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15 / 이승희
벽지 속에서 꽃이 지고 있다 여름인데 자꾸만 고개를 떨어트린다 아무도 오지 않아서 그런가 하여 허공에 꽃잎을 만들어주었다 나비도 몇 마리 풀어주었다 그런 밤에도 꽃들의 訃音부음은 계속되었다. 옥수숫대는 여전히 그 사이로 반짝이며 기차는 잘도 달리는데 나는 그렇게 시들어가는 꽃과 살았다 반쯤만 살아서 눈도 반만 뜨고 반쯤만 죽어서 밥도 반만 먹고 햇볕이 환할수록 그늘도 깊어서 나는 혼자서 꽃잎만 피워댔다 앵두가 다 익었을 텐데 앵두의 마음이 자꾸만 번져갈 텐데 없는 당신이 오길 기다려보는데 당신이 없어서 나는 그늘이 될 수 없고 오늘이 있어서 꼭 내일이 만들어지는 것은 어니라는 걸 알게 되어도 부음으로 견디는 날도 있는 법 아욱은 저리 푸르고 부음이 활짝 펴서 아름다운 날도 있다 그러면 부음은 따뜻해질까 그렇게 비로소 썩을 수 있을까
나는 같이 맨발이 되고 싶은 것
맨발이 되어 신발을 가지런히 돌려놓으면
어디든 따뜻한 절벽
여기엔 없는 이름
어제는 없던
구름의 맨살을 만질 수 있지
비로소 나
세상에서의 부재가 되는 일
세상에 없는 나를 만나는 일
이 불편하고 쓸쓸한 증명들로부터
더는 엽서를 받지 않을 거야
이 세상을 모두 배웅해버릴 테니
이건 분명해
견딜 수 없는 세계는 견디지 않아도 된다
창문에 매달린 포스트잇의 흔들림처럼
덧붙이다가 끝난 생에 대하여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그래서 좋은
현대시학은 제4회 전봉건문학상에 이승희 시인의 시집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이 선정됐다고 27일 밝혔다.
전봉건 문학상은 전봉건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5년 현대시학이 제정한 문학상으로, 한 해 동안 발간된 중견 시인들의 시집을 대상으로 한다. 1회에는 김행숙의 “에코의 초상”이, 2회에는 송재학의 “검은색”이, 3회에는 김상미의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가 당선된 바 있다.
이번 수상자인 이승희 시인은 196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1997년 계간 “시와 사람”에 작품을 발표,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이번 수상작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은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와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에 이은 세 번째 시집이다.
심사위원단(문정희/송재학)은 이 시집의 세계는 “사물/사람과 문학이 왜 서로를 필요로 하는가에 대한 연민의 발화”로 시작하며, 사물/사람과 문학 간의 거리에 대한 섬세한 질문과 답변을 담고 있다고 평했다. 또한 이 시집에서 ‘여름’은 시인이 하는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장’이라며, 이것이 “사상은 시가 아니지만, 시는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전봉건 문학”과 연결되는 지점을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
상금은 1천만 원이며, 시상식은 현대시학 50주년 기념식에 맞춰 내년 2월 말에 열릴 예정이다. 일시와 장소는 추후 밝힐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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