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요실금을 앓다 / 안오일
닦아내도 자꾸만 물 흘리는 냉장고
헐거워진 생이 요실금을 앓고 있다
짐짓 모른 체 방치했던 시난고난 푸념들
모종의 반란을 모의 하는가
그녀, 아슬아슬 몸 굴리는 소리
심상치 않다, 자꾸만 엇박자를 내는
그녀의 몸, 긴 터널의 끄트머리에서
슬픔의 온도를 조율하고 있다.
뜨겁게 열받아 속앓이를 하면서도
제 몸 칸칸이 들어찬 열 식구의 투정
적정한 온도로 받아내곤 하던
시간의 통로 어디쯤에서 놓쳐버렸을까
먼 바다 익명으로 떠돌던
등 푸른 고등어의 때
연하디 연한 그녀 분홍빛 수밀도의 때
세월도 모르게 찔끔찔끔 새고 있다.
입구가 출구임을 알아버린
그녀의 깊은 적요가 크르르르
뜨거운 소리를 낸다, 아직 부끄러운 듯
제 안을 밝혀주는 전등 자꾸 꺼버리는
쉰내 나는 그녀, 의 아랫도리에
화려한 반란이 시작되었다.
[당선소감] "새로운 시작…더욱 매진할 터"
감기약을 먹고 누워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약 기운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당선되었다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을 그냥 앉아 있었다. 시와 함께 했던 그 긴 세월의 무게가 한꺼번에 휘발되는 듯 했다.
꿀벌은 날개가 너무 작아서 원래는 제대로 날 수 없는 몸의 구조라고 한다. 그러한 구조를 가지고도 꿀벌은, 수없이 반복된 연습으로 결국 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꿀벌의 쉼 없는 날갯짓, 삶에 대한 그 역동성이 꿀벌을 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처럼 나의 시 쓰기도 그러했던 것 같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더욱 삶에 촉수를 세워 시를 끄집어내어 다듬어 나갔다. 고통 속에서 지혜를 만들어나가는 세상의 이치처럼 끊임없이 주어지는 좌절을 내 삶의 거름으로 삼았다.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시의 길은 끝이 없다. 끝이 없다는 것은 항상 시작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늘 시작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며 시를 쓸 것이다.
감사한 분들이 참 많다. 먼저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고재종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리며 늘 위로와 격려를 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다 호명 할 수 없는 선배님과 후배들 그리고 함께하는 동인들 모두에게 감사할 뿐이다. 늘 마음을 다독여준 친구와 묵묵히 지켜봐준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오랫동안 곁에서 함께 해준 미승 언니와 영서에게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심사평] 2007 全日 신춘문예 시
시 지망생들은 왜 고향의 가난한 부모님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을까. 그것도 왜 유년과 연관된 이야기에만 집중할까. 그렇게도 쓸 것이 없어서야 무얼 더 일러 말하겠는가. 아니 최소한 자본의 세계화 속에 신음하고 있는, 이 슬프고 노여운 세계를 사는 자기 삶, 자기 실존, 자기 존재조차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인가.
이번 심사를 하면서 일국(一國)의 시인을 꿈꾸는 시 지망생들의 소재와 주제의식과 사유의 협소함에 대해 심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아랫도리에 물 흘리는 냉장고의 내력에 대한 사유를 통해 그 냉장고를 운영하는 우리네 보통 여성들의 고단한 삶과 시간에 의한 생의 마모를 설득력 있게 표현한 안오일, 그리고 새벽 별에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건/ 상징하는 바가 아무 것도 없어서야'라며 지금까지 별에 대한 상상력을 완전히 전복해버리는 이형경 등이 200여명의 응모자 중의 그럴 듯한 수확이었다.
그런데 이형경은 활달한 상상력과 전복을 통해 생의 이면을 들추려는 젊은 패기는 좋지만 시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에 허점이 많았다.
그래서 나머지 응모작에서도 고른 수준과 삶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보여준 안오일을 당선작으로 민다.
안오일은 시에서 많은 수련이 엿보이지만 상상력 훈련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이형경에게 추월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드리며,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고재종 시인ㆍ문학들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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