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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낯선 사람들 / 이하석

 

 

그의 구두는 검다

구두 곁 아스팔트 위로 달리는 차의

푸른 차체의 표면에 일요일 오후의 거리가 비친다

그의 검은 구두는 거기에 잠깐 비친다

 

사람들의 얼굴들 아래 그의 구두는 검다

이 아래, 구두쪽에 시선을 두면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도 생각나지도 않는다

감정도 그렇다

 

계속해서 온갖 색깔의 차들은 구두를 지나가고

그의 검은 구두엔 차바퀴들이 비친다

 

그의 구두는 일요일 오후의 모든 것들이

최루탄으로 메케하게 젖어 있는 거리를 따라

고운 함성들 잦아진 시끄러움 속을

무심히 구두들 속을 검게

무관심하게 계속 걸어간다

 

 

 

 

 

우리 낯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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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금(純金) / 정진규

 

 

우리집에 도둑이 들었다 손님께서 다녀가셨다고 아내는 말했다 나의 금거북이와 금열쇠를 가져가느라고 온통 온 집안을 들쑤셔놓은 채로 돌아갔다 아내는 손님이라고 했고 다녀가셨다고 말했다 놀라운 비방(秘方)이다 나도 얼른 다른 생각이 끼여들지 못하게 잘하셨다고 말했다 조금 아까웠지만 이 손재수가 더는 나를 흔들지는 못했다 이를테면 순금으로 순도 백 프로로 나의 행운을 열 수 있는 열쇠의 힘을 내가 잃었다거나, 순금으로 순도 백 프로로 내가 거북이처럼 장생할 수 있는 시간의 행운들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손님께서도 그가 훔친 건 나의 행운이 아니었다고 강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큰 죄가 되기 때문이다 언제나 상징의 무게가 늘 함께 있다 몸이 깊다 나는 그걸 이 세상에서도 더 잘 믿게 되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상징은 언제나 우리를 머뭇거리게 한다 금방 우리를 등돌리지 못하게 어깨를 잡는 손, 손의 무게를 나는 안다 지는 동백꽃잎에도 이 손의 무게가 있다 머뭇거린다 이윽고 져내릴 때는 슬픔의 무게를 제몸에 더욱 가득 채운다 슬픔이 몸이다 그때 가라, 누가 그에게 허락하신다 어머니도 그렇게 가셨다 내게 손님이 다녀가셨다 순금으로 다녀가셨다

 

 

 

도둑이 다녀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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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공초문학상은 운영세칙상 20년 이상의 시단 경력과 지난해 6월부터 올해 5월까지 1년간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수상작을 뽑게 되어 있다.이것은 중진 이상의 시인을 대상으로 하되 반드시 작품에 주어지는 문학상임을 못 박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나라 시문학상 가운데 가장 품위 있는 상으로 자리매김해오고 있다. 우리 심사위원들은 이러한 상의 비중에 걸맞는 시인들의 대상 작품을 엄정하게 가려 뽑고 다시 토의를 거듭한 끝에 정진규의 시 純金을 올해의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다.

 

純金은 정진규가 오늘의 시단에 줄기차게 내놓고 있는 산문시의 한 전범이다. 짜임새가 빈틈이 없을 뿐 아니라純金으로 표상되는 물질적 가치관과 집에 도둑이 들어 잃게 되는 상실감 사이의 시대적 상징의 무게가 밀도 있게 실려 있다.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화자의 체험이 도저한 시적 사유와 만나고 다시 사물과 사건 속에서 작은 우주를 형성해나가는 문채(文彩)는 생각의 틀을 한 차원 고양시켜준다. ‘純金의 값이 이처럼 시로 매겨지는 일도 바로 저 공초(空超)시의 무소유의 세계와 맞닿고 있음이 아닌지? 이 작품으로 상의 중량감이 더해질 것이다.

 

- 심사위원장 이근배(재능대 교수·공초숭모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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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법 / 홍윤숙

 

 

일찍이 낙법을 배워둘 것을

젊은 날 섣부른 혈기 하나로

오르는 일에만 골몰하느라

내려가는 길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어느덧 전방엔 '더는 갈 수 없음'

붉은 표시판

 

석양을 등지고 돌아선 너의

한쪽 어깨 이미 어둠에 묻힌

발밑에 돌무더기 시시로 무너져내리는

아슬한 벼랑 끝에 외발로 섰다

 

세상에 진 빚과 죄로

몸보다 무거운 영혼의 무게

추스려 이마에 얹고

남은 한 발 허공에 건다

 

아득하여라

해 아래 떨어지는 모과의 향기

바람에 섞이듯 그렇게

사라지는 소멸의 착지 그

아름다운 낙하를

 

 

 

홍윤숙 시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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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40여 년 쓴 작품서 묵은 포도주 향기나 수상작 낙법…」뛰어난 상상력 발휘

 

시인 홍윤숙이 우리 시단에 등장한 것은 1950년대 중반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의 시력은 줄잡아도 40년이 넘는다.

 

한 시인이 오랜 세월 시작 활동을 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긍정적인 각도에서 볼 때 그의 시는 오래 묵은 포도주처럼 좋은 방향을 가질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끼어들 수 있는 부작용도 생각될 수 있다. 자칫 그의 시가 안이해질지도 모른다는 부정적 그림자가 그것이다.

 

시인 홍윤숙은 후자와 같은 우리 생각을 문자 그대로 기우에 그치게 하는 경우다. 오랜 시력에도 불구하고 사물을 포착하는 그의 눈길은 여전히 매섭고 맵짜다. 또한 그것을 도마 위에 올려 요리하는 손길 역시 날래고 훌륭하다.

 

뿐만아니라 이번에 수상작으로 추거된 낙법놀이에는 한국 시단이 가져야 할 좋은 시의 또 하나 자격요건이 내포되어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현대에 와서 시는 서정시를 가리킨다. 그런데 서정시는 그 속성이 사적인 세계를 노래하는 것과 함께 형태가 축약적인데 있다. 이런 속성 때문에 서정시는 자칫 편향된 노래가 되기 쉽고 소수 호사가들의 애장품으로 떨어질 공산도 크다.

 

그런데 시인 홍윤숙은 그런 부정적 가능성을 정서의 보편성 확보로 극복했다. 또한 신선한 시상 제시로 그의 시가 많은 사람에게 애송될 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낙법­놀이·33에서 시인 홍윤숙은 모과 향기의 낙하를 우리 자신의 한계 의식과 일체화시키기에 성공했다. 이 기법,상상력에 박수를 보내면서 이번 수상을 축하한다.

 

- 심사위원 김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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