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영시인의 시집 <은빛호각>을 읽으면서 내내 스미던 느낌은 바로 행복이라는 것이었다. 개인적인 경험들을 한 편의 시로 그림처럼 펼쳐 보이는 시인의 솜씨가 유유하다. 시란 모름지기 이렇게 그림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흑백으로 펼쳐지는 이 그림들 속에는 참으로 크게 욕심 부리지 않고 살아가는 시인의 묵은 기억들이 은빛호각소리처럼 길고도 선명하게 웃고 있다.
그의 시에는 사람을 향한 애정만큼의 꽃송이들이 봉긋봉긋 피어있다. 소설집 한권을 읽고 난 기분이 들만큼 수런수런, 수많은 얘깃거리가 강물처럼 흘러간다. 어쩌면 칼날 같았음 직한 일들도, 가슴이 에였음직한 일들도....... 그 힘겨웠을 기억들마저도 이렇게 따뜻하게 풀어내다니, 기억이 추억이 되면 이토록 따스해지는 것인가. 시인에게는 저세상마저도 편안하고 따스한 자연으로 보여 지는 가 보다.
중학교 일학년 때였다. 차부(車部)에서였다. 책상 위의 잉크병을 엎질러 머리를 짧게 올려친 젊은 매표원한테 거친 큰소리로 야단을 맞고 있었는데 누가 곰 같은 큰손으로 다가와 가만히 어깨를 짚었다. 아버지였다. ─ <차부에서> 전문
새벽녘 대문을 활짝 열어젖힌 추탕집 펄펄 끓는 가마 곁에서 플라스틱 수조 얕은 물을 튀기며 미꾸라지들이 아주 순하게 놀고 있다. ─ <삶> 전문
내 영혼은 오늘도 꽁무니에 반딧불이를 켜고 시골집으로 갔다가 밤새워 맑은 이슬이 되어 토란잎 위를 구르다가 햇볕 쨍쨍한 날 깜장고무신을 타고 신나게 봇도랑을 따라 흐르다가 이제는 의젓한 중학생이 되어 기나긴 목화밭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출근했다가 아몬드에서 한잔하다가 밤늦은 시간 가로수 긴 그림자를 넘어 언덕길을 오르다가 다시 출근했다가 이번에는 본 적 없는 어느 광막한 호숫가에 이르러 반딧불이도 끄고 다소간의 눈물 흘리다. ─ <잠들기 전에> 전문
삶이란 -새벽녘 추어탕집 펄펄 끓는 가마 곁에서도 물을 튀기며 순하게 놀고 있는 미꾸라지들처럼-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죽음과 삶,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그런 것들이 한 데 섞여 둥둥 떠다니는 가운데, 아무것도 미리 알지 못한 채, 그저 불어가고 불어오는 바람처럼, 그러다가 마침내 어느 길모퉁이에선가 그 떠다니는 것들과 하나씩 입 맞추며 가는 그런 것이 삶이리라. 깊고 추운 겨울날, 은빛호각 한 개 품에 앉고 뜨신 방에 엎드려 펼쳐 보기를 권한다.
[수상소감]
존경하는 김종길 선생은 최근 어느 잡지(《시와정신》2004년 봄호)에 기고한 글에서 이른바 시격(詩格)에 관한 격의 이론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우리는 시비평에 있어서보다 오히려 일상생활에서 간혹 격의 높낮음을 이야기할 뿐”이라며 “옛날의 한시비평에서도 격의 고하, 즉 시적 가치의 위계는 있었다”며 “중국 역대의 격이론을 살펴보면 예쁘거나 기이하거나 강렬한 것보다도 유원(幽遠)하거나 고고(高古)하거나 담박(澹泊)한 것을 격이 높은 것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셨는데 조지훈 선생의 시야말로 바로 여기에 딱 들어맞는, 우리 근대시사에서는 몇 안 되는 특이한 전통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훈 선생의 모든 시가 다 그렇다고 단언할 수 없겠습니다만, 우리 시 읽기에 눈 밝은 신경림, 정희성 시인이 공편한《한국현대시선Ⅰ,Ⅱ》(창작과비평사, 1985)에 수록된 지훈 선생의〈승무〉(僧舞),〈고사 1〉(古寺),〈낙화〉(落花)는 김종길 선생이 말씀하시는바 시격의 위의(威儀)를 두루 갖춘 기품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적 정서 또한 유원하고 고고하며 담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자유시임에도 마치 고조(古調)의 정형을 연상하듯 2행씩 끊어 쳐서 웅혼하고 유장한 가락을 형성하고 있는 이 시를 청년 시절부터 수없이 반복해서 읽어왔지만 내면을 스치는 어떤 서늘한 기상과 호소하듯 절제된 애수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전혀 낡지 않은 채 제 가슴을 촉촉이 적셔줍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 후배 시비평가는 저의 이런 느낌을 “실상 모든 시는 그것이 작품이 되는 순간 이미 시계의 시간에서 탈출해” “과거로 밀려서 사라지지 않는” 영원의 시간을 산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만, 지훈 선생의 작품 중 이렇듯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또 하나의 예를 들라면 저는 선뜻〈고사 1〉을 들고 싶습니다.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西域) 만릿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40여 년 전에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제 마음은 제2연의 “고오운”에서 크게 한번 출렁거렸는데, 오늘 그 구절을 반복해 읽어도 제 내면의 리듬은 바로 여기에서 다시 한번 출렁! 합니다.
세상에는 상도 많고, 좀 외람되이 말씀드리자면 아예 없었으면 하는 상도 많지만 이렇듯 고매한 인품과 기풍이 서린 지훈상을 받는 제 마음 또한 “조찰히” 기쁩니다. 65년 전인 1939년에 지훈 선생의 시를 세상에 처음 내보낸 지용 선생의 어느 시 구절을 빌려 표현하자면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를 한 느낌입니다. 그토록 두껍고 완고한 동토(凍土)에도 이제 막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여기 오신 모든 분들께도 새로운 기운이 가득 생동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상을 제정하고 운영하시느라 애쓰시는 분들, 심사하신 분들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제4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조지훈 선생의 고결한 인품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지훈상의 심사에 임하면서 우리는 새삼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길지 않은 한평생을 살면서도《조지훈 전집》에서 볼 수 있듯이 청렬하면서도 아름다운 예술적 성취와 호한한 학문적 탐구, 그리고 준열한 지사정신을 통해 이 땅 정신사와 예술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2003년 4월부터 2004년 3월까지 출간된 주요시집 100여 권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것은 다음 세 권이었다.
먼저 조창환의《수도원 가는 길》(문학과지성사)은 자연에 대한 그윽한 명상이 종교적 영성(靈性)을 느끼게 할만큼 맑고 깊은 것이어서 관심을 환기하였다. 그러나 지훈시에서 볼 수 있는 정신의 준열함이나 치열성이 다소 약한 것이 아쉬움으로 느껴졌다.
김영석의《모든 돌은 한때 새였다》(시와시학사)는 정련된 시어와 정신의 지향성이 매우 높은 성취를 보여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잘 씌어진 시들이 흔히 그렇듯이 굵고 깊은 울림을 던져주는 데는 다소 아쉬운 느낌을 준 것이 사실이다.
수상자로 선정된 이시영의《은빛 호각》(창비)은 시인 특유의 날카로운 사회의식과 섬세한 예술의식이 탄력있게 조화를 이룸으로써 아름다운 정신의 울림을 던져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무엇보다도 이시영 시인이 등단 이래 견지해온 지사적 기품과 성정이 서정성의 내면을 관통하고 있어서 지훈정신과도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되었기에 심사위원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앞의 두 분도 지훈상을 받을 충분한 자격과 업적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어차피 수상자는 한 사람이어야 하기에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유보되었다. 앞으로도 지훈상이 더 훌륭한 분들에게 주어져서 해가 갈수록 더욱 빛나는 큰 상으로 자리잡아가기를 희망한다.
심사위원 김재홍(경희대 국문과 교수) 최동호(고려대 국문과 교수) 홍기삼(동국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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