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어 / 길덕호
해가 뜨기 전 골목은 깊은 바다가 된다.
어제 뜬 별이 성게처럼 유리창에 들어가 박히고
달빛 떠난 적막만이 청니 덮인 푸른 길을 내었다.
골목 어귀에는 바람의 물결이
아가미로 들썩이는 낙엽들을 이리저리 골목길로 내몰아
잠들지 않는 가로등을 등대 삼아
저마다의 항로를 향해 무겁게 철썩인다.
어두운 골목 바위틈에선 담배의 빨간 불빛이
야광석처럼 공기를 빨아들이고
빛을 보고 모여든 심해어 한 무리
크릴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추위에 오그라든 비늘을 깃으로 세운다.
해풍에 돛을 올린 사람들
삼삼오오 자신의 지느러미로 헤엄치며
집어등 밝힌 인력 사무소 앞에 묵묵히 모여 든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면서
깊은 해연의 푸르스름한 자궁 안
어머니의 따스한 첫 부름을 생각해 본다.
부드러운 물결 같은 그 한 마디가 탯줄을 타고 들어와
뼈를 세우고 심장을 뛰게 하였지.
양수 같은 새벽 공기가 바다의 모습을 한 채
사람들을 안개 속으로 이끌고 있었다.
파도 한 점 없는 갯벌 같은 해저의 광야
골목의 탯줄을 따라 출렁이는 한 무리의 물결
울먹울먹 꽃으로 뼈를 세우는
심해어 한 마리
굵은 몸짓의 자맥질로 깊은 바다를 유영하면
태양은 그제야 수평선에서 입질을 시작한다.
[당선소감]
한탄강 물윗길을 걸어갑니다. 물은 발 아래로 흐르지만 소리는 늘 귓전을 맴돕니다. 물이 흐르는 소리, 바람이 부는 소리,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들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최상의 시어들입니다.
때때로 노을이 익어가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시상들은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시의 물줄기는 말라만 가고 메마른 시간들이 지나만 갔습니다. 동력이 떨어지고 지칠 때에 투데이신문에서 보내주신 기쁜 소식은 저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된 듯합니다.
늘 옆에서 응원해 주는 가족들, 우리 선생님들, 시문학 동아리 친구들 감사합니다.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던 귀한 친구, 또 그 옆에서 빙그레 웃으며 글을 봐주던 소중한 친구들 정말 감사합니다. 기쁨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두려움은 잠시 책갈피에 넣어두고 기쁨의 꽃잎만 추려내어 감사의 꽃다발을 드립니다. 졸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글이기에 더 열심히 쓰라는 채찍의 말씀으로 알겠습니다. 산이 되고 바람이 되고 강물이 되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심사평]
예년보다 더 많은 직업군에서 더 깊은 직장 체험을 안고 시의 세계로 들어왔다. 196인의 총 919편. 이 중 예심을 통과한 30인의 작품에서 수준이 좀 떨어진다 싶은 것을 빼고 나니 <심해어>(길덕호), <선인장>(황용녀), <연근조림을 먹지 않는 이유>(김종태), <문서 세단기>(김미향), <장미꽃무늬 팬티에 관한 소문>(오정순), <삼신할미의 고뇌>(김경희), <겨울로 가는 시계>(이정근), <울음이 흘러넘치는 날의 뒷면일지도>(김수수), <늦은 나라의 이상한>(박선영) 등이 놓였다. 이들을 두고 다시 오래 정독했는데 그 까닭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어서라기보다 보다 완성도 높은 시 한 편을 찾기 어려워서였다. 대부분 체험을 비유하고 상징하는 표현을 즐기고 있었는데, 시의 전개 과정에서 일관성을 잃고 있었다.
최종에 남은 것이 <연근조림을 먹지 않는 이유>, <선인장>, <심해어> 3편이었다. <연근조림을 먹지 않는 이유>는 어릴 적의 아픈 추억을 되살리는 상징물로 ‘연근’을 내세운 구체성이 주목됐지만 경험을 설명하는 어투가 강했다. <선인장>은 ‘메마른 세계’를 건너가는 삶의 시간을 사막의 선인장에 비유하는 참신성이 ‘목마른 내가 선인장 즙을 빨아’ 먹는 서술로 잘 표현됐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시적 긴장을 잃어버렸다. 앞으로, 하나의 정황에서 시적 현실을 형상화하는 일을 과제로 삼는다면 크게 진전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심해어>는 새벽 골목을 ‘깊은 바다’로, 일자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을 ‘심해어’로 비유하는 상황 설정을 끝까지 하나의 ‘시적 정황’으로 밀고 나가는 힘이 강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면서/ 깊은 해연의 푸르스름한 자궁 안/ 어머니의 따스한 첫 부름을 생각해 본다.”로 막노동 일터조차 얻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담아내는 ‘정서적 형상’도 볼만했다. 함께 보낸 <대걸레의 인생>, <신쥐라기 시대> 역시 오랜 시작 과정을 짐작케 하는 수준이었다. 다만 시적 패턴이 다소 규격화돼 있다는 아쉬움도 있었다는 사실도 지적하며 당선으로 올린다.
심사위원 박덕규(시인·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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