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鳥致院을 지나며 / 송유자

 

 

밤 열차는 지금 조치원을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조치원이 어딘가, 수첩 속의 지도를 펼쳐보니

지도 속의 도계와 시계, 함부로 그어 내린 경계선이

조치원을 새장 속의 새처럼 가둬놓고 있다

나는 문득 등짝을 후려치던 채찍 자국을 지고

평생을 떠돌던 땅속으로 들어가서

한 점 흙이 되어 누운 대동여지도 고산자를 생각한다

새처럼 자유롭고 싶었던 사나이, 그가

살아서 꿈꾼 지도 속의 세상과

죽어서 꿈꾼 지도 밖의 세상은 어떻게 다를까

몇 달째 가뭄 끝에 지금은 밤비가 내리고

논바닥차럼 갈라진 모든 경계선을 핥으며

비에 젖은 풀잎들이 스적스적 일어서고

나는 불우했던 한 사내의 비애와

상처를 품고 앓아 누운 땅들을 생각한다

대숲이나 참억새의 군락처럼, 그어질 때마다 거듭

지워지면서 출렁이는 경계선을 생각한다

납탄처럼 조치원 역에 박힌 열차는 지금

빗물에 말갛게 씻긴

새울음 소리 하나를 듣고 있는 중이다

 

 

 

 

2002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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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너무 늦게 성찰에 듣는 기쁨

 

당신, 지난 가을은 참 많이 걷고 걸었습니다.

걷고 걸으면서 하얗게 지워지는 나를 보았습니다.

단순해지려고 무척 애를 썼습니다.

주위의 현실은 점점 어렵고, 잠시 시와의 격리중인 나를

되돌아보았습니다. 참 많은 정겨운 풍경을 만났습니다.

쇠줄에 매달려 울부짖는 개를 만나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파시의 어둠 속에 앉아 담배를 태우는 할머니를 만나면

왠지 애잔함으로 물드는 마음이었습니다.

먹물처럼 가라앉은 산길에 외로이 잠든 무덤가를

돌면서 죽음의 냄새도 맡았습니다.

아직 비린내 가득한 내가 가진 언어의 한계에

스스로 가위 눌리리도 했습니다.

마음은 이라서, 시에만 매달리지 못하는

메마른 생활도 되돌아보았습니다.

당신, 너무 늦은 이 성찰에 오늘 그 대답을 듣는 기분입니다.

이 모든 것이 높고 보이지 않는 아득한 곳에 계신 당신의

뜻인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기쁨과 함께 왠지 두려움으로

벌거숭이가 된 듯합니다. 사랑하는 당신과 함께

선해주신 신경림 선생님, 신대철 선생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균형을 잃지 않은 완결된 시

 

이번 응모작들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작품 수준이 높다. 예선에서 올라온 작품들 중 최승철의 <매화>, 안성호의 <계단에서>, 박하성의 <구두종합병원>, 윤진화의 <모녀의 저녁식사>, 송수자의 <鳥致院을 지나며> 등은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세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모두 역량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최승철의 <매화>는 꽃망울이 터지기까지의 과정을 치밀하게 묘사한 시이다. 말과 리듬을 다루는 솜씨가 노련하고 소재를 처리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세부 묘사에 치중하다 보니 꽃의 세계를 놓친 게 흠이다. 안성호의 <계단에서>는 사물의 구조를 이용하여 현실과 상상을 잘 맞물려 놓은 시이다. 서사적 골격을 먼저 세우면 계단을 따라 흐르던 물소리가/ 내 가슴에서 한층한층 계단을 쌓습니다같은 표현도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박하성의 <구두종합병원>은 삶을 보는 시선이 건강하고 자연스런 호흡이 돋보이나 전체적으로 내용이 추상적이다. 윤진화의 <모녀의 저녁식사>는 상상력이 기발하고 구성도 독특하다. 그러나 시가 전개될수록 이미지가 융합되지 않고 겉돌아 초점이 흐려진다. 시의 첫 부분과 끝 부분이 다른 시같이 읽힌다. 송수자의 <鳥致院을 지나며>는 윤동주의 <십자가>를 패러디한 시로 읽을 때 신진다운 패기와 실험의식이 더 느껴지지만 그냥 읽어도 산뜻하고 단아한 시이다. 정서가 단단하고 안정되어 있고 끝까지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응모시 가운데 가장 시가 완결되어 있다.

 

이 중에서 송수자의 <鳥致院을 지나며>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동봉한 시들이 수준이 고르고 시와 산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긴장을 유지하는 표현력도 수준급이다. 곧바로 창작 활동을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작품이 숙련되어 있다.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윤진화의 <모녀의 저녁식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심사위원 신경림, 신대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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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고물상 / 박옥순

 

 

1

충대우 629번지

언제부턴가 이곳에

버려진 꿈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냉매가 지나던 혈관이 터져 버린 후

감옥 같던 마음의 빗장을 열어둔

문짝 떨어진 냉장고

가난한 사람의 소박한 꿈으로

바퀴 탱탱하게 부풀었을

젊음이 짐스럽지 않던

페달 부러진 늙은 자전거

굴착기의 굉음에 허리 끊어지기 전까지

어느 건물, 어느 다리의 튼튼한

뼈대였을 등 굽은 철근조각

지상에서의 마지막 눈물인 듯

눈 질끈 감고 삼키던 독한 시름

제 허리 꺾어가며 위로해주던 소주병

그리고, 불개미 같은 세월의 녹을 달고

달동네의 겨울을 기억하는 연탄집게까지

 

2

맞은 편엔 몇 달이 멀다고

간판이 바뀌는 상점

고물상 옆 커피숍이 어울리지 않았는지

어제는 뼈다귀 해장국 간판을 달았다

이 골목의 상점들이 어느새

폐허처럼 버티고 선

고물상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 것일까

한 자리에서 십여 년 넘게 버텨온 뚝심

이제 더 이상 떨어질 바닥은 없다고

세상의 낮은 곳 쉬지 않고 살피는 눈

저녁에는 낡은 호미자루 같은 등으로

수레 가득 폐지를 싣고 오는 노인들

 

 

 

 

200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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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정감이나 관념을 구체적인 표현없이 실감나게 드러내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너무 구체적인 표현에 얽매이면 묘사할 수 없는 부분까지 묘사하게 되어 시의 초점이 흐려지게 된다. 체험이 부족한 시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비명까지 묘사하려들지 말고 그런 상황을 겪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묘사가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여러 투고자 중에서 박옥순의 '개신고물상' 외 7편은 단순하긴 하지만 삶이 묻어나 있고 표현에 무리가 없다. 호흡도 자연스럽다. 당선작 한 편만 두고 본다면 특별히 내세울 게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세우는 것은 다른 응모자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삶이 느껴지고 낮은 곳을 살피는 따스한 생명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눈도 없는 시보다 미숙하지만 눈을 떠가는, 생명 있는 시를 밀어본다

 

- 심사위원 신경림, 신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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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방직공장의 소녀들 / 이기인

 

 

목화송이처럼 눈은 내리고

ㅎ방직공장의 어린 소녀들은 우르르

몰려나와 따뜻한 분식집으로 걸어가는 동안제 가슴에 실밥

묻은 줄 모르고,

공장의 긴 담벽과 가로수는 빈 화장품 그릇처럼

은은한 향기의 그녀들을 따라오라 하였네

걸음을 멈추고

작은 눈

뭉치를 하나 만들었을 뿐인데,

묻지도 않은 고향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늘어놓으면서 어느덧

뚱뚱한 눈사람이 하나 생겨나서

어린 손목을 붙잡아버렸네

그녀가 난생 처음 박아 준 눈사람의 웃음은 더 없이

행복해 보였네

어둠과 소녀들이 교차하는 시간, 눈꺼풀이 내려왔네

ㅎ방직공장의 피곤한 소녀들에게

영원한 메뉴는 사랑이 아닐까,

라면 혹은 김밥을 주문한 분식집에서

생산라인의 한 소녀는 봉숭아 물든 손을 싹싹 비벼대네

오늘도 나무젓가락을 쪼개어 소년에 대한

소녀의 사랑을 점치고 싶어 하네

뜨거운 국물에 나무젓가락이 둥둥

떠서, 흘러가고 소녀의시간이 그렇게 흘러 갔다고 분식집 뻐꾸기가

울었네

입김을 불고 있는 ㅎ방직공장의 굴뚝이,

건강한 남자의 그것처럼 보였네

소녀들이 마지막 戰線(전선)으로 총총 걸어가며 휘파람을 불었네

 

 

 

 

2000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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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예심을 거쳐 올라온 15명의 응모자중 남소영, 이기인, 안휘지의 작품들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남소영의 작품들은 신춘문예 스타일이라는 상투성에서 멀다는 점, 말의 침묵-암시의 울림, 생략과 여백의 효과 같은 것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점, 상식을 거스르고자 하는 의지가 보인다는 점 등에 비추어 그중 눈에 띄는 시적 재능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지나치게 모호하다는 것이 흠이었다. 그러나 ‘겨울인사’ 같은 작품은 버리기 아까웠다.


이기인은 존재하는 것들의 외로움과 추움을 아주 잘 느끼고 있다. 그래서 ‘ㅎ방직공장의 소녀들’에서도 보듯이 그의 작품들은 따뜻하다. 계절도 인심도 춥고 싸늘할 때는 사람들은 따뜻한 마음에 감동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따뜻한 마음을 퍼뜨리고 일으켜세우는 일도 시가 하는 중요한 일중의 하나일 것이다. 부드러운 어조도 시에 힘을 더하며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다는 점도 마음놓이는 일이다.

 

심사평 : 신경림, 정현종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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