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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 (寂寞) / 김우진

 

 

정전은 늘 기습적이다 불빛을 집어삼킨 새벽 두 시 아파트 지하주차장, 어둠의 똬리를 튼 이곳은 바퀴들의 귀착지, 속도에 지친 길들이 한 자리에 멈춰 있다 저 길들이 잠을 털고 일어서는 시간, 어둠도 어디론가 쏟아져 내릴 것이니

 

희미한 불빛으로 어둠 속을 휘젓는다 쭈그러진 어둠의 주름살이 펴지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이 어둠에 묶여 살았다 이곳은 도시의 늪, 통째로 먹이를 삼키는 악어가 살고 있다 불빛 한 점으로 이 늪을 점검한다 지난여름, 한 여자가 악어에 물린 기억을 조심스럽게 플래시로 밀어낸다

 

달리던 길도 숨을 멎은 시간, 어둠 속에서 무럭무럭 살찐 적막의 푸른 살점을 떼어내어 입 큰 악어에게 던져준다

 

천장에 숨어사는 고요가 바닥에 엎드려 있다 저 고요의 현을 밟으면 짐승의 울음소리가 튀어나올 것이다 두려움이 집요하게 달려든다 몸에 고인 졸음이 빳빳해지고 보폭이 좁아진다 켜켜이 쌓인 적막에 등이 서늘해지는 순간, 신발을 질질 끌고 소리와 동행한다 지하 배수펌프가 덜컥 주저앉는 소리에 놀란 천장의 거미줄은 사유의 알을 쏟아 놓는다 보일러 배관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소리, 배후를 알 수 없는 저 뒤편 생각이 쭈뼛 일어선다

 

수십 층 적막의 무게가 어둠 속으로 떨어진다

 

 

 

 

투데이신문 직장인신춘문예 당선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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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림6호* / 김우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볍씨를 담갔다. 바람 한 잎과 구름을 벗겨낸 햇살도 꺾어 넣었다. 봄 논의 개구리 울음도 잡아다 넣었더니 비로소 항아리가 꽉 찼다.

 

나흘 밤의 고요가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항아리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저 경건한 나흘, 지나가는 빗소리도 발끝을 세우고 갔으며 파란색 바람이 일렁이다 갔으며 또한 파란 별들이 농부의 발목 근처에서 무수히 떴다 갔다.

 

항아리 속에서 적막의 힘이 차오른다. 씨앗들이 뿜어내는 발아의 열, 항아리가 드디어 익어가기 시작한다. 촉촉이 스며든 물기에 몸을 여는 씨앗들, 부드러워진 껍질을 걷어내며 깊은 잠에서 눈을 떴다. 귀가 열리고 부리가 생겼다. 몸속에 숨겨둔 하얀 발을 내밀었다. 흙이 묻지 않은 순결한 발들, 뿔을 달고 푸른 들판으로 달려가고 싶은,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며 도란거리는 그들 모습을 보고 나는 씨나락경전을 듣는다.

 

적막은 발아의 요람

작은 항아리 속에서 거대한 우주가 발아하고 있다. 

 

* ‘농림6호’는 1960~1970년대 재배된 볍씨 품종.

 

 

 

 

[당선소감] “시만 알던 나에게도 날개가…훨훨 날아 가야지”

 

시간만 켜켜이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코 신은 헛되지 않게 저에게도 뜻밖의 행운을 주셨습니다.

 

오랫동안 땅 밑 어둠 속에 갇혀 살던 매미 유충이 땅 밖으로 나와 우화(羽化)하여 날개를 파닥이며 건너편 나무 위로 화르르 날아가듯, 시만 알고 시만 쓰던 저에게도 이제 날개를 달 기회를 주셨으니 저 넓은 허공을 향해 훨훨 날아가야겠습니다. 더 좋은 시를 더 많이 쓰라는 것으로 알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저에게 날개를 달아 주신 농민신문사에 감사드리며 제 시를 올려 주신 황인숙 시인님과 함민복 시인님 두 분께 큰절 올립니다. 저를 항상 올바른 시의 길로 인도해 주신 동작문화센터 시창작반 맹문재 교수님, 마경덕 시인님, 고영 시인님 감사합니다. 동작문학 문우들과도 기쁨의 시간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1400광년 밖 초록별로 먼저 간 아내에게도 감사드리며 아버지를 응원해 준 두 아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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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위축되고 시들어가는 현실속 희망의 응원가”

 

본심에 오른 20명의 작품 100여편을 읽었다. 연륜이 감지되는 일정한 수준작은 많았으나 태양과 달처럼 우뚝하거나 바늘 끝처럼 외로운 수작이 없어 선자의 마음이 마냥 홀가분하지는 않았다.

 

‘씀바귀’ ‘나비들이 출몰하는 숲’ ‘이동 만물상’ ‘깻단은 기억해야 할 이름처럼 묵직했다’ ‘농림6호’를 놓고 선자들은 의견을 좁혀갔다.

 

‘씀바귀’는 격물치지의 정신으로, 한 사물을 통해 우리 삶을 담담한 어조로 그려내는 솜씨가 돋보였으나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에 “낡은 일상을 토악질해 쓸려나간다”와 같은 상투적인 시구들이 눈에 거슬렸다. ‘나비들이 출몰하는 숲’은 “사각의 창틀엔 읽기도 전에 몇 장씩 겹쳐 넘겨지는/성경책의 얄팍한 책장 같은 햇살”을 비롯해 빼어난 이미지들이 도처에서 빛난다. 또한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공력을 쏟는가를 작품마다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상 전개 방식에 일정한 틀이 있어(우연일지도 모르지만 응모작 4편의 시 결구가 ‘있다’로 끝난다) 신춘문예를 의식한 작품이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이동 만물상’은 군더더기 없는 정갈한 언어로 농촌마을의 현실을 잘 그려낸, 당선작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탄탄한 작품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깻단은 기억해야 할 이름처럼 묵직했다’와 ‘농림6호’는 시를 위한 시가 아니고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시상이 발현된 시라 체득한 비유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높이 보았다.

 

제목이 당돌한 ‘농림6호’는 생명의 움틈을 세밀하고 애정에 찬 눈으로 바라다보며 자연의 신성을 발견해내는 시안이 깊어 좋았다. ‘농림6호’를 당선작으로 결정한 이유 중에는 위축되고 찌들고 시들어가는 시대의 현실에 희망의 응원가를 들려주고 싶은 선자들의 마음도 작용했음을 밝혀 둔다.

 

축하한다. 아울러 모든 응모자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씨앗이 내년에는 축하의 꽃으로 피어나길 바란다.


심사위원 황인숙 시인, 함민복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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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새는, / 이시하(이향미)

 

 

낡고 어두운 그림자를 제 발목에 묶고 생의 안쪽으로 타박타박 걸어들었을 테지 비에 젖은

 

발목을 끌며 어린 날개를 무겁게 무겁게 퍼덕였을 테지, 가느다란 목덜미를 돌아 흐르는 제 절박한 울음소리를 자꾸자꾸 밀어냈을 테지 여물지 못한 발톱을 내려다보며 새는, 저 혼자 그만 부끄러웠을 테지, 그러다 또 울먹울먹도 했을 테지

 

어둠이 깊었으므로

이제,

어린 새의 이야기를 해도 좋으리

 

나지막이 울음 잦아들던 어깨와 눈치껏 떨어내던 오래된 흉터들을 이제, 이야기해도 좋으리 잊혀가는 전설을 들려주듯,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 낯설고 차가운 이국의 신화를 들려주듯 이제, 당신에게 어린 새를 이야기해도 좋으리

 

새는,

따스운 생의 아랫목에

제 그림자를 누이고

푸득푸득, 혼잣말을 했을 테지

흥건하게 번지는 어둠을

쓰윽, 닦아내기도 했을 테지

 

새는.

 

 

 

나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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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박새의 장례식 / 김우진

 

 

벚나무 가지에 하얀점박이 새울음이 걸려 있다 요란한 울음에 꽃들이 화르르 무너진다 안절부절, 이 나무 저 나무를 콩콩 뛰어날며 마음을 땅에 내려놓지 못하는 저 박새, 품고 살아온 내 안의 통한 같은 긴 소리, 바람이 눈물을 지우려고 따라다닌다

 

벚나무 뒷담, 끈끈이 쥐약통에 붙은 수컷, 눈을 뜨고 죽었다 나동그라진 비명이 서늘히 식었다 허공을 박차던 힘찬 날개는 고요히 접혔다 곁을 맴도는 암컷, 마음이 다급하다 사흘을 굶은 저 곡소리, 벚나무 가지가 철렁 내려앉는다

 

봄꽃들도 문상을 한다 나뭇가지에 걸린 바람이 새울음을 쓰다듬는다 조문객으로 끼어 든 봄비의 눈시울이 촉촉하다

 

해 질 녘 꽃비 내리는 벚나무 아래 새를 묻는다 찌찌찌, 마지막 울음도 함께 묻힌다 그제서야 마음을 내려놓고 포르르 빗속으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꽃잎이 새의 무덤을 덮는다

 

 

 

 

 

[우수상] 슈퍼맨의 꿈 / 최준영(김경선)

 

 

하늘대학 항공과 졸업생, 그는 추락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약발이 다 떨어진 슈퍼맨 4년째 악몽에 시달린다 휘날리던 망토는 가시나무에 걸려 궤도 이탈, 배터리는 바닥이다 또 한 차례 사막의 모래바람이 몰려온다 무릎이 푹푹 빠진다 삼각팬티 한 장이 전부인 슈퍼맨, 단봉낙타 등에 빨대를 꽂아 연명한다

 

모래물결무늬 속에 바다가 숨어있다 죽은 물고기가 하늘로 튀어오른다 감금당한 바다가 사라지던 날 키 큰 선인장이 앞치마를 두르고 이젠 안 속아 붉은 눈으로 사막의 중심을 쏘아본다 미라가 사막을 벌컥벌컥 삼켜 버릴 거야 한 때 슈퍼맨을 지지하던 낙타가 짙은 안개를 변명처럼 게워낸다 붉은 여우도 길의 꼬리를 놓쳤다 사막을 폭식한 슈퍼맨이 달그락달그락 라면을 끓여 먹는다 퉁퉁 불은 달은 오래도록 차갑게 식었다

 

천하무적 슈퍼맨 모래언덕에 빠졌다 푸드득 조개무늬가 순식간에 날아간다 숨어있던 나뭇잎 무늬도 팔랑팔랑 사라진다 모래바람 소리가 밤새 낙타의 등에 쌓인다 사막에서 건너온 뙤약볕, 미라의 몸에 균열이 생긴다 수북한 모래봉분 속으로 실종된 꿈이 덤덤하게 걸어들어간다

 

무덤이 하나 더 늘었다 이제 아무도 슈퍼맨을 믿지 않는다 정보지 구인란을 훑어보는 슈퍼맨 몸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다 쿵! 침대 밑으로 백수건달 사내가 굴러 떨어진다

 

 

 

 

 

[우수상] 버드나무 장례식 / 이종섶

 

 

두 팔을 벌려야 겨우 안을 수 있었던

동네 어귀 버드나무 한 그루

길을 넓히기 위해 베어낼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연고조차 없어 애를 태웠으나

밑동이 잘려 우지끈 넘어진 나무를

운구하기 알맞게 자르기 시작했을 때

하나 둘 나타나는 유족들

가족들의 뿌리였던 할머니 위로

든든한 기둥이었던 남편이 먼저 내려왔고

그 위에 있던 자식들도 차례로 도착했다

평생 살을 맞대고 살던 남편이

허공으로 뻗어가는 어린 가지들 뒷바라지가 힘겨워

노모를 돌볼 생각조차 못 했던 아들과 딸들이

기계톱의 부음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잠시 후면 트럭을 타고 떠나갈 가족들

유품으로 남긴 나이테 편지를 읽었을까

언제나 동구 밖을 바라보며 살았던 할머니

떠나간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는

땅속을 헤집는 뿌리 끝까지 그리움이 사무쳤는데

자를 건 자르고 뽑을 건 뽑으면서

가족들에 대한 추억을 하나씩 수습한 후

마침내 지상에서 그 흔적을 완전히 지웠다

움푹 파인 집에 남겨진 뿌리들은

간혹 할머니의 기억을 틔우기도 하겠지만

빈집을 헤매다 숨을 거둘 것이다

 

 

 

 

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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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390명의 투고 작품 중에서 본심에 올라온 것은 모두 51명의 작품이었다. 투고된 작품의 양도 적지 않았지만, 본심에 오른 작품의 수준도 만만치 않아 이 상에 대한 신인들의 뜨거운 관심이 놀라웠다. 이 상이 10회를 거듭해 오는 동안 좋은 시인을 발굴하고 또 시에 뜻을 둔 사람들을 고무시켜 우리 시단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여 왔음을 반갑고 기쁘게 느낄 수 있었다. 원고에서 투고자의 이름을 모두 빼고 가능한 한 모든 선입견을 배제한 상태에서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심사를 진행한 것도 이 상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데 기여했으리라 생각된다. ‘수주 변영로라는 큰 시인의 이름과 10년의 전통과 심사의 공정성을 두루 생각한다면, 수상자나 투고자 모두 이 상에 대한 자긍심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본심에서 선자들의 손에 끝까지 남은 작품은 버드나무 장례식4(이종섶), 박새의 장례식4(김우진), 슈퍼맨의 꿈4(최준영), 새는,4(이향미) 등이었다.

 

버드나무 장례식4편은 일상적인 삶의 평범한 경험을 극적인 형식에 담고 있지만, 나뭇잎 지는 것을 등 위에 벼랑을 만들어 한순간에 떨어지는 종소리로 표현하는 것과 같이 그것을 드러내는 이미지는 평범하지 않다. 그 이미지는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미적 감각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시에 삶과 세계에 대한 상식적인 깨달음을 담아 제시하려는 태도가 보여 아쉬웠다.

 

박새의 장례식4편은 삶이나 자연의 비극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그것을 극적으로 엮고 압축해내는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이 시의 이미지는 밀도와 집중력과 긴장으로 내면의 부정적인 정서를 미적으로 변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밀어내는 힘이 진정성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인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적 완성도를 의식하고 지나치게 잘 쓰려고 하면 그것이 오히려 시적 완성도를 떨어뜨린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슈퍼맨의 꿈4편은 우선 재미있다. 그 재미는 부조리하고 무거운 삶과 일상을 경쾌하고 가벼운 어조로 웃게 만드는 반어적인 유희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그 유희는 삶을 억압하는 거짓과 모순을 떠올리게 하고, 그것을 통쾌하게 웃음거리로 만든다. 그러나 충분히 육화되지 않아 장난스러워 보이는 표현과 태도가 가끔 눈에 띄었다.

 

새는,4편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내면적인 정서에 새겨진 상처를 위무한다. 이 시들은 화려하고 세련된 표현은 없지만, 삶의 경험을 과장하거나 꾸미지 않고 객관적으로 응시하며 그것이 충분히 숙성되기를 기다리는 태도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좋은 미덕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그것을 자신만의 개성으로 강력하게 밀어 올리는 에너지가 다소 약해서 시가 밋밋해 보인다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될 수 있겠다.

 

논의된 네 분의 작품 모두 나름대로의 개성적인 특징과 함께 단점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한 작품을 단번에 고르기는 쉽지 않았으나, 결국 이향미씨의 작품을 대상으로 밀기로 하였다. 이향미씨의 대상 수상을 축하하며, 아울러 우수상을 수상한 세 분에게도 축하를 드린다.

 

- 심사위원: 이가림ㆍ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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