鳥致院을 지나며 / 송유자
밤 열차는 지금 조치원을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조치원이 어딘가, 수첩 속의 지도를 펼쳐보니
지도 속의 도계와 시계, 함부로 그어 내린 경계선이
조치원을 새장 속의 새처럼 가둬놓고 있다
나는 문득 등짝을 후려치던 채찍 자국을 지고
평생을 떠돌던 땅속으로 들어가서
한 점 흙이 되어 누운 대동여지도 고산자를 생각한다
새처럼 자유롭고 싶었던 사나이, 그가
살아서 꿈꾼 지도 속의 세상과
죽어서 꿈꾼 지도 밖의 세상은 어떻게 다를까
몇 달째 가뭄 끝에 지금은 밤비가 내리고
논바닥차럼 갈라진 모든 경계선을 핥으며
비에 젖은 풀잎들이 스적스적 일어서고
나는 불우했던 한 사내의 비애와
상처를 품고 앓아 누운 땅들을 생각한다
대숲이나 참억새의 군락처럼, 그어질 때마다 거듭
지워지면서 출렁이는 경계선을 생각한다
납탄처럼 조치원 역에 박힌 열차는 지금
빗물에 말갛게 씻긴
새울음 소리 하나를 듣고 있는 중이다
[당선소감] 너무 늦게 성찰에 答 듣는 기쁨
당신, 지난 가을은 참 많이 걷고 걸었습니다.
걷고 걸으면서 하얗게 지워지는 나를 보았습니다.
단순해지려고 무척 애를 썼습니다.
주위의 현실은 점점 어렵고, 잠시 시와의 격리중인 나를
되돌아보았습니다. 참 많은 정겨운 풍경을 만났습니다.
쇠줄에 매달려 울부짖는 개를 만나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파시의 어둠 속에 앉아 담배를 태우는 할머니를 만나면
왠지 애잔함으로 물드는 마음이었습니다.
먹물처럼 가라앉은 산길에 외로이 잠든 무덤가를
돌면서 죽음의 냄새도 맡았습니다.
아직 비린내 가득한 내가 가진 언어의 한계에
스스로 가위 눌리리도 했습니다.
마음은 千이라서, 시에만 매달리지 못하는
메마른 생활도 되돌아보았습니다.
당신, 너무 늦은 이 성찰에 오늘 그 대답을 듣는 기분입니다.
이 모든 것이 높고 보이지 않는 아득한 곳에 계신 당신의
뜻인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기쁨과 함께 왠지 두려움으로
벌거숭이가 된 듯합니다. 사랑하는 당신과 함께
선해주신 신경림 선생님, 신대철 선생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균형을 잃지 않은 완결된 시
이번 응모작들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작품 수준이 높다. 예선에서 올라온 작품들 중 최승철의 <매화>, 안성호의 <계단에서>, 박하성의 <구두종합병원>, 윤진화의 <모녀의 저녁식사>, 송수자의 <鳥致院을 지나며> 등은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세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모두 역량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최승철의 <매화>는 꽃망울이 터지기까지의 과정을 치밀하게 묘사한 시이다. 말과 리듬을 다루는 솜씨가 노련하고 소재를 처리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세부 묘사에 치중하다 보니 꽃의 세계를 놓친 게 흠이다. 안성호의 <계단에서>는 사물의 구조를 이용하여 현실과 상상을 잘 맞물려 놓은 시이다. 서사적 골격을 먼저 세우면 ‘계단을 따라 흐르던 물소리가/ 내 가슴에서 한층한층 계단을 쌓습니다’ 같은 표현도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박하성의 <구두종합병원>은 삶을 보는 시선이 건강하고 자연스런 호흡이 돋보이나 전체적으로 내용이 추상적이다. 윤진화의 <모녀의 저녁식사>는 상상력이 기발하고 구성도 독특하다. 그러나 시가 전개될수록 이미지가 융합되지 않고 겉돌아 초점이 흐려진다. 시의 첫 부분과 끝 부분이 다른 시같이 읽힌다. 송수자의 <鳥致院을 지나며>는 윤동주의 <십자가>를 패러디한 시로 읽을 때 신진다운 패기와 실험의식이 더 느껴지지만 그냥 읽어도 산뜻하고 단아한 시이다. 정서가 단단하고 안정되어 있고 끝까지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응모시 가운데 가장 시가 완결되어 있다.
이 중에서 송수자의 <鳥致院을 지나며>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동봉한 시들이 수준이 고르고 시와 산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긴장을 유지하는 표현력도 수준급이다. 곧바로 창작 활동을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작품이 숙련되어 있다.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윤진화의 <모녀의 저녁식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심사위원 신경림, 신대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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