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동 블루스 / 유정탁
추석 보너스로
동그라미 여섯 개가 통장에 찍히던 날
기숙사 계단을 오르며 얼빠진 표정으로 히죽 웃던
사내의 술 내음이 코끝에 걸렸다
벽돌담 아래 순대 어묵이 그리운 밤
우리는 무 쟁의 특별 목돈을 묶어둔 채
일찌감치 포장마차로 향하고
그날 밤 총총히 순대를 썰던 아줌마
이렇게 일찍 순대가 다 팔려나간 적 없단다
양정동 밤 물결 깊게 흘러도
공장 굴뚝 연기는 목젖으로 흘러들고
먹빛 공간을 지우며 휘파람을 불었다
봄날 부르짖던 함성
공장 구석구석 붉은 녹처럼 묻어나고
둥글게 영그는 달
오늘 더욱 서글픈 빛으로 흘러드는
감옥의 밤도 있는데
백만 원 목돈이 어루만지는 가슴에 술 붓는 버릇만 늘었다
열적게 도망가던 그날
오지 않은 사람들을 원망하며
훈장처럼 남은 발목의 상처로
스스로 위로하던 여린 가슴아
한번쯤 펜을 세우리라, 매운 다짐 뱉던
내 입술의 짧은 오기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는 건 아니다
스스로 합리화시키던 그 말은 굴복이었다
우리 모두는
보이지 않는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살고 있는 거다
낙서처럼 어눌한 양정동 침묵의 가슴에
고성 방가만 휘갈기고
목돈을 주어도 오늘 밤 우리는 시내로 나갈 줄 몰랐다
[심사평] 삶의 구체를 담는 노동시
노동시라는 선입관 때문일까. 응모된 시들이 한결같이 틀에 얽매여 있다. 노동자로 생각하고 반응하는 것이 각양각색일 터인데 한 색깔로 칠해져 있어, 이런 경우에는 으레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반응해야 한다는 도식이 나와 있다는 느낌을 준다. 결국 노동시가 노동자의 삶의 문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지 못하다는 얘기인데 여기에는 '문학'은 뒤로 제쳐놓고 '목소리'만 담음으로써 노동자의 실상과 구체는 빠뜨리고 관념과 주장만 남겨놓은 80년대 노동문학의 폐해가 크다. 고백하건대 응모된 시를 읽으면서 심사자는 적잖이 지루했다. 그래도 유정탁, 한민자, 이창수, 박금란의 시들은 읽을 만했다.
유정탁의 시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노동시의 전형이다. 좋은 뜻에서는 우리 노동현실에 충실한 내용과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나쁘게 보면 새로운 맛이 전혀 없다. 한결같이 투쟁만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도 시의 맛을 반감시킨다. 지도자연하는 자세는 80년대의 몇몇 영웅시인으로 끝내도 좋지 않을까. 노동자의 삶의 구체를 담지 않고는 노동시가 노동자로부터까지 외면당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시를 전개하고 말을 다루는 솜씨가 매우 능숙한 점은 살 만하지만 노동시가 가진 폐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박금란 씨는 많이 써본 솜씨 같은데 역시 노동시의 단점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 노동시가 노동자와 민주노조에 대한 깊은 사랑과 굳건한 믿음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할 것 같다. 적어도 시에서 갈등과 회의가 동반되지 않는 사랑과 믿음이 어떻게 감동을 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여성다운 섬세한 대목이 군데군데 엿보이면서 시 끝에 맛을 보탠다. 이것이 더 깊어지면 노동시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한민자의 시는 어찌 보면 다른 노동시와는 많이 다르다. 좀 허약한 듯 보이지만 섬세한 감정의 흔들림 같은 것은 잘 포착하고 있다. 그러나 시로서 덜 성숙했고 응모한 시편이 모두 토막시라는 느낌을 주는 흠이 있다. 읽기에 쉬운 것은 좋지만 쓰기도 너무 쉽게 썼다는 느김을 주어 감동도 줄이고 있다는 점,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창수의 시들은 좀 작위적이다. 또 어떤 표현은 너무 낮익어, 동향 선배의 시에 너무 신세지고 있는 것 같다. 진보적인 발상으로 잘못 알고 있는 우리 것, 토착적인 것에 대한 일방적인 경도는 실은 너무 낡아 식상한 것들이 아닌가 싶다. 좀더 자유로운 열린 생각으로 시를 쓰면 더 좋은 시가 써질 것이다. 시에 동원된 말도 더 폭이 넓어져야 할 것이다.
- 심사위원 신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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