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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 / 김산

 

 

푸른 저녁이 등의 짐을 잠재우는 시간으로 돌아가겠다.

고독의 밀실로 말하노니,

구름의 검은 조등이 맨발 아래 스멀거리는 구나.

죄를 지은 사람과 죄를 벗은 사람 사이에서

분분히 포말 되는 거울의 말을 사랑한 적 있다.

섬이 떠다닌다. 한 섬 두 섬 세 섬 선한 양들을 부르듯.

섬은 별의 공동묘지. 저기 아래.

죽음의 정박을 절체절명의 몸부림이라고 이해하겠다.

어둠이 하얗다고 소년이 소리친다. 그것은 비석의 그림자를 본

늙은 매의 날갯짓이 전생을 파닥거리는 불온한 외침.

어린 송장의 관의 문을 열고 비로소 명멸하는 저녁,

잔디들이 일제히 일어나 향을 피우며 음복을 한다.

바람의 후레자식들이여! 무릎 꿇고 고개를 숙여라.

집을 잃은 성근 별들이 뜨거운 손을 잡고,

들개 한 마리가 앞발을 천천히 거두어 가슴으로 덮는다.

 

바람이 분다. 죽어야겠다.

바람이 불지않는다. 그래도 죽어야겠다.

 

 

 

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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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통영문학상 수상자가 선정됐다. 통영시문학상운영위원회(위원장 고동주)는 청마문학상에 천양희(사진) 시인, 김춘수시문학상에 김산 시인, 김상옥시조문학상에 문희숙 시인, 김용익소설문학상에 조해진 작가가 선정됐다고 밝혔다.

 

통영문학상은 통영출신인 시인 유치환과 김춘수, 시조시인 김상옥, 소설가 김용익을 기리고 있다. 통영문학상은 지난해 7월부터 올해까지 1년간 전국에서 출간한 모든 작품집을 대상으로 심사를 했다.

 

선정 결과 청마문학상은 천양희 시인의 작품집 '새벽에 생각하다(문학과지성사)'가, 김춘수시문학상은 김산 시인의 작품집 '치명(파란)'이 선정됐다. 이와 함께 김상옥시조문학상에는 문희숙 시인의 작품집 '짧은 밤 이야기(고요아침)', 김용익소설문학상은 조해진 작가의 '빛의 호위(창비)'가 선정됐다. 청마문학상 수상자는 상금으로 2000만 원을 받고, 나머지 수상자에게는 1000만 원을 받는다.

 

통영문학상 시상식은 오는 10월 21일 통영시민문화회관 소극장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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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프 / 김산

 

 

공중의 바람은 한시도 그대로 머무는 법이 없다

붙들린 기억 저편으로 얽매이고 달아났다 이내,

방치하고 짓무른 거리의 흙 알갱이들을 토해냈다

13년간 복직을 위해 뛰어다닌 관절염은

헛기침 소리에도 소울음을 게워냈고

욕설처럼 들이밀던 탄원서는 침묵의 목도장만

시뻘건 일수를 찍어댔다

끝까지 몰려본 사람은 안다

눈 덮인 산기슭에 놓인 덫을 알고 있으면서도

외길로 쏜살같이 뚫고 나가는 산짐승은 안다

배낭에 생수 몇 통을 聖水처럼 짊어진 조성옥 씨는

지상 50미터 철강회사 굴뚝 위로 올라갔다

나선형의 계단을 징검돌처럼 한 생 한 생 밟을 때마다

죽지 위로 날개가 파닥거렸다

경계와 경계 사이에는 금을 긋는 법이 없다

땅은 땅이면서 하늘은 하늘 그대로를 담고 있다

굴뚝의 몸뚱어리가 후끈 달궈진 쇠근육처럼

매일같이 조여왔다, 휘어졌다

장미보다 들국을 좋아하는 눈이 파란 아내, 코넬리아는

배낭에 울음을 담고 로프를 묶고 있다

대롱대롱 매달린 배낭이 출렁이며 경계를 넘을 때

그는 순간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자신을 동여매고 산 한 올의 가닥은 무엇이었을까

백만 원 남짓의 서정적인 급료와

선술집에서나 통할 법한 철강 대기업의 명함 한 장

아니다 결코, 그건 아니다

웃자란 수염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공중의 바람이

지난날, 그가 배포했던 굴뚝 아래 뒷굽들의

처우개선 유인물처럼 세상의 길가 구석구석까지

낮게 낮게 손짓하고 있었다

 

바람이 제법, 쌩쌩하다

 

 

 

 

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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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문학은 고통의 깊이를 파는데서 그치지 않고 반드시 그 깊이를, 깊을수록 아름다운 미래 전망의 씨앗으로 전화한다. 당선작 `로프`는 기존의 숱한 추모와 달리 과거와 현재의 문제를 잇는 역동적이고 긴장된 마디, 행들을 갖추고 있다. 첫 두 행은 거의 저돌적이다.

 

공중의 바람은 한시도 그대로 머무는 법이 없다

붙들린 기억 저편으로 얽매이고 달아났다,

 

이 긴장의 마디가 전편에 잠복하여 시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광경은 장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뻘건 일수를 찍어댔다

끝까지 몰려본 사람은 안다

 

(중략)

 

나선형의 계단을 징검돌처럼 한 생 한 생 밟을 때마다

죽지 위로 날개가 파닥거렸다

경계와 경계 사이에는 금을 긋는 법이 없다

 

(중략)

 

대롱대롱 매달리는 매달린 배낭이 출렁이며 경계를 넘을 때

 

이 시의 마무리는, 당연히, 의미심장하게 느긋하다.

 

처우개선 유인물처럼 세상의 길가 구석구석까지

낮게 손짓하고 있었다

 

바람이 제법, 쌩쌩하다.

 

제주4·3 에 대한 추도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 마침내 제주도의 노래에 이른, 끝까지 아쉬웠던 경쟁작이 있었음을 일러둔다. 가령, `돌무더기를 용케 비집고 들어온 햇살에 눈이 쓰리다 졸음이 퀴퀴하게 번져가는`으로 시작되는 그의 `빌레못굴`은 오늘날의 제주도의 노래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는 당선작의 긴장이 그 노래의 가락마저 그 이상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것을 기대해보기로 했다.

 

심사위원 고은 · 김순이 · 김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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