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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 박현웅 

 

 

오랜 공복의 胃, 넓고 메마른 허기를 본다.
반짝거리는 털을 곧추세우고 걸어가는
몇 마리 신기루가 보였다
아니, 걷는 것이 아니라 건너고 있는 중이다
평생 모래를 건너도 모래를 벗어나는 일 없이
발목의 높이를 재보는 은빛여우

오래전 모래 속에서 귀를 빌려온 죄로
사막에 소리를 맡기고 다녀야하는 은빛여우
넓은귀로 입맛을 다신다.
사구의 그림자가 모래 속에서 걸어 나와 주름으로 눕는 밤
은빛여우의 눈은 빛의 껍질을 벗겨낸 말랑한 과육
소리에 민감한 어둠덩어리다
허기진 소리들이 더욱 환해지며 서로의 먹잇감이 되듯
무서운 것은 포식자가 아니라
찾아야할 작은 먹잇감이다
바람이 불 때를 기다려 식사를 끝내고
약간의 풀이 있는 곳, 여우가 제 발자국을 오래 천천히 핥는다.

작고 빛나는 사막 한 마리가 죽어있다
바람이 만들어 놓는 칼날, 서서히 날이 서가는
죽음의 속도보다 느리게 생명을 쓰러뜨린다.
여우의 몸을 떠난 숨결이 오래
은빛 털을 핥는다.
걸음을 내려놓고 날개 없이 은빛 털들이 날아오른다.
채색하는 모래바람은 일렁이는 밀밭풍이다
사막에서 살찌는 것은 바람뿐이다

 

 

 

2010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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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나의 경전에 무릎 꿇고 기도 치열한 문장으로 갚겠다

펑펑 내린 눈이 무릎까지 찾아온 밤, 잠들어 있는 방을 나선 소년. 무릎까지 쌓인 눈을 걷는 것보다 어둠이 더 무서웠지요.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산 중턱 성당에 다다른 소년의 발과 무릎에 흰 눈이 가득 묻었고 등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 하얀 날개를 달고 있는 듯 했습니다. 무릎을 꿇은 소년은 손을 모아 내용도 형식도 없는 기도를 했었습니다. 그 때의 그 소년이 지금 제 시의 모양일 것입니다.

한계점이 제 축이었던 시절. 부풀어 오르기 전 먼저 허물어져 보라고, 소실점에서 기다려 보라고, 변곡점은 거기에 있다고 수없이 스스로 되뇐 나의 경전에 오늘 무릎을 굽힙니다.

내 시의 첫 독자이면서 가끔 무서운 사랑으로 A4용지를 찢어 버리는, 귀한 나의 아내에게 가장 깨끗한 영광을 돌립니다. 처음 나에게 시 쓰기로의 권유와 늘 곁에서 바른길을 들고 지켜봐 주시는 최성훈 선생님, 시를 켜놓고 밤을 새우고 있을 우리시(詩) 회원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있기까지 따뜻한 냉정으로 지도해 주신 박해람 선생님, 가장 귀한 감사를 마음 숙여 올립니다. 하루하루의 공부가 참 즐거웠습니다. 치열한 문장으로 갚겠습니다.

또한 각각의 이름만으로도 두려운 경운서당 학우님들 모두에게 감사를 전하며 함께 수학할 수 있어 행복한 날들이었습니다.

끝으로 심사위원이신 이문재 선생님, 장석남 선생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첫 걸음이지만 선생님들의 선택에 누가되지 않도록 정진하겠습니다. 그리고 중앙일보사와 앞으로 신세 질 귀한 지면에 감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곱씹을 만한 잠언투의 시어 적막한 내면 짜임새 있게 표현

오병량씨와 박현웅씨가 최종적으로 남았다. 상상력의 진폭과 언어구사의 활달성에서는 오병량씨가 좋았다. 오래 시를 써온 흔적도 역력하다. 헌데 무언가 자기 정서가 확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없었다. 물론 신인에게 그 점을 갖추라는 주문은 무리겠으나 이번 응모작의 경우는 자꾸만 이즈음 회자되는 시들을 좌고우면한 흔적이 있어서 믿음이 덜했다.

가령 이런 구절들이 그렇다. ‘계절은 나무가 가진 옷장의 형태’(‘나무의 취향’ 중)나 ‘내 몸을 다녀간 들숨의 필체…’ 운운의 구절 등은 울림 없는 기교에 머물러 안타까웠다. ‘목도리 사용법’같은 좋은 시를 다른 시가 뒷받침하지 못했다.

당선자가 된 박현웅씨의 시는 그에 비해 문장과 감성이 안정되어 있다. 신인에게 안정되어 있다는 것은 장점만은 아니지만 다른 최종심에 오른 분들의 작품들이 발랄한, 하다못해 발칙한 감각의 소유자들이 대다수여서 외려 귀하게 여겨졌다. 당선작으로 고른 ‘사막’은 비록 소품이긴 하지만 우리 시대의 적막한 내면을 짜임새 있고 간결하게 표현한 수작이다. ‘사막’은 실감으로는 우리에게 낯선 풍경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미래의 은유로 읽을 때 절실한 풍경으로 다가선다. ‘무서운 것은 포식자가 아니라/찾아야 할 작은 먹잇감이다’같은 잠언투는 어눌하지만 곱씹을 만한다. 동봉한 다른 작품들도 모두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자칫 전통 서정에 매몰되지 않도록 좀 더 활달해지기를 권하고 싶다. 축하를 드리며 꽃밭 이루시길 바란다.

박은지씨와 박유진씨 등의 시도 읽을만 했는데 뭔가 비슷비슷하다. 개별적으로 보면 개성적인 듯한데 나란히 보면 비슷하다. 그게 뭘까 생각해보길 바란다.

신인 문학상에 응모하는 것은 문청들에게 하나의 큰 축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의 마디가 만들어지고 그 마디들이 쌓여 나중에 좋은 시인의 훈장이 될 터. 낙선의 고통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환해질 것이다. 축하와 안타까움을 위하여! 한잔씩 하시길 바란다.

 

본심 심사위원 이문재·장석남(대표집필 장석남) / 예심 심사위원=권혁웅·김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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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의 흙 외 4편 / 하상만

 

 

땅을 한 삽 퍼서 화분에 담으니
화분이 넘친다
한 삽의 흙이 화분의 전부인 것이다

언젠가 길거리에서
물을 먹고 있는 화분을 지켜보았다
물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은
한 송이 꽃이었다

꽃에게는 화분이 전부였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한 삽의 흙이면 충분했다

우리가 한 삽의 흙이라 부를 만한 것들이 있다
이를 테면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동요를
따라 부르던 시간,
열이 난 이마에 올려놓은
어머니의 손
그녀가 내게 전송해준, 두 개의
귤 그림
떨어져 있어도 함께한 것들을 생각나게 하는
짧은 문자 메시지들
그것들은 신이
미리 알고 우리 속에 마련해 놓은
화분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그 속에서 꽃 피는 일은 자연스러웠다

 

 

 


따뜻한 종소리



보리차를 마신 후
컵을 두 손으로 안는다
 
컵이 아직 따뜻하다
내가 언제 이렇게 컵을 간절히
안았던 적이 있었나

컵은 보리차의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다

누가 잠시 머물렀던 기억으로
빈 컵이 나를 데우고 있다

이 기억을 나도 누군가에게로 옮겨 가야하리라

겨울이다
차가운 세상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
구세군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 번 데워진 것은
식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전도되고 있는 것이다

따뜻한 종소리가 온 세상에 퍼지고 있다

 

 



간장

콩자반을 다 건져 먹은 반찬통을 
꺼내 놓는다. 반찬통에는 아직 
간장이 남아 있다. 
외로울 때 간장을 먹으면 견딜 만하다.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내가 일으키려할 때
할머니는 간장을 물에 풀어오라고 하였다
몸은 잔뜩 부어올랐지만 가벼운 영혼을
붙잡기엔 아직 덜 무거웠다.

나는 들어서 알고 있다. 할머니가 젊었을 때
혼자 먹던 것은 간장이었었다는 것을.
방에서 할아버지와 시어머니가 한 그릇의 고봉밥을
나누어 먹고 있을 때
부엌에서 할머니는 외로웠다고 했다. 

물에 풀어진 간장은 뱃속을 좀 따뜻하게 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운을 주었다.
할머니가 내게 마지막으로 달라고 한 음식은
바로 그런 간장.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할머니는
혼자 오랜 시간을 보내었다.
수년 째 자식들은 찾아오지 않던 그 방
한 구석엔  검은 얼룩을 가진 그릇이 놓여 있었다.

내가 간장을 가지러 간 사이 할머니는
영혼을 놓아 버렸다. 물에 떨어진 간장 한 방울이
물속으로 아스라이 번져 가듯
집안은 잠시 검은 빛깔로 변했다.

비로소 나는 할머니의 영혼이 간장 빛이었다는 깨달았다

나는 할머니의 손자이므로 간장이 입에 맞았다
혼자 식사를 해야 했으므로 
나는 간장만 남은 반찬통을 꺼내 놓았다

 

 

 

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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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하늘
날아다니는 잠자리 날개 끝에
찍혀 있는 점이 없다면
잠자리의 날개는
가벼워 보이리라

바람을 제어하는 날개의 묵직한 힘은
저 점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손톱은 손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손을 지탱하기 위해
살 속에서 나오는 뼈로 만든 점

어둠 속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첨탑 위의 불빛들
온몸을 세워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나도 이렇게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흔들리는 마음에 점 하나 찍어 놓을 것이다

 

 



사막



띄엄띄엄 나무가 서 있어
여기는 사막이야
사막에서는 나무가 띄엄띄엄
서 있어야 해

사막에서의 생존법칙이란 그런 거지
뿌리가 닿지 않게
되도록 멀리 서는 것
그래서 각자 살아남는 것

우리 곁에 서서 연리지라도 되어 불까
너는 물었지

그러나 나의 토양은 사막인 걸
일주일에 한 번
또는 이 주일에 한 번
그것도 안 되면 한 달에 한 번
그렇게 만나는 것으로
족해

어디에 태어났는지가 중요해
뿌리를 가진 것들이
환경을 바꾼다는 다는 것은 거짓말이야
지구가 둥근 것도 나에겐 불행이야
저 멀리 나를 향해 흔들던
잎사귀 없는 너의 손만
볼 수 있었으니

 

 

 

오늘은 두 번의 내일보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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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우주는 점이었다. 그 점이 고온과 고압을 견디지 못하더니 터졌다. 빅뱅이라 부르는 이 사건으로 우주는 생겨났고 지금도 끝없이 팽창하고 있다. 

시골에서 보내던 몇 년. 봄이 오면 집 앞에 피어있던 목련을 자주 쳐다보았다. 목련도 점이었다. 그 점에서부터 몽우리를 만들더니 마침내 터지는 그곳에 꽃을 피웠다. 벌과 나비들이 꽃가루와 향기를 몸에 묻혀 날아갔다. 나는 그것이 우주가 팽창하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겼다. 

내 속에도 작은 점이 찍혔다. 그 점 역시 스스로를 견딜 수 없어 하더니 몽글몽글해졌고 가슴을 가득 채울 만큼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어느 날 뻥뻥 터지기 시작했다. 터져 나온 조각들이 시였다. 

과학책을 읽고 읽던 찰나 당선 연락을 받았다. 나는 아주 조금씩 붉게 변하던 별과 그 별을 매일 밤 관찰하고 기록했던 과학자를 떠올렸다. 그 별은 우주 팽창의 증거였고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 매일 밤을 지새우던 과학자는 내게 시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시 한편을 쓰기 위해 밤을 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이 나를 넓혀가던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직 몽긋몽긋 솟아오르는 점들이 내 속에 더 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그 점들을 스스로 눌러 터트려 버리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삶에 변명거리를 마련해준 심사위원님들과 한국문학방송에 감사드린다. 점이었던 나를 세상으로 터트려주신 어머니께 감사드린다.


 

 

 

[심사경위]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는 당선자의 응모작품 모두를 당선작으로 삼기로 애초부터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심사과정에서부터 작가의 역량을 보다 광범위하게 평가하여, 당선자를 보다 자신감 있게 세상에 선보이기 위함이다.

이번 신춘문예는 공지시 응모작품수를  5편으로 안내했으며, 접수과정에서 5편을 초과하거나 미달한 응모자에게는 보완토록 주문했다. 심사의 형평성 때문이다.

총응모자는 236명, 작품수로는 1,180편이었다. 예심에서 거르고 걸러진 10명의 작품 50편이 본심으로 넘겨졌다. 당초 5명의 작품 25편 정도만 본심에 부치려 작정하였으나 예상 외로 우수 작품이 많이 인지된 관계로 그 대상을 늘렸다. 본심으로 넘어가는 작품들은 응모자 인적사항이 삭제됐다.

예심은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이 담당했으며, 본심은 김신영 시인(동서문학 등단, 문학박사)과 배찬희 시인(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인천여성문학회 이사), 석정호 시인(월간문학 등단, e문학회 회장), 최용석 문학평론가(문학박사, 중앙대 강사 역임) 등 네 분이 맡아 참으로 진지하고도 꼼꼼한 평가 자세를 보여주었다.

당선작에 대한 작품평이나 낙선작에 의견 등은 별도로 내지 않기로 했다. 한국문학방송의 신춘문예는 타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과 '차별성(개성)'을 어떻게 둘 것인가를 놓고 시종일관 많은 고민을 했다. 심사방식도 타 매체들과는 좀 달리, 작품마다 '문법·어법·표현의 적절성', '주제와 내용의 일관성', '감동·느낌', '시적구조와 메타포의 깊이', '작품의 신선감·독창성', '작가적 역량·성장가능성' 등을 구체적 평가항목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미리 배점한 가운데 채점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그렇기에, 당선작은 그와 같은 항목들에서 고루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이해바란다.

최종심에 오른 응모자가 누구인지는 인비(人秘)키로 한다. 문단에 적지 않게 이름이 알려진 문인들을 포함 기성작가들이 상당수 있기에 그분들의 프라이버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으로, 이러한 방침은 앞으로도 이어갈 것이다.

이번 신춘문예에는 미국, 아르헨티나, 호주, 독일, 중국 등 다수의 해외동포를 비롯해 서울, 인천, 경기 등 수도권은 물론 부산, 경남, 울산, 대구, 경북, 광주, 전남, 전북, 대전, 충남, 충북, 강원, 제주 등 전국 각지로부터 작품이 접수됐다.

당선은 되지 않았을지라도 이번 신춘공모에 참여해 주신 모든 응모자 제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다음 기회에도 큰 관심과 함께 도전장을 던져주실 것을 아울러 부탁드린다.

― 정리: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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