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2010 작가세계 신인상 시 당선작 / 눈 외 4편 _ 김소형

 

 

 

 

그곳은 흰 방이었다

둥!

먼 곳에서 북소리가 났지

질긴 살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나는 걸었다

걷고, 걷고, 걸었어.

 

방의 전등이

아무 때나 켜지고

꺼지는 곳에서

 

푸른 밤은

돌아오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았어

 

나는 썩은 나무판지에 누운

사내들 옆에서

잠이 들기도 했지

눈을 떴을 땐 사내들은

늘 죽어 있더군

 

나는 그들의 머리칼로 짠

긴 그림자를 바닥에 깔고

시체의 가죽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방이여!

영원히 굴러다오!

개의 입에 물려 있을 때에도

대지가 물어뜯을 때에도

 

눈은 모든 것들을

게걸스럽게 씹어 먹을 거야

눈은 당신을 천천히 삼켜

한 구의 신선한 시체로 밀어놓을 거야

 

그리고

영영

이 하얀 방

나무판자 위에 올려놓고

시체를 두드릴 테지

방의 전등이 켜지고

다시 꺼질 때

바로 그때

둥, 둥

 

 

 

 

 

그건 아주 낡은 벽이었지

하얀 점이 그려진

그런 벽

너는 비밀을 적고

나는 하얗게 덧칠하는

그런 벽

점은 더욱 커졌지

말랑말랑하게 부풀어 오른 하얀 점

마치 시간의 물집 같았지

 

밤,

나는 힘껏 벽의 물집을 뜯었어

안은 텅 빈 통로이더군

천장엔 거꾸로 매달린 실타래가 가득,

내가 톡 하고 건드리자

실타래가 쩍 벌어졌어

그 속에서 사람들이 쏟아지는 거 있지

 

그들은 딱딱하게 굳어

녹색 돌이 되고

붉은 돌이 되고

검은 돌이 되고

차곡차곡 쌓였어

그만, 나는 벽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본 셈이야

 

내 비밀을 말해줄까

사실 내 팔뚝에는 하얀 점이 있어

점은 더욱 커져 물집처럼 부풀었지

말랑말랑한 부분을 잡고

껍질의 경계선을 뜯어내면

살이 뜯겨져 팔뚝 안이 보여

그 속에는 죽음의 핏줄도

우울의 뼈도 없어

마네킹처럼 텅 빈 팔뚝,

쩍쩍 갈라진 그 속에는

아주 작은 팔이 자라고 있거든

그만, 나는 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고백한 셈이야

 

 

 

사물함

 

 

사물함을 열었더니

늙은 염소가 얼어 있었어

목이 뒤러 꺽인 채

나는 뜨거운 밤이 들어갈까 문을 닫았지

 

두 번째 사물함을 열었더니

집 나간 어미가 나를 보았어

거기서 뭐하세요

무서워, 무서워

나는 자물쇠를 걸어주었단다

 

세 번째 사물함을 열었더니

잃어버린 악몽이 가득 차 있었네

뱀의 눈을 가진 남자

하반신이 잘린 채 눈알을 뽑고 있지 뭐야

내가 쳐다보자

그는 갓 뽑은 눈알을 내게 주었어

그가 웃으며 문을 닫았지

 

마지막 사물함은 굳게 잠겨 있더라

퉁, 문을 두드리고

퉁퉁, 발로 두드리다

아까 받은 눈알을 밀어넣고 안을 들여다보니

길 잃은 사물들이 춤을 추고 있었어

모든 사물함을 다 잠글 수 있는 자물쇠 주변에는

둥글게 퉁, 퉁, 제를 지내듯

 

어느새 나는 지루한 시계가 되어

그들과 뛰어다녔단다

그렇게 하루를, 도 하루를

사물함 안에서 자물쇠를 걸고, 그렇게

 

또, 세계를 닫았단다.

 

 

 

 

 

 

나는 뿔을 만들어

매일 밤,

점점 벌어지던 치아는

굵은 뿔로 변했어

뿔, 입 속에서 솟아난 하얀 돌

 

바다로 뛰어든 너,

내가 너를 부르자

너는 소금 뿔이 되었다고 말했지

뿔, 파도에 날리는 유령들

 

나는 매일 밤을 기다려

밤, 그건 우리를 끌어안는 뿔이니까

 

뿔을 만들고 싶다고?

이건 내 속에 사는 박쥐인데

이건 피리를 부는 해골인데

이건,

이건,

 

그게 아니라면

그럼 그건 당신의 뿔이야

뿔, 당신이 찾는 모든 것,

뿔, 당신의 모든 것,

 

우리는 매일 밤 뿔을 만들지

단단하고

텅 빈,

또 하나의 당신인,

그런 뿔을

 

 

 

검은 오렌지와의 대화

 

 

우리는 아침마다 기차역에 가

기찻길에 낡은 구두를 벗어두고

때론 담배를 피워

아이를 안은 아주머니,

붉은 머리칼의 여자는 뜨거운 레일에 누워

늘어진 하늘에 불을 붙이지

불붙은 하늘은 돌돌 말려 자갈이 돼

하늘에서 덜어지는 푸른

이제 의식이 시작돼

침묵의 돌을 입에 넣고

서로의 비명을 움켜쥐거든

서서히, 빠르게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우리가 짓밟혀 늘어질 때가지

화르륵 불붙어 돌돌 말린 검은 오렌지가 될 때까지

우리는 검은 오렌지가 되어

데굴데굴 굴러갈 거야

당신은 우리에게 말했지

이런, 검은 오렌지잖아

당신은 몸을 둥글게 말고 말했지

시체의 둥근 빰을 닮았고

가슴에서 솟아난 눈물과도 닮았네

검은 오렌지, 내게 말해줘, 검은 오렌지

늘어진 것을 바라보다 불을 붙이며

검은 오렌지, 내게 말해줘, 검은 오렌지

당신이 말해줘

 

 

 

 

 

2010 작가세계 신인상 시 당선작 / 명왕성의 퇴출 외 4편 _ 임유리

 

 

명왕성의 퇴출

 

 

우주도 신간도 진화하고 있으니 비대해지지 않은 것은 당신의 문제다

태양은 여전히 뜨겁고, 구겨진 넥타이를 맨 당신이 들어선다

책상이 있던 자리에 별자리로 빛나는 건 떠다니는 먼지들뿐

이제 당신이 할 일은 그저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어정쩡한 자세로 종이컵 속 회전하는 커피를 본다

당신과 우리의 거리만큼 옆자리의 동료와도 멀어져버린 당신

자신을 행성이라 믿었던 날들은 이제 어디서 찾을까?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시간 당신은 은하계를 둘러본다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오늘를 퀘도를 이탈하지 않은 채 견뎌냈다

 

아주 먼 우주의 일이므로 누구도 슬퍼하지 않았다

 

 

 

 

숟가락 안에서 얼굴을 찾다

 

 

우리는 집도 잡도 없는 가족이죠

순서를 지키지 않고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불규칙으로 들고 나지요

시든 얼굴로 불 꺼진 도시에서 돌아와 누울 곳을 찾지요

하지만 숟가락이 있지요

숟가락은 모두에게 하나씩 똑같이 있지요

어떤 것도 크게 떠서 한 입 가득 먹을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숟가락이지요

 

깊은 사막의 모래를 퍼내듯 말의 갈증은 줄지 않아요

그래도 숟가락은 밥을 퍼내죠

달그락하는 소리를 내지요

 

오목한 숟가락

밤의 벽을 긁어대 어둠을 탈출할 수 있게 하지요

마지막 빠삐용이 되지요

 

상의 모서리마다 숟가락에 잠긴 얼굴들이 있지요

오늘도 우리는 새로운 사실을 만날 일이 없지요

그저 챙기고 빨고 핥으면 되는 시간

모두를 모이게 하는 건 숟가락이지요

 

입안에 넣었다 뺀

잘 닦이지 않은 얼룩은 썰물 대의 모래 자국처럼 남아 있지요

그 안에 잠긴 얼굴이 낯설어

다시 한 입

 

벽에 핀 곰팡이처럼 푸르게 빛나는 별 하나

이곳에 와 박힌 밤이지요

 

 

 

 

오후 세 시

 

 

투명한 것들은 이미 모두 떠나고

낡은 칫솔이 되는 시간

어딘가에 걸려서 물기를 바삭 말린 하나의 익숙함이 되는 시간

 

양치질을 하고 난 후 입가에는 허옇게 치약 자국만 남고

텁텁한 입 안에는 침이 고인다

 

아무도 없는 빈 집에는 내 일이 아닌데도 할 일들만 쌓여가고

나는 이력을 고치며 괜한 불안을 부정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어딜 가나 여백이 많은 것은 별로 환영받지 못해서

다들 뭐든 채워넣을 궁리만 하는데

창틀께에 햇빛만 자리를 못 잡고 서성이고 있다

 

뒤집힌 채 뒹구는 증명사진을 붙인다

그 속의 나는 무너짐을 두려워하지 않는 얼굴이지만

오후 세 시의 세계에서는 이탈의 기회를 노리는 눈빛만 있다

 

이 사이에는 아가 먹음 음식물이 빠지지 않았다

부드러웠던 미세모

닳고 닳아 바깥으로 뻗쳐 있다

나의 사이도 매만지지 못하는

낡은 칫솔이 되는 시간

 

 

 

 

통조림을 따는 밤

 

 

통조림 하나를 흔들어 딴다

가볍게 만난 우리는 통조림을 딴다

유통기한은 많이 남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으므로 통조림을 딴다

 

통조림의 고리가 발딱 선다

림을 준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갇혀 있던 시간이 동그랗게 말리면서 날 선 채 열린다

통조림 속의 세계는 흥건하다

끈끈하고 향기롭다

그녀가 미끄덩거리는 내용물을 집어 든다

오랫동안 사우나 한 듯 팅팅 불어 있는 그의 손가락 같다

그들은 함께 먹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달콤한 것을 쪽쪽 남김없이 먹는다

 

위로의 방법을 모를 땐 이렇게 간단히 먹는 것만 권한다

일단 개봉하면 바로 드시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므로

금세 빈 통조림만 남았다

 

그 안으로 그들이 들어간다

큰 변형 없이 살균된 상태

귓바퀴 안으로 물이 차오른다

가공된 어둠 속에서 그들이 숨을 쉰다

 

깡통의 겉포장에

오늘자 싱싱한 날자가 찍힌다

말캉하고 시원한 통조림이 쏟아지길 기다린다

 

 

 

언어의 그늘*

 

 

어디서 본 듯한 문장을 인용한다

가벼워 보이지 않기 위해서다

때에 따라 주석은 생략한다

사과가 사과일 때 사과처럼 행복하다는 건

겸손을 위한 거짓말

 

너를 읽기 위해서는 번역된 자막이 필요하다

낡은 천으로 감산 얼굴이 있다

보이는 것은 눈

사랑을 잃은 사람의 눈

글자가 지워진 오래된 책이다

그 제목을 말하려면 수줍음 가득한 목소리를 숨겨야 한다

촘촘하게 짜인 말의 카펫 속에서

낙타 한 마리는 잠시 쉴 수 있는 문양

너는 고통을 기억하기 위해 경전을 문신으로 남긴다

 

친구의 장례식에 다녀와

그 이름을 수첩에서 지웠다

순간 그는 정말 죽었고

나는 확실해진다

내 증상은 단어이며 본문에 잡혀 있다

 

*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 소장품전(언어의 그늘) 중.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