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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 / 손연후

 

 

노란색 상자 안에

털실 뭉치 좋아하는 고양이를 기르는 일

 

누구나 동그란 노란색으로 웅크려본 날들 있었지

쉼표 모양 씨앗처럼 고요히 꿈꾸는 연습

 

감자야, 하고 부르면 눈이 동그래져서 딸꾹 하고

딸기향 나는 감기에 걸린 것 같아

당신 넥타이에도 딸꾹거리는 딸기가 묻었어,

우리는 서로의 코를 쿡 찌르며 웃어버렸지

 

커튼을 열면 우리도 고양이 꼬리처럼 기다랗게 기대어 보고

노란 고양이 무늬 닮은 햇빛이 머리 위로 얼룩덜룩 흘러내렸지

반짝이는 유리잔마다 함께 이름을 붙이던 날

사람은 이름대로 사는 거래, 여기저기 우리 이름을 붙이자

우리는 감자 눈동자 속에 살고 유리잔과 식탁보 넥타이 구두에도 살고

사람들 와르르 모였다 흩어지는 보도블록 횡단보도에도 길쭉하게 누워 있는 거야

수많은 버스 차창 손잡이에도 상냥한 고양이 키스처럼 토닥토닥 흔들리고 있는 거지

 

하늘이 자몽즙 같은 노을빛으로 젖어들면

기다란 빨대 꺼내 눅눅해진 하루를 보글보글 휘저어볼래

볼을 삐죽 부풀린 거품들 퐁퐁 터지고

푹 익은 노을 냄새 싫어하는 감자는 자꾸만 빨대를 타고 기어오르고

잭의 콩나무처럼, 하늘 위로 쑥쑥 자라나는 노란색 빨대를 올려다봤지

높이 더 높이, 어느새 굵어진 줄기에서는 샛노란 꽃잎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어

 

날마다 눈부시게 타오르는 구름 위로 훨훨 날아가는 꿈을 꿨어

감자는 점프를 잘했고 우리는 고양이 무늬로 웃으며 서로에게 손을 뻗었지

하늘에서 빨간색 노란색으로 뒤섞여 열리던 우리의 기다랗고 사랑하는 미래들

 

감자에 대해 말하자면 먼저 사랑에 대해 말해야 해

우리는 노란색이었고, 커튼을 열면 유리잔마다 함께 반짝이며 살아있었지

우리는 씨앗처럼 가벼워 이 계절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늘씬한 고양이처럼 숨차게 달려보지 않겠니

 

매일 밤 노란색 상자 안에서

우리는 털실 뭉치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었고

 

통통 고양이 발소리 다가오자

우리는 눈 맞추며 함께 큰소리로 웃어버렸어

 

 

 

 

 

[당선소감] "슬픔 가득한 계절 속 상냥한 등불같은 시 쓰고파"

 

크리스마스 사흘 전, 학과 졸업시험을 마치고 하교하던 길에 당선 소식을 듣게 되었다. 대학로 구석진 담벼락 아래에 서서 전화를 받으며 오랫동안 조용히 울먹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항상 혼자서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뭘 적고 싶은 건지도 잘 모르는 채로, 나는 노트를 펼쳐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곤 했다. 나는 멋대로 그것들을 시라고 불렀다.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건 어쩌면 철없는 바보의 짝사랑 같은 거였을까.

 

그동안 길을 잘못 들기도 하고, 혼자 컴컴한 시간 속에서 한없이 헤매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사실 나도 좀 더 멋진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시간의 빚만 뿌옇게 쌓여갔다. 힘든 시간 속에서 문득 내게 위안을 안겨준 것은, 대학 교양 수업에서 접하게 된 프랑스 시인들의 시편들이었다. 시를 읽으면 칙칙하게 말라가던 내 영혼의 색이 밝은 빛으로 환하게 칠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란 참 따뜻한 거였구나.

 

용기를 내어 다시 펜을 들고 내 멋대로 감히 시라는 걸 써봤는데, 우연히 교내 문학상에서 상을 받게 되었다. 시를 좀 더 알고 싶어서 여기저기 동아리도 전전해보고, 학과에서 열리는 시 수업도 들어보았다. 그리고, 계속 썼다.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멈추지 않고 계속.

 

시를 쓰는 법에 대해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아직 많이 부족한데도 운 좋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음을 알고 있다. 겸손한 자세로, 계속해서 열심히 써나가고 싶다. 모두가 많이 아프고 힘든 계절이다. 잔혹한 슬픔으로 가득한 이 추운 계절 속에서, 누군가에게 작고 따스한 위로를 전해줄 수 있는 상냥한 등불 같은 시를 쓰고 싶다.

 

사랑하는 가족들, 항상 곁에서 함께해준 고마운 친구들, 하연·진희·성은, 한 해 동안 함께 열심히 임용시험을 준비했던 우리 스터디원들, 하림· 주민·지성 그리고 경호, 한번 시를 써보라고, 그래도 된다고 제게 용기를 주셨던 이순욱 교수님과 국어교육과 시 동아리 '모임'의 학우분들에게도 모두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아름답고 광활한 세계에 저를 초대해주신 영남일보사와 관계자분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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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경쾌·발랄한 시어 구사당찬 신인의 미래 기대

 

본심에 올라온 스무 분의 시 가운데 장현숙씨의 '뭉친 나이' 2편과 김지영씨의 '뜨겁고 흰 유언' 16, 홍담휘씨의 '카라멜마끼야또가 꽃피는 동안' 3, 손연후씨의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 2편이 선자의 눈길을 끌었다. 장현숙씨의 작품은 시를 차분하게 끌고 가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만지는 솜씨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글에 생기가 부족하다는 점이 흠이었다. 김지영씨의 시에서 두드러진 것은 현실 묘사 능력이었다. 다만 완성도에서 "이거다!"하고 내세울 수 있는 한 편이 보이지 않았다.

 

홍담휘씨와 손연후씨의 작품들을 놓고 장시간 논의가 있었다.

 

홍담휘씨의 '젠가'는 젠가 게임을 통해 일상과 가족, 현대성의 문제, 지구온난화까지를 유머러스하고도 시니컬하게 담아내는 능력이 돋보였다. "마스크 쓴 계절도 빙하가 녹는 북극까지도 쌓아야 하는데/ 밤하늘이 하나둘 별빛을 빼내고 있었죠"를 비롯한 빼어난 표현이 촘촘히 박혀 있다. 이 작품만으로 본다면 당선작으로 뽑아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투고한 다른 시편들의 질적 균질감이 편차가 있었다.

 

손연후씨의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를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이 시에서 유독 강조되는 '노랑'은 삶의 어둠과 우울을 들어 올리는 힘이다. 우리는 "노란색 상자 안에 털실 뭉치 좋아하는" 감자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기른다. 놀라운 건 감자와 교감을 하면서 마침내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 "노란색 상자 안에서/ 우리() 털실 뭉치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게 된다"는 것이다. 서두와 종결부의 아름다운 대응을 보라.

 

그건 '감자'의 무늬에서 번지고 성장하는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유리잔과 식탁보 넥타이 구두에도" 산다. 그 사랑의 힘이 "눅눅해진 하루를 보글보글 휘저으며" 그때마다 "볼을 삐죽 부풀린 거품들이 퐁퐁 터진다." 이 당찬 신인은 자기만의 스타일로 경쾌한 시어와 발랄한 상상력을 구사한다. 이 싱싱한 능력은 이 신인의 미래의 가능성을 예고한다. 동봉한 '여름의 아이들을 아세요'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아깝게 당선에서 밀려난 홍담휘씨에게도 힘찬 응원을 보낸다.

 

심사위원 손진은 시인·안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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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모자를 선물할게요 / 신영배



그 끝에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혼자
그 옆에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밟힌,
여린 껍질을 가지고 있던 것
그 위에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수풀 속에 숨은 소녀
소녀의 눈동자 앞에
끌려가다 벗겨진 신발이
다른 세상에 놓이고
한쪽은 신발을 찾을 수 없는 꿈속
그 속에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슬픈 맨발 위에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그녀들은 달려와 나의 시들을 헤치죠
가져갈 것 하나 없다고 투덜거리죠
나는 시-옷을 입고 있어요
걸칠 것, 그거라도 가져가야겠다고
그녀들은 내 옷을 다 벗겨 가죠
물모자
그 옷에 딱 어울리는
이 물모자요
나는 그녀들에게 달려가요

시-옷은 걸쳐도 알몸이에요
그녀들은 울어요
우는 알몸 위에 물모자
선물할게요
나도 울어요
수로에 알몸으로 처박혔던 그녀와
폭우 야산에서 알몸으로 흘러내렸던 그녀와
화면에 뜨고 돌아다니는 알몸과
버려지고 어두워지는 알몸과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당신이 도는 길목에서
파도가 칠 거예요
노래처럼요
문 뒤엔 꽃과 바다를 놓을게요
물모자를 쓰고 문을 여세요
바람은 물모자 속에서 잠잠 해요
뒤집히지 않는 단어를 하나 가지세요
연주를 해야 하는데 손가락들이 사라진 밤이 있어요
달빛 위에 살짝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건반 위에서 흰 달을 쳐요

시-옷을 입은 내가
시-옷에게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혼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암이 재발할지 몰라요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달밤엔 달을 따라 움직여요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당신은 한창 시도 씹어 먹을 나이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나를 따라온 길고양이 내가 따라간 길고양이
길을 물로 바꾸고 나는 물고양이
강가에서 탁 꼬리를 세워요

예쁘장한 단어도 하나 가져요
지금은 물모자를 쓰는 계절인걸요

 

 

 

 

물모자를 선물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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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공모전에 당선된 작가께서 출간한 시집을 소개합니다.

 

 

 

[수상소감] "焦土 위에서 쓰는 시를 생각하겠습니다"

 

수상 소식을 듣고 작은 시집을 안아주었습니다. '물모자를 선물할게요'는 소시집으로 기획된 정말 작은 시집입니다. 그 작은 시집에 큰 상이 주어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시집을 어디에 놓아두었는지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찾았고 안아주었습니다.

작은 시집을 쓰며 작은 발을 생각했습니다. 시집에 작은 발이 달려서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어딘가에 닿을 수 있다면, 아마도 아픈 누군가일 것이며 따듯함이 필요한 어디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발은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시집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시집을 쓸쓸한 곳에 놓아두었습니다. 누군가 나앉은 길가나 부서진 계단 위, 누군가 실종된 지하도나 야산, 혼자 쓰러진 바닷가나 그 의자 위…… 시를 쓰는 제 방의 지도였습니다. 그 지도를 펼치고 시집을 옮겨달라고 주문을 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 시들이 몇 개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시집을 어디에 놓아두었는지 잊고 있었습니다. 시집을 옮겨야 하는데, 시를 써야만 할 수 있는 그 일인데, 저는 어둠 속에 막막하게 서 있었습니다. 이 상의 소식은 누군가 그 작은 시집을 살짝 옮겨주었다는 소식 같았습니다. 시를 향한 마음들이 모아준 격려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 상을 받고 제 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구상 시인은 표현 기교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기어(綺語)라고 하여 경계하였습니다. 이 상이 저에게 짚어주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물을 들여다보듯 그 지점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막막한 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초토, 불에 타서 검게 그을린 땅입니다. 구상 시인의 '초토(焦土)의 시'는 1950년대 전쟁으로 인한 암울한 세상을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마주한 세상도 그 초토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상의 무게와 함께 이 초토 위에서 쓰는 시를 생각하겠습니다.

 

 

 

물안경 달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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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견고한 현실 탐색 풍부한 암시와 의미 몽환적 은유로 빛나"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열 분의 시집 중 김현의 '호시절'(창비, 2020), 신영배의 '물모자를 선물할게요'(현대문학, 2020), 유병록의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창비, 2020), 유계영의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문학동네, 2019) 등을 최종 후보작으로 지명했다. 이 시집들이 높은 시적 성취와 더불어 저마다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긴 논의 끝에 신영배 시인의 '물모자를 선물할게요'를 제4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다만 유병록 시인이 보여준 고통의 핍진성이나 김현 시인의 거침없고 발랄한 상상력도 문학상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져 아쉬움을 남겼다. 두 시인의 수상을 다음으로 미룬 것은 수상자와 견줘서 상대적으로 젊고 미래에 더 큰 상을 받을 기회가 있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신영배 시인의 시는 고립과 고독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독자적인 계보를 빚는데,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높고 깊은 상상력이 빚어낸 몽환적인 은유로 빛난다. 시의 화자(話者)는 물모자를 쓰고 거울을 보고, 커피를 내리고, 물구나무를 선다. 누군가 달빛으로 의자를 만들면 강물이 의자 속으로 들어간다. 원피스를 입고 왈츠를 추던 소녀들은 나무속으로 들어가거나 장미에 빠진다. 그 마술적 리얼리즘의 원천은 멀고 아득해서 짐작조차 어렵다. 시인이 펼치는 '물모자의 세계'는 물모자를 쓰고(혹은 썼다고) 상상하는 세계일 뿐만 아니라 결국 '찾을 수 없는 시집' '빗물과 흐르는 시집' '노을보다 멀리 가는 시집'을 찾아가는 고독한 여로에 귀속되는 것이다. 물모자의 세계는 현상 세계의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는 문턱에 걸쳐져 있다.

'사이'의 공간은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 심판과 결정이 유예되는 곳, 내일도 아니고 어제도 아닌 곳이다. 시인은 그 '사이'에서 물모자를 쓰고 물구두를 신고 이동하는 뮤즈들을 관찰한다. 세계의 바깥 그 어딘가 있는 세계 혹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세계. 그곳에선 부재하는 현실에 한 줌의 환상을 뒤섞어 빚는 몽상과 은유가 부풀고, 천진하고 사악한 동화가 펼쳐진다. 그곳도 암이 재발하고 약한 자가 짓밟힌다는 점에서 현실의 고통과 그늘을 반영하는 듯하다. 신영배 시인의 수수께끼 같은 상상력이 빚는 물모자를 쓰고 움직이는 뮤즈들에 탐색과 관찰이 현실에 대한 풍부한 암시와 의미를 머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의 무게를 견딜 만큼 충분히 깊고 견고하다고 판단해 제4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심사위원 안도현, 장석주, 엄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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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에 관한 연구 / 하재연


초가 완전히 녹아버린 후 촛불의 빛은 어떻게 되는지
일요일의 흰빛이 월요일 쪽으로 사라져갈 때

빛이 사라진 지구가 혼자 돌고 있는 밤을 생각한다.
지구는 그때부터 처음의 방식으로 고독해지겠지.
굿바이,
하고 인간들에게 인사를 하고
정말로 우주적인 회전을 하게 될 것이다.

빛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묻지 않고
빛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연구하는 사람을
사랑한 적이 있다.
그도 빛과 함께 사라져서,
우주적인 안녕을 해야만 했고

나는 다시
먼지처럼
이곳저곳에 묻어 있다가,
쓱 닦이곤 했다.

흘러넘쳤던 빛의 입자들은
공중으로 높이 올라가다 생각난 듯 한 번 반짝였다.

그러고 나서는
영원히 보이지 않는 음이 되어
세계의 투명한 공기를 짙게 한다.

*"초가 완전히 녹아버린 후에 촛불이 어떻게 되는지"―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우주적인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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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간곡한 이들이 함께 한다고 소리내 불러줘 고맙습니다"

 

눈의 여왕에게 매혹되어 얼음 궁전에 갇힌 소년 카이는, 얼음 조각들을 맞추어 하나의 단어를 완성하면 풀려날 것을 약속 받습니다. 단어가 완성됨과 동시에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였습니다. 그러나 카이는 한 마디 단어를 맞추어 내는 데 계속해서 실패합니다. 소년이 절대로 완성할 수 없었던 하나의 낱말은, '영원'이었습니다.

북극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정말이지, 추웠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웠습니다. 살아 있음의 불가능성이 얼음송곳처럼 파고 들어와, 간곡하게 삶을 떠올리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곳이었습니다. 눈 폭풍으로 인해 시야와 방향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백맹(白盲)이 되어 버리는 북극에서는, 새들도 하늘과 땅을 구분하지 못해 지상으로 곤두박질친다고 합니다.

시를 쓰는 어떤 밤들이, 눈의 여왕에게 붙잡혀 결코 완성할 수 없는 낱말을 맞추기 위해 애쓰고 있는 시간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쓰고 있는 시들은 곤두박질친 새의 날갯짓처럼, 방향을 잃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수상 소식에 잠시 눈 폭풍이 잦습니다. 건너편에서 따뜻한 불빛이 비추고 사람의 다정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혼자 애쓰고 있는 게 아니라, 간곡한 이들이 함께하고 있는 거라고, 소리 내어 이름을 불러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시가 홀로 곤두박질치지 않게 같이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세차게 앞을 가로막는 눈 병정들을 헤치고 나아간 소녀의 씩씩한 발걸음이 잊히지 않습니다. 다시 사방이 막막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때,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에서부터 영원을 살라고 한 구상 시인의 시를 떠올리겠습니다.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진 어느 산골짝 옹달샘 물 한 방울에 닿은 시인의 눈길과,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연대를 기억하겠습니다.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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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사라짐·어긋남에 대한 우주적 감각, 성찰의 시선 열어줘"

 

예심을 거쳐 올라온 등단 10~20년차 시인들의 시집 10권은 다채롭고 풍요로운 상상력,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의 시선을 보여주는 좋은 시집들이었다. 독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시를 읽는 설렘과 기쁨에 흠뻑 빠져들었음을 새삼 고백해야겠다.

좋은 시집이 많았던 만큼 심사 과정은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본심에서 집중적인 논의의 대상이 된 시집은 네 권이었다.

각자 개성이 다르고 이미 탁월한 경지에 오른 시집들 중에서 단 한 권의 시집을 수상작으로 고르는 일은 즐겁다기보다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신동옥의 '밤이 계속될 거야'는 짧은 시가 보여주는 밀도와 긴 시가 보여주는 유려한 문체와 진중한 사유가 균형을 이룬 시집이다. 삶의 체험이 녹아 있는 자리가 특히 매력적이었고 사회적 상상력으로 확장되는 시선에서 깊이가 느껴졌다.

임경섭의 '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이야기와 스타일이 매력적인 시집이다. 시에서 서사를 활용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큰 줄기의 서사에서 묘하게 다른 감각으로 포착한 소소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가 매력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정다운의 '파헤치기 쉬운 삶'은 강렬한 정동을 내뿜고 있다. 일상에 만연한 허위와 폭력과 위선을 거침없이 폭로하고 파헤침으로써 당혹스러움이 매혹으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하게 해 준다.

하재연의 '우주적인 안녕'은 사라짐과 어긋나는 시간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열어가며 우주적으로 확장해, 인간을 성찰하는 개성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이 땅에서의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고 나아간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우주적 상상력과 우주적 시선이 인간 존재에 대한 새로운 감각과 성찰의 시선을 열어주고 있었다.

세 명의 심사위원이 두 시간 가까이 심사숙고한 끝에, 첫 시집부터 지속적으로 우리 시의 새로운 감각을 예민하게 확장하며 개성적인 시세계를 구축해 온 하재연의 세 번째 시집 '우주적인 안녕'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두 개의 영혼 사이에서 부서지는 인간의 마음'을 겪은 시의 주체가 '희미한 빛'(화성의 공전)을 찾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하재연 시인에게 축하의 말을 건넨다.

 

심사위원 최정례,조재룡,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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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聖) 토요일 밤의 세마포 / 정한아

 

여기 구겨진 울음이 찍혀 있으니
자기 멱살을 잡고 자기를 물 밖으로 끌어내는 사람처럼
끝내 그는 자기 밖으로 새어나갈 수 있을까

아직도 그는 고백이 부끄럽고
고백이 부끄럽다는 이 고백이 누가 될까봐
빨간 얼굴 속에 눈 코 입을 묻어놓고
그는 또 묻는다
물음을 벗어나는 일의 가능성과 의미에 관하여
그의 질문과 상관없이 그의 무덤 안에 떠도는 저 먼지 하나하나까지도
남김없이 등록되는 오늘의 치밀함에 관하여

지금은 작성되고 싶지 않아
실현된 계시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아
답을 바라서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 빨간 망설임 때문에

비로소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소란한
귀먹을 듯한 적요 속에서

끝내 그는 그를 자기 질문에 답으로 내어놓을 수 있을까
그의 얼굴이 그의 입에 먹히기 전에
고백하자면
고백이 그를 그 아닌 것으로 붙박아 놓을까봐
통성(通聲)으로 증언으로 누가 될까봐

먼지는 사람이 되고 사람은 다시 흙이 되지만
아무도 그 전 과정을 지켜볼 수 없으니
그래서 불러보는
과학자, 시인, 하느님
존경해마지않는
나이가 무지하게 많으신 분들이여

될 수 있으면 그의
수치와 졸렬은 무시하시고
그의 빨간 얼굴에서
그의 골격과 날마다 쇄신하는 죄악의 대략과
그의 영혼의 방사성 동위원소와 탁도(濁度)와
찌그러진 눈 코 입의 윤곽을 어서 발본해내소서

거기 누가 구긴 울음이 음화(陰畵)로 찍혀 있다
자기를 용의선상에서 제외하지 않으려고
그는 밤새 자기 지문을 외고 있으나

아무래도 낯선 소용돌이여!
이 정황의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자기도 모르게 신비는 어떻게 유출되는가
이제 곧 성사(聖事)가 시작된다

 

 

 

 

 

울프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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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구상 선생 詩에 담긴 ‘비극 아는 자의 명랑’ 기억할 것”

 

크리스마스이브에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크리스마스라고 특별할 건 없었습니다. 학생들의 성적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수상 소감을 쓰는 이 시각에도 그것이 끝나지를 않았지요. 성적 처리 마감 전날인 오늘, 성탄절 아침에 “오늘 안에 보고서를 내지 못하면 한 학기 수업이 도루묵이 된다”는 협박 문자를 적지 않은 학생들에게 보내야만 했습니다.

저도 그런 연락을 받은 일이 있었거든요. 쓴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압도되어서 시작도 못 하고 긴장성 두통으로 목이 뻣뻣해진 상태로 불가피하게 포기하게 되기를 기다리다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전화를 받은 적이 말입니다. 마음은 동물인데 몸이 식물적으로다가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저는, 실은 그런 일이 아주 많았습니다.

어제 받은 수상 소식이 어째서 가장 두려운 그런 마감 독촉과 비슷하게 여겨진 것일까요. 저는 상을 받게 되었는데 말입니다. 돌아보면 그런 독촉 전화들은 결국 아주 다행스럽고 고마웠지요. 당근을 받았는데 채찍을 맞은 듯 구는 것은 겸허하지 못한 일입니다.

심사위원 여러분과 제 부끄러운 시를 읽어주신 모든 독자 여러분, 쓰러진 당나귀를 때려준 모든 채찍들에 감사합니다. 시 따위와 담 쌓고 살지만 마음에 시의 씨앗을 품고 있는 훨씬 많은 분들께도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구상 선생님의 영원에 대한 희구와, 지상에 대한 연민과, 무엇보다 그분이 시에 구구절절 남겨놓으신, 비극을 아는 자의 명랑을 잊지 않겠습니다.

 

 

 

 

어른스런 입맞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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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자본주의의 문제 제기…현실과 진실의 極點 향해 폭주”

 

올해 2회를 맞이하는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본심은 2016년 12월부터 2018년 11월 사이에 출간된 7권의 시집을 대상으로 하였다. 등단 10년에서 20년 차에 이르는 중진 시인들의 시집은 현재 한국 시단의 흐름을 압축해 놓은 듯 다채로운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어 시 읽기의 즐거움을 흠뻑 느낄 수 있게 했다.

이 즐거움은 심의 과정에서는 곤혹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수상작으로 부족함이 없는 탁월한 시집들이 많아 선택의 괴로움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한아의 두 번째 시집 ‘울프 노트’를 구상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기에는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것에 대한 탐구 혹은 탐닉, 감각과 감정에 대한 과도한 집중, 내적 필연성이 부족한 시적 기획 등 최근 시단의 우려스러운 현상에 대한 반발이 일부 작용하기도 했다.

정한아의 ‘울프 노트’는 사회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묵직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제기하면서도 새로운 시적 장치와 발화 형식을 가동하고 있다. 텍스트들의 풍부한 상호성이 새로운 목소리와 스타일을 만들어 내고 있고, 놀이와 사유가 어우러져 있으며, 그 저변에는 한국사회의 추악한 ‘죄’들을 해부하는 예리한 메스가 감추어져 있다.

특히 ‘울프씨’ 연작은 독특한 캐릭터와 극적 양식을 채택해 단순한 실험성을 넘어 시적이며 정치적인, 더불어 시적이어서 정치적인 시의 탁월한 예를 성취하고 있다.

이 시집은 폭발하는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다는 듯 현실과 진실의 극점(極點)들을 향해 폭주하면서도 아주 서정적인 일도 동시에 하고 있다. 김수영의 요소가 섞여들어 있는가 하면, 누구의 독자도 제자도 공조자도 아닌 ‘시인 정한아’의 단독 시적 투쟁이 철저히 관철되면서 독보적인 시세계가 구축되고 있다.

부서지고 썩은 현실의 지옥에서 정한아가 빚어내는 시들이 “녹슬지 않고 구부러지지 않는 강철”(‘대장장이의 아내’)의 시로 계속 연단되기를 빌며, 정한아 시인에게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장석남, 나희덕, 김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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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이라는 약 / 오은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라면

지하철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바지에 커피를 쏟지 않았더라면

승강기 문을 급하게 닫지 않았더라면

 

내가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채우기보다 비우기를 좋아했다면

대화보다 침묵을 좋아했다면

국어사전보다 그림책을 좋아했다면

새벽보다 아침을 좋아했다면

 

무작정 외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날 그 시각 거기에 있지 않았다면

너를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 말을 끝끝내 꺼내지 않았더라면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닦아주는 데 익숙했다면

뒤를 돌아보는 것보다 앞을 내다보는 데 능숙했다면

만약으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하루하루를 열고 닫지 않았다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햇빛이 들고

바람이 불고

읽다 만 책이 내 옆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만약 내가

어젯밤에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유에서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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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공모전에 당선된 작가께서 출간한 시집을 소개합니다.

 

 

 

[심사평] 평범한 일상 시인의 감각으로 재구성해 실증적 담론 구현

 

올해 처음으로 구상 시인의 문학세계를 기리기 위해 제정한 구상詩문학상의 본심에 오른 다섯 분 시인의 시집을 다시 촘촘하게 읽어보는 시간은 지금 우리 시단의 허리쯤 되는 현재를 살펴보는 일이기도 했다. 등단 10년에서 20년 사이에 있는 비교적 젊은 시인들의 시를 본상 후보로 추천하고 선정한다는 의미 있는 기준에 걸맞은 시인들이 본심에 올랐다.

본심에 오른 다섯 분 시인의 시집은 김미령의 ‘파도의 새로운 양상’, 김이듬의 ‘표류하는 흑발’, 박성우의 ‘웃는 연습’, 오은의 ‘유에서 유’, 이근화의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이다. 모두 다양한 상상력과 함께 자기만의 확고한 시세계와 시적 화법을 가지고 있는 시인들로 한두 시인으로 쉽게 압축되지 않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오랜 논의 끝에 오은의 시집 ‘유에서 유’를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이근화의 시를 이제는 더 이상 낯선 화법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담백하고 절제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뜨거운 감정들이 내재되어 있다. 일상적이되 일상을 넘어서는 시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언어 감각이 한층 심화되었다. 김이듬의 시는 여전히 거침없고 도발적이고 약간은 위악적이지만 다정하고 따뜻한 출렁임이 생겨났다. 어떤 시적인 제스처도 없으며 단호하지만 보다 유연해졌고 이 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 “사람의 꿈은 한층 더 사람으로 살다 죽는 것”이어서 자신과의 싸움을, 언어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고 더 치열하게 밀고 나가리라 기대된다.

오은은 무엇보다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확고한 시인이다. 역동적 상상력과 재기발랄한 말놀이라고도 볼 수 있는 언어감각은 평범한 일상을 시적 사건으로 미끈하게 재구성해 내며 언어에 대한 실증적인 담론을 시로서 구현해내는 부단한 작업을 실행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지적인 언어의 사유를 넘어서는 자기점검이 필요한 시기가 오지 않았나 싶다.

대중적 언어가 아님에도 독자들의 호응이 적지 않고 독특한 시법으로 주목 받고 있는 패기 있는 시인 오은을 첫 회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 중 하나는 앞으로 구상詩문학상의 개성과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상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송찬호, 조용미, 홍정선

 

 

 

 

호텔 타셀의 돼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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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구상詩문학상 시상식과 2018년 영남일보 문학상 시상식이 12일 오후 5시 영남일보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시상식에는 이하석 구상詩문학상 운영위원장을 비롯해 류형우 대구예총 회장과 박방희 대구문인협회 회장, 김용락 한국작가회의 대구경북지회장, 고(故) 구상 선생님의 딸인 구자명 소설가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시상식은 축사·경과보고·심사평·수상작 시낭송과 수상자 소감·시상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손인락 영남일보 사장은 인사말에서 “구상詩문학상 본상 수상자와 두 분 신인 작가가 앞으로 한국 문단에서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지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다”며 “오늘을 시작으로 더욱 묵묵히 문학의 길로 정진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하석 구상詩문학상 운영위원장은 “구상 시인과 관계가 깊은 대구에서 이런 시상식을 열게 된 점은 매우 뜻깊다”며 “앞으로 해가 거듭될수록 구상詩문학상이 한국 문학계에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제1회 구상詩문학상 본상은 오은 시인이 수상했다. 오은 시인은 “시는 혼자 쓰는 것이지만, 함께라는 감각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며 “1회 수상자라는 무게가 제 문학의 다음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영남일보 문학상은 이서연씨(시)·임채묵씨(소설)가 각각 수상했다. 시 부문 수상자인 이씨는 “뜻밖의 수상 소식에 함께 기뻐해 주고 오랜 시간 함께 소리 내어 책을 읽어 준 친구들과 늘 곁에서 사랑과 격려를 건네는 가족들께 감사하다”고 했다. 소설 부문 수상자인 임씨는 “첫걸음을 뗄 수 있게 도와준 모든 분께 감사하고,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는 글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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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감 / 설현민

 

 

새벽 물때다 사촌들과 바지락을 캐러간다 이모를 도와야 했다 엄마, 엄마, 나는 한 번도 이모를 본 적 없는데요 가족이잖니 단숨에 알아차릴 거다

 

모래사장은 구덩이로 가득하다

저 안에서 움직이는 게 보이니 저기 너희 이모가 있잖아 움직이는 게 너무 많은걸요 네 이모처럼 움직이는 것은 하나뿐이란다

등을 돌려 앉은 엄마는 쇠갈쾡이로 발 밑을 푹푹 퍼올린다

 

나는 양동이를 끌어안고 움푹한 바닥을 들여다본다

모래 속에는 모래가 들어 있다

 

어린 사촌들은 껍데기를 손에 쥐고 땅을 헤집는다 또 다른 껍데기를 주워 자랑한다

 

바지락을 얼마나 더 캐야 하나요 노인들의 배를 채우기에는 아직 모자라구나

이모는 왜 그렇게 깊이 파들어 가죠 깊은 곳엔 먹을 게 없잖아요

네가 그렇게 태어났지 모래를 툭툭 털고 너를 꺼냈단다

 

바지락이 쌓여간다

나는 그것을 씻어 다른 양동이에 옮겨 담는다 빈 껍질을 골라낸다

아이들은 조개껍데기를 묻어 성호를 긋고

 

너는 어쩌면 이렇게도 다 커버렸구나 이젠 무엇도 몰라보겠구나

 

검은 천으로 양동이를 덮는다

내 입안에 서걱거리는 것이 들어있다

나는 이모가 엄마를 닮았다고 말했다 이모는 엄마보다 많이 늙어 있었다고

 

저기 모래를 뱉고 있는 것이 있다

나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당선소감] "내 詩가 실없는 농담 돼 사람들이 덜 아프길…"

 

어릴 적 할머니의 세탁기에는 정말 많은 것이 들어 있었어요. 세탁기에 포도를 넣어뒀단다. 세탁기에 식혜가 있단다. 말을 이리저리 뒤섞은 할머니가 씻어놓은 것들이 좋아서 꺼내 먹으라는 목소리만 기다렸어요. 헷갈리는 말들의 마음은 언제나 마음에 듭니다.

잘 웃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제 시가 실없는 농담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햇살처럼 다정한 웃음을 나누는 사람들과 자주 함께할 수 있기를. 각자의 자리에서 시를 읽고 쓰는 모든 사람들이 조금 더 즐거워지기를. 조금 덜 아프기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씰룩거리는 입꼬리처럼, 마중을 나온 마음으로 함께 읽고 써 내려가겠습니다. 이곳에서 무얼 기다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웃게 될 일이 생기면 같이 웃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비밀인데…로 시작한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비밀을 의심해야 한다고 엄숙한 척 말하면서 크게 기뻐했어요. 미소를 갑자기 삼킨 어머니는 사람의 일은 모르니 정말 조심해라, 속지 말거라, 수고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정말 보이스피싱이 문제입니다. 동생은 오? 축하, 하고 말았어요. 사랑스러운 가족들이 열심히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파괴와 재생을 반복하는 학예회 동인들, 매번 다음에 만나자는 이야기만 해도 여전한 너희 덕에 문학하는 게 여전히 재밌어. 이따금씩 전화를 걸어와 안부를 확인해 주는 속 깊은 고향 친구들, 늘 그 자리에 잘 있어줘서 고맙다. 서로의 문장을 부대끼면서 응원을 아끼지 않던 친구들, 동기들, 학우님들, 원우님들에게 따뜻한 문장을 전합니다. 감사해요. 멋진 나의 선생님들께는 커다란 마음을 꽁꽁 뭉쳐 보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가 아닌 마음까지 탈탈 털어내 읽어주는 사람에게 빛나는 사랑을 전해요. 기꺼이 손 내밀어 준 모든 분들이 어딘가로 돌아가는 동안, 마을 앞에서 오래도록 손을 흔들고 있겠습니다. 건강하게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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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자신의 존재성 확인, 고백의 언어로 풀어내"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열세 분의 응모작 중 실험적인 작품이나 형식의 파격을 보이는 작품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대상을 관조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특성을 보여서 서정의 밀도와 품격을 유지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개별 작품에서 맞춤법에 어긋난 어구의 사용이 꽤 많이 눈에 띄었는데, 시도 한글 문장의 규범 안에서 창작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점은 조심해야 할 것이다.

세 분의 작품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고래가 그래'는 응모 작품 중 드물게 생태학적 사유를 동원하고 있어서 문제의식의 진지함이 주목을 받았다. 고래 내장에 축적된 폐기물로 생태계의 위기를 표현한 착상은 새로웠지만 그 주제가 시적인 언어로 유연하게 형상화되지는 못하였다. '우리 집은 기상청 지부'는 아버지의 삶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면서 그사이에 연민의 정서를 적절히 병치하는 솜씨를 보였고, 감정을 절제하고 대상과의 거리를 조절하면서 삶의 내력을 표현한 점도 뛰어났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후'의 의미가 모호해서 공감의 폭을 확장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리빙 포인트' 외 2편을 투고한 분의 작품 중에서는 '리빙 포인트'보다 '해감'에 더 눈길이 갔다. '리빙 포인트'가 일상적 삶의 무료함을 다양한 형상의 교차를 통해 새롭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 다양함이 시상의 집중을 방해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해 '해감'은 어릴 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평범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하는 과정을 고백의 언어로 자연스럽게 풀어가고 있어서 그의 시적 재능이 앞으로 더 발전하리라는 예감을 받았다. 이에 '해감'을 당선작으로 밀며 축하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강은교, 이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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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노 사피엔스 / 금희숙

 

유모차는 미리 늙어갑니다

똑같은 장난감을 만지면 계속 넘어지고

인공위성의 속도로 걸음마를 배워야 하는데요

반짝거리는 액정을 젖병처럼 빨면

손바닥만큼 엄마가 웃고 있어요

터치로 선생님을 밀어내고

클릭으로 친구를 선물하고

종소리는 아무래도 허용하지 않아요

아무리 껴안아도 따뜻해지지 않는 방

매일 손잡이를 돌려도 나를 찾을 수 없어요

불안은 얼마나 뚱뚱해지는지

모자를 벗어도 표정은 똑같습니다

우리는 날개 없이도 새가 되고

오늘보다 더 빨리 오늘이 쓰러집니다

울음은 턱받이에서 말라가고

눈동자는 쉽게 예민해집니다

손톱이 자라는 속도를 믿지마세요

여전히 풍선은 위험하니까요

이제 옹알이는 퇴화하고

우리는 기계보다 먼저 완벽합니다

 

 

 

[당선소감] "천천히 행복해지는 일, 오늘을 즐기겠습니다"

 

뜻밖의 전화는 이런 것이었다. 똑같은 하루, 단지 오늘이 크리스마스 라는 것 외에는 라디오 채널을 바꾸지 않듯 일상은 그대로였다. 늦은 김장을 준비했다. 배추에 속을 채우고 허리가 아플 즈음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덤덤하게 전화를 했다. 축하합니다. … 그 다음 대화는 뒤죽박죽 그저 놀라고 고마웠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을 되풀이했던 질문, 진정으로 나에게 흥분된 적 있었던가! 갈수록 높아지고 어두워지는 간격 그리고 터널 같은 절벽 앞에서 아찔했던 갈등과 혼란을 번복했다. 웃는 일이 계단처럼 힘들었다. 언제부터인지 하루가 지치고 분명 걷고 있었는데 뒤돌아보면 다시 어제였다. 한 발을 내디디면 두 걸음 뒷걸음질 치고 숨 가쁘게 넘겨도 제자리걸음이었다. 종종거리는 나를 거울처럼 마주했다. 자꾸 무엇인가를 까먹고 놓치는 일이 많아졌다. 나는 잘살고 있는 것인가? 매일 묻고 또 물었다. 시작했으니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약속이 나를 점점 지치게 했다. 그 무렵, 도서관에서 아기들에게 정기적으로 책을 읽어주는 봉사를 시작했다. 전공과 무관한 직장을 다녔고, 내 아이들에게 못 해줬던 미안함에 시작한 책놀이 활동. 봉사하는 동안 포노 사피엔스를 자주 마주쳤다. 앞서가야 인정받는 현실 앞에서 걱정과 함께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끈이 되어 준 문전성시 동아리, 시의 공간을 안내해 준 임정일 선생님, 그리고 안방 같은 곰시 동인, 한결같은 달숨 가족, 좋은 시를 쓰라고 조언을 해주신 김산 시인님, 중대 문예창작전문가 과정 지도 교수님과 문우님, 모두 고마운 나의 스승이자 은인이다. 마지막으로 글을 쓴다고 집안일에 소홀해도 묵묵히 기다려준 사랑하는 남편과 듬직한 아들, 고마운 딸에게 오늘의 선물을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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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변화해 가는 신인류의 모습 경쾌하게 표현"

 

본심에 올라온 열두 분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의 시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개인의 고독과 상처, 상실과 죽음이야 시의 오랜 주제이지만, 올해 투고작들에서는 유난히 어떤 활력이나 전망을 찾을 수 없는 답답한 현실의 무게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런 안타까움 속에서 마지막까지 숙고의 대상이 된 시들은 '어떤 계단' '테트리스' '수중기도' '포노 사피엔스' 등이었다. 그 중 두 작품을 놓고 장단점을 비교하며 좀 더 토론이 이어졌다.

'어떤 계단' 외 2편은 대상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집중력이 돋보였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선명하게 전달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그의 시들은 안전해 보이는 계단이 감추고 있는 위험이나 지방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을 묘사함으로써 문명의 그림자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그러나 타당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설명적이거나 동어반복이 많고 시어가 산만하다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밀기에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포노 사피엔스' 외 2편은 간결한 언어의 배치와 행간의 여백을 통해 시적 함축성은 높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그의 시들은 서정적인 톤을 유지하면서도 스마트폰에 의해 변화해가는 신인류의 모습이나 현대인의 단절된 관계와 불안의 심리를 경쾌하고 리드미컬하게 보여줌으로써 자기만의 '명랑한 우울'을 창조해낸다. 다만, 포노 사피엔스에 대한 평면적인 나열을 넘어 좀 더 심층적인 인식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래도 '미안해요 아스피린' '공공 터널' 등 다른 투고작들의 수준이 고른 편이어서 믿음이 갔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나희덕, 홍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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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서진배

 


엄마는 늘 내 몸보다 한 사이즈 큰 옷을 사오시었다

 

내 몸이 자랄 것을 예상하시었다

 

벚꽃이 두 번 피어도 옷 속에서 헛돌던 내 몸을 바라보는

엄마는 얼마나 헐렁했을까

 

접힌 바지는 접힌 채 낡아갔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 이름을 먼저 지으시었다

내가 자랄 것을 예상하여

큰 이름을 지으시었다

 

바람의 심장을 찾아 바람 깊이 손을 넣는 사람의 이름

 

천 개의 보름달이 떠도

이름 속에서 헛도는 내 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에서

까마귀가 날아갔다

 

내 이름은 내가 죽을 때 지어주시면 좋았을 걸요

 

이름대로 살기보다 산 대로 이름을 갖고 싶어요

 

내 이름값으로 맥주를 드시지 그랬어요

 

나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걸요

 

아무리 손을 뻗어도 손이 소매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걸요

이름을 한 번 두 번 접어도 발에 밟혀 넘어지는 걸요

 

한 번도 집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이불처럼 이름이 있다

 

하루 종일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없는 날 저녁이면 나는

이름을 덮고 잠을 잔다

 

뒤척이며 이름은 나를 끌어안고 나는 이름을 끌어안는다

 

잠에 지친 오전

새의 지저귐이 몸의 틈이란 틈에 박혔을 때,

 

이름이 너무 무거워 일어날 수 없을 때,

나는 내 이름을 부른다

 

제발 나 좀 일어나자

 

 

 

 

 

[당선소감] 서진재, 오늘은 당신의 안부를 내가 먼저 묻는다 “어떻게 지내니?”


“어떻게 지내니?” 당신이 안부를 물어오면, 나는 “당신이 내 안부를 물어오는 걸 보면 나는 제법 잘 지내는 듯도 해요.” 대답한다. 내가 당신의 안부를 물으면 당신은 “해질녘 집으로 오르는 계단에 앉아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면 거기 백일홍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붉게 웃는다” 대답한다. 그런 거짓말을 내가 받아쓴다. 당신은 나의 안부를, 나는 당신의 안부를, 당신은 백일홍의 안부를, 백일홍은 당신의 안부를, 나는 백일홍의 안부를 묻는다.

 

당신이 내 몸 안에 담아놓은 사투리를 전부 쏟아내고 서울의 냄새가 나는 언어로 시의 첫 줄을 시작하고 싶었다. 계단 하나를 오르기 위해 몸이 계단처럼 꺾여버리는 당신, 의자의 자세를 가진 당신은 더럽고 낮은 장소 어디에도 앉는다.

 

당신의 안부를 내가 먼저 묻고 싶다 오늘은. 안부를 언제나 당신에게 빼앗겨버리고는 했으니까. 어떻게 지내시는가,   당신. 하지만, 나의 ‘어떻게’와 당신의 ‘어떻게’가 포개져 버린다. 찌찌뽕.

 

당신의 찌찌를 꼬집어 주고 싶다. 요 것, 요 것 때문에 내가 당신의 사투리를 앓습니다. 요 것에서 흘러나온 당신의 사투리를 내가 빨아먹고 자랐습니다.

 

바깥의 안부를 먼저 묻는 당신의 사투리를 받아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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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이름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 담담히 말하는 시선 인상적

 

예심을 거쳐 올라온 예비 시인 17명의 시에서 눈에 띄는 특징을 몇 가지 읽을 수 있었다실험적인 시보다 서정적인 시가 우세했으며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드러내는 시보다 일상을 포착하거나 가족가난 등 서정시의 전통적인 주제를 다룬 시가 많았다비정규직청년 실업성폭력 및 미투 운동 등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여전히 고단하고 뜨거운데오늘의 시가 시대 현실의 문제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최근의 시단에 이슈가 별로 없는 현상이 응모작에도 투영된 듯하다

17명의 작품 중 7명의 작품을 먼저 추렸고그 중에서 비교적 고른 완성도를 보인 3명의 작품을 두고 본격적으로 토론했다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하현’ ‘새가 하는 일’ ‘이름이었다

하현은 달이 차고 이우는 것과 만두를 빚는 한 여자의 노동을 겹쳐 놓는 상상력이 흥미로웠다달을 보며 한 여자의 붉은 생애를 떠올리는 시상의 전개가 설득력이 있기는 했지만 예측 가능하다는 점이 다소 아쉬웠다. ‘새가 하는 일은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 중 가장 새로운 상상력을 보여준 시였다. “나무는 새가 펴는 우산이라는 이미지와 나무에서 새와 매니큐어와 우산으로 이어지는 상상력의 전개가 역동적이었지만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부모의 기대치와 어긋난 자신의 생을 들여다본 이름은 자신의 몸과 헛도는 큰 옷이름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을 담담히 말하는 시선이 인상적이었다자기 상처를 들여다보는 데서 시가 시작되는 것이기는 하지만자신에게로 유전되는 가족의 삶과 상처에서 빠져나와 그로부터 달아나는 상상력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으며 한 번도 집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이름을 호명하기로 했다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미처 호명하지 못한 예비 시인들에게는 꼭 다음을 기약하자는 격려의 말을 전한다눈 밝은 선자가 당신의 시를 호명하는 날이 머잖아 올 것이다.

 

심사위원 이하석, 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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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 / 이서연


빈 방에 남아 빈 방을 닦고 있는 거울처럼
그 집의 벽들은 아직 비에 젖고 있다
현관 앞에 쓰러진 우산이 있고 지붕을 넘어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소리 내어 운다 나는 꽃을 들고 있다

이른 새벽 청소부가 올 때까지
쓰레기봉투처럼 웅크리고 싶은 밤이 있다
자동차가 달리는 8차선 도로를 천천히 가로질러

죽어가는 밤과 죽은 뒤의 밤을
죽은 사람 곁에 앉아 산 사람이 지샌다
삶이 죽음으로 옮겨가는 낮을 지나
죽음이 삶을 전염시키는 밤으로

눈을 감고 있으면 생각 없는 몸이 어딘가로 간다
생각만 남아 몸을 생각한다 

엎어진 화분처럼
방문을 쥐고 있는 젖은 손이 있다
손잡이를 말아 쥔 둥근 손등만 보인다

창문이 없는 방에 바람이 들이쳤다
먹구름과 흰 구름이 방 안을 지나간다
감은 눈 안으로 구름은 어떻게 들어 왔을까?


 

 

[당선소감] 정말 살아보고 싶은 도시로 이어지는 길 조용히 걷는 기분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습니다. 눈을 떠도 주위는 감은 눈 속처럼 어두웠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잠버릇과 함께 낡아가는 익숙한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 덮으며, 죽은 뒤에 관 속에서 혼자 눈을 뜨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땅 속에 묻혔는데 거짓말처럼 문득 정신이 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이불 속에서 손가락과 발가락들을 차례로 움직여 보았습니다. 밤이 오면 잠을 자고, 시간이 지나면 눈을 뜨는 일상이 놀라웠습니다. 매일 밤 누워서 내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챙겨 보는 것은 내일이 다시 저에게 주어질 거라는 믿음입니다. 어째서 저는 단 한 번도 그걸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지, 어떻게 오늘이 지나갈 때마다 다음에 올 아침을 믿는지…. 앞으로 제가 다녀오게 될 누군가의 죽음과 저의 죽음을 다녀갈 사람들을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새벽, 6시 20분에 맞춰진 알람이 울리기 전에 저는 어두운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습니다.

정리한 시편들을 봉투에 넣어 보내고, 며칠 뒤에 가까운 분의 부고를 받았습니다. 뒤늦게 찾아간 그곳에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 했던 얼굴들을 보았습니다. 죽음이 삶을 이어주는 시간이었고, 삶이 죽음을 연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울고, 웃고, 먹고, 마시는 탁자 위에 수저 한 벌처럼 나란히 놓인 저의 죽음을 마주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큰 상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저를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뜻밖의 수상 소식을 함께 기뻐해 줄, 오랜 시간 함께 소리 내어 책을 읽었던 친구들과 늘 곁에서 사랑과 격려를 건네는 가족들께도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몇 몇 도시를 떠돌며 살았습니다. 새로운 도시에서 지낼 때마다 저는 언제나 제가 정말 살아보고 싶은 어떤 한 도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그 도시로 이어지는 길을 조용히 걷고 있는 기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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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언어 몰고가는 힘 놀랍고 삶과 죽음 관계 새로운 인식 이끌어

예심에서 올라온 10명의 작품으로 우리 시단의 변화를 실감했다. 흔히 보아왔던 개인적 발화에 가까운 소통부재의 언술이나 실험이라는 방패 뒤에 숨은 책임방기(責任放棄)의 시편들이 확실히 줄어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신 새로움을 보여주는 시편들보다 익숙함이라는 달갑지 않은 현상이 눈에 띄어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었다. 

두 심사자는 당선권에 든 작품으로 나동하씨의 ‘계단들’과 손명이씨의 ‘전모(全貌)’, 그리고 이서연씨의 ‘조문’을 최종 선정했다. 손명이씨의 작품은 ‘달’이라는 원형상징을 변주하면서 시상을 엮어가는 수법이 눈여겨볼 만했다. 그러나 관념을 구체성에 얹는 데 힘이 부치는 감이 있었다. 나동하씨의 작품은 ‘계단’이라는 대상을 삶의 보편적 국면으로 이어내는 인식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대상을 치열하게 파고드는 힘, 긴밀한 구성력과 치밀한 묘사력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서연씨의 작품은 참신한 비유와 더불어 언어를 몰고 가는 힘이 놀라웠다. 무엇보다 행간을 건너뛰는 경쾌한 어법이 신인의 예기(銳氣)를 느끼게 했다. “죽어가는 밤과 죽은 뒤의 밤을/ 죽은 사람 곁에 앉아 산 사람이 지샌다/ 삶이 죽음으로 옮겨가는 낮을 지나/ 죽음이 삶을 전염시키는 밤으로”와 같은 구절에서 보듯 활달한 어법을 통해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이끌어내고 있다. 구성의 측면에서 안정감을 주고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또 다른 자랑거리다. 

대상에 직핍해 들어가 인식의 상투성을 뒤집어내는 나동하씨의 작품과 감각적이고 개성적인 화법으로 일상 언어의 범박함에서 벗어난 이서연씨의 작품을 두고 논의 끝에, 두 심사자는 신춘문예 당선자에게 요구되는 새로움이라는 덕목에 좀 더 부합된다고 판단되는 이서연씨의 작품 ‘조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신춘문예 당선자의 영광은 단 하루다. 이 작은 성취에 머물지 말고 당선자는 언어의 모험에 기꺼이 몸을 던져 천 년을 버티는 교목이 되길 바란다.

 

심사위원 이학석, 장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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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복 / 김한규

 

 

당신이 하고 있는 무엇

가만히 있게 가만히 두지 않는 시간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 나왔네요

아니면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다 왔습니다.

 

먼지가 부풀며 피에 섞인다 

아스팔트가 헤드라이트를 밀어내기 시작하고 

한 마디를 끝낸 입술이

 

냉동고 속에서 굳는다 

언 것이 쌓이기 시작하자

흔들리던 빈속이 쏟아져 내린다

 

무엇을 하기 위해 당신은

약봉지를 잊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고

가지 말아야 할 곳이 보인다

 

죽은 나무 위에서 늦은 밥을 먹을 때

문은 닫히는 소리를 낸다

 

밝아올 것이라는 말을 지워버린

아침에는 감꽃이 떨어지고

눈물을 말리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을 하고 나면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

끝났습니다.

 

아니면 이런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연락하겠습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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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묵묵히 살아내고 있는 벗들에게 안부 전한다

 

마치 나라를 잃어버린 것 같은 참담함에 젖어 있었다. 차라리 떠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도 없었다. 피하는 것이 능사는 될 수 없고,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저들과 맞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먼 곳으로 가신 어머니가 꿈에 오시곤 했다. 깨고 나면 “제가 잘 살고 있지 못한 거 같아요. 죄송해요”라고 말씀드렸다.

지난 여름, 무지무지한 햇볕과 끝까지 대결했던 노동으로 몸이 자꾸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무엇보다 시를 쓰지 못한 날이어서 더 혹독하게 여겨졌다. 추스르면서 열기가 옅어진 햇살 속에 앉아 있곤 했다. 살고 있는 동네의 천변에는 코스모스가 오랫동안 흔들렸고, 사람들은 억지로라도 힘을 내야 한다는 듯 열심히 걷곤 했다.

역시 참담했던 1980년대의 여러 해를 감옥과 거리를 오가며 살았던 벗들, 그 후에도 어떤 영예나 보상 같은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살아내고 있는 벗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나도 더 힘을 내겠다는 말과 함께. 또 ‘오랜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 전에 부끄러워졌다. 단단해지고 싶다면 더 깨져야 할 것이다.

나보다 더 좌절하면서 견뎌온 아내, 그리고 채영, 승훈에게 다시 쓰겠다고 약속한다. 손을 잡아 일으켜주신 김소연 선생님, 뵈러 가겠습니다. 이기영 시인님, 이제야 갚아드리게 되었네요. ‘진주작가’의 벗들, 계속 버티며 살아남자고요. 이성모 교수님,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정진하겠습니다.

 

 

 

 

[심사평] 평이한 언어로 생의 뒤틀림을 끄집어내다

 

본심에 올라온 시의 독후감은 심사위원들에게 마치 한 사람의 시집을 읽는다는 느낌을 주었다. 느낌과 느낌들이 손쉽게 공유되는 이유는 짐작할 수 있지만 참람하다. 문학의 기술과 기교는 독창성이나 변별성보다 더 높은 가치가 결코 아니다. 그나마 네 사람의 가편을 만난 것은 다행이랄 수 있다.

시 ‘삼각형 누드’는 옷걸이와 옷에 대한 천착이다. “옷을 벗기면 너무 마른 삼각형이 나오”곤 하는 옷걸이라는 상징은 “옷의 속마음을 걸어두”는 곳이다. 그렇다고 ‘옷의 속마음’이 다 걸리는 것은 아니라는 성찰의 안팎에는 옷과 옷걸이의 불화와 화해, 측은함과 격려가 맵씨 있게 걸려 있다. 이후 옷과 옷걸이의 서로를 확장시키면서 “옷걸이의 마음을 닮은 삼각형이/ 옷을 벗으면 내 몸에도 몇 군데는 있다”라는 몸의 윤리학에 도착한다. 가장 아름다운 시를 선택해야 한다면 선자들은 이 시가 아닐까 하고 의견을 모았다.

또 다른 시 ‘답장 사이로’는 서사가 떠받치는 시편이다. 한 계절의 이야기를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펼쳤다면 그 속의 고통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러기에 시는 울림이 크고 높다.

시 ‘5분의 꼬리’는 시간의 비극성을 희극에 기대어 혹은 희곡성에 기대어 진술하고 있다. “약속장소가 5분 먼저 와 있었다./ 내가 늦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5분이라는 시간이 먼저 가 있었다”라는 구절을 본다면 5분이라는 시간은 나를 검색하려는 무의식과 의식의 의도이다. 건조한 5분들은 계속 나를 간섭하고 배반하면서 나를 돌이키게 한다. 독특한 시각이 이채롭다.

당선작인 시 ‘공복’은 “죽은 나무 위에서 늦은 밥을 먹을 때/ 문은 닫히는 소리를 낸다”는 쓸쓸하고 텅 빈 허기라는 감정을 낯설게 묘사한다. 게다가 뒤틀지 않은 평이한 언어로 생의 뒤틀림을 끄집어낸다. 공복이라는 발화는 화자에 의하면 “당신이 하고 있는 무엇”을 “가만히 있게 가만히 두지 않는 시간”이다. 이것은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와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다”의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의 시작이자 재현이다. “밝아올 것이라는 말을 지워버린 아침”과 “할 수밖에 없는 것을 하고” 난 뒤의 망설임들 모두 같은 공복감이다. 그러한 공복감은 자신을 끊임없이 되돌아보는 사람들만이 가지는 개량의 감정이다. 또한 그 공복감은 우리 시에서 드문 서정이기도 하고 단순하되 겹을 가진 문장 역시 쉽사리 발견하기 힘든 재능이다.

심사위원들은 최종적으로 ‘공복’과 ‘5분의 꼬리’ 사이에서 한참 논의를 해야만 했다. 게다가 이 두 분의 나머지 시편들도 고른 수준을 유지했기에, 결정은 힘들었고 결론은 행복했다. 결국 우리 시의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개성이 더 도드라진 ‘공복’을 당선작으로 합의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나머지 세 분의 시적 역량에도 심사위원들이 오래 고민하면서 찬사를 보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심사위원 송재학, 김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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