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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 이경림

 

가죽혁대처럼 질기고 긴 길의 끝에서 나는 보았네 加恩이라는 유리문을. 나는 보았네 그 속에서 수 세기가 내 몸을 돌아 나오는 것을. 지나간 들판 지나간 산 지나간 마을회관 지나간 밤의 광장이 보여주던 무성영화들. 나는 보았네 똥 장군을 지고 가는 장수아버지, 취해 비틀거리며 골목을 돌아가던 아랫마을 김 영감, 어머니는 부엌에서 국수를 삶고 있었네, 할머니는 방안에서 어항 속 금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리며 이야기하고 있었네, 이마에 간대라 불을 단 광부들이 막장으로 가는 비탈에 한 줄로 놓여 있었네 한 떼의 개미들처럼 나는 보았네 검고 둥그렇게 서 있는 옥녀봉, 비탈에 자지러지게 피어있는 도라지꽃, 구호물자를 받으려 줄을 선 사람들, 악동 형태는 전봇대를 타고 고압선 쪽으로 오르고 있었네. 그 아래, 누렁개 한 마리가 뉘엿뉘엿 먹이를 찾아 다녔네. 아버지는 눈만 반짝이는 광부들을 지휘하고 있었네. 황금빛 해가 옥녀봉 꼭대기에 우스꽝스레 걸려 있었네. 나는 보았네 멋쟁이 신 선생이 도래실로 가는 모롱이에서 어떤 키 큰 남자와 연애하는 것을, 봉암사 상좌승은 시주바랑을 메고 북쪽으로 가는 길 위 놓여 있었네. 나직한 돌담 너머 집들이 비틀 서 있었네
 

나는 보았네 어린 고염나무가 조랑조랑 매달고 있는 버거운 식구들을. 분홍 양산을 쓴 처녀들은 위험한 레일 위를 걷고 있었네. 도랑마다 물이 넘치고 둑방에는 문득 몸메꽃이 피어 있었네 검은 숲이 검은 새들을 날리고 있었네 나는 보았네 바람난 옥자가 검은 새를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을.

 

고통처럼 길고 질긴 가죽혁대가 그녀가 날아간 허공에 떠 있었네

*가은, 도래실,-경북 문경에 있는 마을 이름
*봉암사-문경에 있는 사찰

 

 

 

 

급!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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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상을 받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벌을 받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분명 명예로운 일이지만 반면 채찍이며 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시라는 괴물이 폐결핵에 심한 공황장애 환자이던 제게 운명처럼 들이닥쳐 머리채를 잡고 30년을 조리돌린 일처럼.

문청이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시를 좋아했습니다. 정지용의 백록담을 본 것이 초등학교 5학년 쯤 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후 아버지의 책들 사이에서 오장환 임화 백석 김기림의 시들을 봤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반대로 절대 시인은 되지 않겠다 생각했던 걸로 기억됩니다.

 

아버지의 책상에서 보던 그 책들과 원고뭉치들은 우리의 배고픔에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으로 이과를 선택했으나 가난은 배우는 일 조차 뜻대로 못하게 했습니다.

 

어느 날 입원해 있던 병실에서 그것은 마치 주문처럼 흘러나왔습니다. 원인불명의 불면이 계속되었고 그 때마다 밤새 받아쓰기 하듯 그것들을 썼습니다. 수면제에 취해 잠이 들면 꿈속에서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시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괴로웠으나 황홀했습니다. 마치 오로라 속을 휘몰려 다니는 알 수 없는 기류처럼.

 

시는 광기입니다 불면입니다. 크라이막스 입니다. 섹스입니다. 유토피아이며 타나토스이며 춤이며 거대한 침묵입니다. 침묵을 찢고 나오는 꾕가리 소리입니다. 우뢰이며 번개이며 소나기입니다. 흐느낌입니다.

 

생각해 보니 그것에 머리채 잡혀 끌려온 지난 생은 아름다웠습니다. 시를 먹고 시를 싸고 시를 타고 시로 달리며 시를 노닥거리며 지나가는 저녁을 바라보게 해 준 시에 감사합니다. 해질녘입니다. 황혼이 아름다운 것은 이글거리던 해가 저 너머에서 반추해 주는 노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짧은 저녁이 더욱 아름답도록 제 시에 손 얹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리며 아울러 저 때문에 기회를 잃으신 저보다 훌륭하신 몇 분의 동료 시인들게 죄송한 마음 전합니다. 벌을 받는 거라 생각하고 더욱 삼가며 살겠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좋은 잡지를 만들기 위해 애쓰시는 애지의 반경환 주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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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최근 우리 시단은 크게 활력이 떨어져 있다. 한 동안 문단을 휩쓴 미래파의 시들은 애초의 저항성을 상실하고 분별한 아류들의 언어유희로 전락해 있고, 문단 일각에서는 서정성의 부활을 말하고 있으나 아직은 어떤 새로움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과거의 고답적 서정의 답습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시인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고 많은 시전문지들은 지극히 사적인 일기장 안의 언어들로 채워지고 있다. 언어의 힘으로 사회와 삶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보여준 작품이 많지 않다. 문학상은 바로 이런 작품을 찾아 한 시기 우리 문학의 성과를 확인하는 일이다. 하지만 최근 문학상은 상업성과 문단의 권력화의 수단이 된 지 오래이다. 오직 애지 문학상만이, 우리 문학의 질을 높이고 새로운 문학의 지평을 열어준 작가나 시인에게 문학상이 돌아가야 한다는 당위를 지키고 있다고 자부한다.

 

작년 겨울호부터 올해 여름호까지 <애지>를 포함한 여러 문학지들에 실린 작품 중에서 먼저 후보작들을 선정했다. 시인의 명망성이나 주제의 시의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시인이 어떤 진정성을 가지고 인간과 세상을 보는지 또 얼마나 치열한 언어로 그것을 표현했는지를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삼았다. 먼저 10편을 후보작으로 선정했다. 정채원의 홀로그램, 송찬호의 종이 공주, 윤제림의 달이 즈믄 사람에, 복효근의 그리움의 속도, 이병률의 어떤 걱정, 이경림의 자정, 이영식의 달은 감정노동자, 천양희의 초미금, 양선희의 시를 읽는다, 장옥관의 덜렁덜렁이 후보작이었다. 다들 한 해 동안 우리 문단을 빛낸 훌륭한 작품들이었다. 많은 논의 끝에 앞서의 선정 취지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이경림 시인의 작품을 선정했다.

 

이경림 시인의 자정은 사색의 깊이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과거 우리의 삶에서 흔히 마주치는 풍경을 쉬운 언어로 담담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추억이 불러오는 익숙한 정서에 빠지거나 과거가 주는 안온함에 쉽게 머물지 않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삶의 아픔과 비극성을 보여준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슬픔과 고통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지를 보여주면서도 진정한 인간애가 이런 것들의 이해 위에서 가능하다는 희망을 함께 보여준다. 이경림 시인의 이번 수상 작품은 쉬우면서도 가볍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고 잔잔하면서도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경림 시인의 시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경림 시인의 수상을 축하하며 아울러 이번 수상을 통해 시인에게나 우리 애지에게나 큰 발전의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 둘 모두에게 큰 영광이었으면 한다.

 

심사위원 반경환, 이형권, 황정산(글 황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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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호랑이1 / 이경림

 

 

설렁탕과 곰탕 상이에는 푸른 호랑이 한 마리가 산다

어떤 생의 무릎과 혓바닥 사이에는

어떤 생의 머리뼈와 어떤 생의 허벅지 살 사이에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픈 눈과 사나운 관능을 가진

푸른 호랑이 한 마리가 산다

 

저 높은 굴뚝을 천천히 빠져나가는 푸른 연기와

사라지는 뼈

사라지는 살들 사이에는

 

낡은 의자에 앉아 곰탕을 먹는 노신사와

그 앞에서 설렁탕을 먹는 시든 달리아 같은 아내 사이에는

 

그것들의 배경인 더러운 유리창과

산발을 하고 흔들리는 수양버들 사이에는

날개를 빳빳이 펴고 태양 속으로 질주하는 새

반원을 그리며 느리게 불려가는 바람 사이에는, 그래!

 

미친듯이 포효하는

푸른 호랑이 한 마리가 산다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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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문학회(회장 곽실로)와 천년의시작(발행인 김태석)이 주관하는 '6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이경림(64)씨가 선정됐다.

 

수상작은 시집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심사위원들은 "생을 '푸른 호랑이'라는 이미지로 그려 나가면서 허상과 부재 사이의 '어른거림'을 하나의 느낌과 정서로 포착하고 있다"고 평했다.

 

경북 문경 출신인 이씨는 1989'문학과비평'으로 등단했다. 시집 '토씨찾기''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상자들' 등을 펴냈다.

 

함께 발표된 '6회 최치원 신인문학상'은 권수진(34)씨에게 돌아갔다. 수상작은 '붉은 모터사이클' 4편이다.

 

이씨와 권씨는 각각 상금 500만원과 200만원을 받는다. 시상식은 27, 28일 경남 함양군 상림공원 일대에서 펼쳐지는 지리산문학제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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