훌쩍 떠난 아버지가 욱신거린다

 

부식된 뿌리를 감추고 살았을 아버지

탐지기를 들이대기도 전 쓰러져버린 고사목은

빠르게 허물어지는 어둠처럼 깎여나갔다

마취 풀리자 통증으로 피어나는 구멍

무너진 한쪽 언저리를 끝내 실토할 수 없다





 

[동상] 공기방울, 당신은 올라가고 / 박준영

 

인터넷은 커피를 마실 것이고 하루는 뜨거울 것이다 그래 날이 밝았어 가볍게, 가볍게 오늘은 가볍게 떠오르고 싶어

 

스위치를 켜고, 덜 깬 물들이 아침을 끓인다 유리 포트기 너머 조용한,

 

한판 승부, 물기둥과 공기방울의 튀기는, 커피향이 짙게 퍼진다 모닝커피 한잔에 숨을 쉬는 유니폼들, 소리는 커지고 빌딩은 높아간다

 

오후의 사무실은 강철발굽 닮은 포트기 안의 발광

 

, 뜨거!

 

비명은 방울과 충돌한다 물, 불이 어울러 기포는 기포로 들끓고, 거품 구겨지는 소리는 점점 가늘어진다

 

죽다 남은 달이 부글거리며 서쪽으로 하얘간다 뱃속에서 부레를 넣고 두둥 비행을 꿈꾸던 유니폼들이 추락한다 보름달이 뜨는 그믐

 

당신은 올라가고 나는 추락하고

 




 

[동상] 나흐트 무지크 / 김진열

 

하늘과 땅을 잇는 비가 내리는 날

골목에 파르르 줄 끊어진 기타

추락의 몸짓에도 꿈이 있었을까

떨어지는 빗방울은 울림통 위에 톡톡

밤이 깊어지면 누웠던 몸 일으켜

물의 율동이 어우러진 마이너 합주

통각을 잊기 위한 몸놀림이다

흠뻑 젖은 몸으로 불협화음을 이루고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갈래 갈래의 춤

빗줄기 강해지면 감정은 골이 지고

잦아들면 그리운 음색으로

목울음 짙게 토해내는 세레나데

과격한 선율들이 천천히 힘을 거두고

풀어놓은 밤바람을 듣던 굽은 골목

저만치 무료했던 안마소 간판이 깜빡 인다

아픈 만큼 상처를 노래했고

깊어진 흉터는 공명통이 되었다

 

*나흐트 무지크 : 모차르트 세레나데 13.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에서 인용.

 

 


 


 

[동상] 나는 내일의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어요 / 손지형

 

기억되고 싶어요

어제 나를 본 이들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오늘 홀로 낮잠이나 자야 한다 해도

나는 내일의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어요

 

그 신념으로 나는 어제도 살아내었고 오늘도 살아왔어요

내 요동치는 심장과 저 가느다란 시계 침이 항상 같을 수는 없는 거겠죠.

나는 그저 이 시계 침과 박자를 맞추던 내 심장을 기억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 박동을 기록하고 싶어요.

 

이 다음에 누군가는 시계 소리가 아닌

누군가의 심장 박동에 맞춰 살아갈 수 있기를.

나는 오늘 밤도 가장 의미 있고 가장 쓸모없는 낱말들로

내 오랜 천장을 채웁니다.





 


[가작] 마른 빨래 / 이남훈

 

고향집 뒤뜰

널어놓은 노모의 흰 저고리가

줄을 탄다

봄볕에 잘 마른 몸

소맷자락 흔들며 어깨춤을 푼다

 

좁은 어께가 줄 위에서 펄럭인다

검정 치맛자락에 얹힌 바람이

공중제비를 돈다

묵은 춤사위가 펼쳐질 때마다

신명난 이팝나무 꽃잎이

중모리로 강물 위에 뿌려진다

 

늘 젖은 옷으로 걸어왔던

어미에게도

저리 가벼운 어깨가 있었던가

옷고름도 여미지 못한

흥이 있었던가

 

바지랑대가 허리를 굽혀

눈물 마른 옷을 내린다

물기 가신 외줄에서

어미의 살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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