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 / 예현연
금간 항아리 사이로 그녀와 내가 교차한다
비어있는 것들을 배경으로 그녀는 흐릿하다
先史보다 아득하게 먼지낀 세월이
두터운 유리벽으로 앞을 가로막는다
古代의 여인이 회갈색 미라로 누워있다
유폐된 황녀의 마지막은 고통뿐이었다
벌린 입 속 수천년을 견딘 치아들이 온통 틀어졌다
푸른 비소 알갱이 갈앉은 자기병이 그녀의 유품이다
벽옥 파편들은 멸망한 족속의 文字처럼 어지럽다
지하 전시관에서 부식되는 황녀의 초상
흩어진 채색, 이제는 밑그림만 남았다
낯선 유적에서 마주치는 그녀와 나의 낡은 눈동자
저 자기병에 맺힌 유약은 수천년 전부터 글썽여온 울음이다
그녀도 엇갈리는 因緣 속에서 때론 그 실오라기를
애써 끊으며 살았을 것이다 붉게 힘준 잇바디
고리 끊어진 장신구는 한때 그녀의 저녁을 치장했다
가슴팍에서 사그락대던 벽옥 구슬들은
한순간 쉽게 끊어져 내렸다
멀리까지 굴러가는 구슬을 멍하니 보고 있는 그녀
그러모아도 쥐어지지 않는 것들을
놓아버린 순간이 遺蹟의 저녁이다 불이 꺼진다
폐관을 알리는 안내 방송만이 어지럽고
출구를 가리키는 비상등은 꺼져버린다
어둠 속에서 모든 금간 유물들이 무너져 내린다
[당선소감] 드러냄과 숨김의 숨바꼭질
아카시 나무로 둘러싸인 기숙사에 산 적이 있다. 나무 그늘 때문에 볕이 잘 들지 않는 3층 끝 방에 웅크리고 있으면 낮에도 밤 같고 밤에도 밤 같았다. 혼몽한 시간들 속에서 가끔 눈뜨면 나뭇가지들이 바람불 때마다 창을 끽끽 긁으며 불 꺼진 방을 들여다보았다.
긴 시간이 지난 뒤 창을 열자 노랗게 물든 잎들이 수천 수만 마리 나비떼처럼 한밤중을 배경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지독하게 아름다운 한 순간이 나머지 생을 지탱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따금 그 기억을 떠올려 보는데, 그 때 내가 본 것은 꿈이 아니었을까? 점점 확신이 없어진다. 내가 실제로 본 것과 보았다고 믿는 것 사이의 거리감. 꿈과 기억이 뒤섞이고 꿈과 현실이 뒤섞인다.
세상 속에서 나는 늘 낯설고 오래된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다. 미성숙한 내가 어른의 하이힐을 신고 비틀비틀 걸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낯설음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시를 쓰는 동안 계속, 나를 드러내고 소통하고 싶다는 욕망과 무수한 글자 속에 나를 감추고 싶다는 욕망 사이를 오갔다. 두 가지 욕망의 줄다리기는 아직 진행 중이다.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립고 고마운 가족들, 짧지 않은 세월을 함께 건너온 문학반 사람들, 따뜻하고도 엄격하신 수요팀의 모든 분들, 시와 삶이 일치해야 됨을 가르쳐주신 만호형, 내가 비틀거릴 때마다 손잡아준 국화와 단혜, 재미있고 훌륭한 친구 정미, 햇빛 잔잔한 물결 같은 규윤 형과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그리고 서툰 글쓰기를 되돌아 볼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늘 새로움을 일깨워 주시는 최동호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심사평] 시적 묘사의 묘미 체득한 작품
시가 당대적 현실을 비켜가지 않고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올해는 유난히도 가족의 집단 자살이나 살해, 사체 유기 같은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소재로 하는 시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런 시의 대부분은 산문적이거나 결론이 뻔한 풍자여서 왜 굳이 시란 장르를 택해서 그런 소재를 다뤄야 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서 20여 명의 작품을 선택한 다음, 다시 4명으로 좁혀 논의했다. 먼저 김륭의 ‘라면은 나쁘다’ 등 5편은 현실에 있을 법한 사건들을 서사적으로 진행해 나가지만, 그 상황을 시적으로 변모시키는 노련한 솜씨가 돋보였다. 그러나 시인 자신이 나서서 설명하는 부분이나 과장하는 부분이 걸렸다.
백윤경의 ‘멜론은 그물을 치고’ 등 3편은 대상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통해 대상, 혹은 하나의 세계가 숨기고 있는 비의를 천착했다. 시들을 읽고 나면 하나의 멜론이 무덤으로 확장되고, 아스팔트에 페인트로 그려진 사람의 형상이 시지프스처럼 일어서는 것을 목도하게 되는, 이미지의 진행을 따라가는 재미도 만만찮았다. 그러나 간혹 눈에 띄는 상투적 표현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신기섭의 ‘가족사진’ 등 6편의 시 세계는 모두 달랐다. 그렇지만 하나의 사건이나 정황을 묘사함으로써, 결국 죽음에 이르고야 마는 우리 삶의 진한 슬픔을 시 쓴 사람과 공유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시 한 편, 한 편을 구축하는 솜씨도 있었다. 그러나 단 한 편의 밀도 있는 완성작을 선택하기에는 미흡했다.
예현연의 ‘유적’ 등 7편은 시 쓴 사람 자신의 작은 경험 하나로부터 시작된 묘사를 치밀하게 진행하는 시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묘사를 통해 일상의 경험에서 채집된 보잘 것 없는 시간과 공간이 조금씩 넓어지고,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시적 묘사의 묘미를 체득한 사람의 시였다.
같이 응모된 ‘내 창 밖, 고양이’도 재미있고 신선한 작품으로 논의됐다. 심사위원들은 응모된 7편의 작품이 고른 수준을 보여주는 예현연의 작품을, 그 가운데서 시간의 겹침을 무리 없이 소화한 ‘유적’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쉽게 합의했다.
심사위원 신경림, 정호승, 김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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