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이라는 약 / 오은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라면
지하철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바지에 커피를 쏟지 않았더라면
승강기 문을 급하게 닫지 않았더라면
내가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채우기보다 비우기를 좋아했다면
대화보다 침묵을 좋아했다면
국어사전보다 그림책을 좋아했다면
새벽보다 아침을 좋아했다면
무작정 외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날 그 시각 거기에 있지 않았다면
너를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 말을 끝끝내 꺼내지 않았더라면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닦아주는 데 익숙했다면
뒤를 돌아보는 것보다 앞을 내다보는 데 능숙했다면
만약으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하루하루를 열고 닫지 않았다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햇빛이 들고
바람이 불고
읽다 만 책이 내 옆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만약 내가
어젯밤에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본 공모전에 당선된 작가께서 출간한 시집을 소개합니다.
[심사평] 평범한 일상 시인의 감각으로 재구성해 실증적 담론 구현
올해 처음으로 구상 시인의 문학세계를 기리기 위해 제정한 구상詩문학상의 본심에 오른 다섯 분 시인의 시집을 다시 촘촘하게 읽어보는 시간은 지금 우리 시단의 허리쯤 되는 현재를 살펴보는 일이기도 했다. 등단 10년에서 20년 사이에 있는 비교적 젊은 시인들의 시를 본상 후보로 추천하고 선정한다는 의미 있는 기준에 걸맞은 시인들이 본심에 올랐다.
본심에 오른 다섯 분 시인의 시집은 김미령의 ‘파도의 새로운 양상’, 김이듬의 ‘표류하는 흑발’, 박성우의 ‘웃는 연습’, 오은의 ‘유에서 유’, 이근화의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이다. 모두 다양한 상상력과 함께 자기만의 확고한 시세계와 시적 화법을 가지고 있는 시인들로 한두 시인으로 쉽게 압축되지 않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오랜 논의 끝에 오은의 시집 ‘유에서 유’를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이근화의 시를 이제는 더 이상 낯선 화법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담백하고 절제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뜨거운 감정들이 내재되어 있다. 일상적이되 일상을 넘어서는 시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언어 감각이 한층 심화되었다. 김이듬의 시는 여전히 거침없고 도발적이고 약간은 위악적이지만 다정하고 따뜻한 출렁임이 생겨났다. 어떤 시적인 제스처도 없으며 단호하지만 보다 유연해졌고 이 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 “사람의 꿈은 한층 더 사람으로 살다 죽는 것”이어서 자신과의 싸움을, 언어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고 더 치열하게 밀고 나가리라 기대된다.
오은은 무엇보다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확고한 시인이다. 역동적 상상력과 재기발랄한 말놀이라고도 볼 수 있는 언어감각은 평범한 일상을 시적 사건으로 미끈하게 재구성해 내며 언어에 대한 실증적인 담론을 시로서 구현해내는 부단한 작업을 실행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지적인 언어의 사유를 넘어서는 자기점검이 필요한 시기가 오지 않았나 싶다.
대중적 언어가 아님에도 독자들의 호응이 적지 않고 독특한 시법으로 주목 받고 있는 패기 있는 시인 오은을 첫 회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 중 하나는 앞으로 구상詩문학상의 개성과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상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송찬호, 조용미, 홍정선
제1회 구상詩문학상 시상식과 2018년 영남일보 문학상 시상식이 12일 오후 5시 영남일보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시상식에는 이하석 구상詩문학상 운영위원장을 비롯해 류형우 대구예총 회장과 박방희 대구문인협회 회장, 김용락 한국작가회의 대구경북지회장, 고(故) 구상 선생님의 딸인 구자명 소설가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시상식은 축사·경과보고·심사평·수상작 시낭송과 수상자 소감·시상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손인락 영남일보 사장은 인사말에서 “구상詩문학상 본상 수상자와 두 분 신인 작가가 앞으로 한국 문단에서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지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다”며 “오늘을 시작으로 더욱 묵묵히 문학의 길로 정진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하석 구상詩문학상 운영위원장은 “구상 시인과 관계가 깊은 대구에서 이런 시상식을 열게 된 점은 매우 뜻깊다”며 “앞으로 해가 거듭될수록 구상詩문학상이 한국 문학계에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제1회 구상詩문학상 본상은 오은 시인이 수상했다. 오은 시인은 “시는 혼자 쓰는 것이지만, 함께라는 감각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며 “1회 수상자라는 무게가 제 문학의 다음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영남일보 문학상은 이서연씨(시)·임채묵씨(소설)가 각각 수상했다. 시 부문 수상자인 이씨는 “뜻밖의 수상 소식에 함께 기뻐해 주고 오랜 시간 함께 소리 내어 책을 읽어 준 친구들과 늘 곁에서 사랑과 격려를 건네는 가족들께 감사하다”고 했다. 소설 부문 수상자인 임씨는 “첫걸음을 뗄 수 있게 도와준 모든 분께 감사하고,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는 글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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