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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 백가경

 

 

1920년 변호사 세바스챤 힐튼은 어린이들에게 3차원 공간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고자 정글짐을 발명했다

 

*

 

x가 머리 위에 달린 축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다 높이를 미처 재지 못한 x의 발이 바닥에 거의 닿을락 말락 누군가 실컷 타다 뛰어내린 그네처럼 어안이 벙벙하다

x의 팔과 다리가 점점 빠르게 버둥거린다 x는 하나의 커다랗고 검은 점이 되는가 싶더니 그 어떤 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x값이 무한 증폭된다

 

y님 행복을 주는 치과 생일 축하드립니다. 임플란트 10% 할인 1

어떻게, 잘 지내? 1

은평구도서관 세상의 끝연체 49일 빠른 반납 요망 1

소액 대출 최저 이율로 신용등급 모두 가능

 

y는 몸을 정육면체 안으로 구겨 넣는다 점점 y값을 잴 수 없고 그럴수록 y는 생각한다

이 모든 되풀이는 나의 결과 값 “(경제적) 자유를 위한 것

 

z의 미래 값: 직사각형 화장실 천장에 도시가스 공급관이 노출돼 있음 장판과 텐트 사이 혈액이 말라붙어 표백제와 기타 용액을 계산한 것보다 한 통 더 사용함 청구 예정

z의 현재 값: 중위소득 85% 이하 가정에서 자란 3학년 C

 

*

 

발가락 하나로 자신의 목숨을 지탱한 x는 같은 위치 옥상에 사는 주민이자 애인 z를 찾아 창백한 타일로부터 그를 무한 증식시킨다 열화 과정에서 z는 기체로 변할 수 있게 되고 y가 연체한 세상의 끝을 대신 반납한 후 49일을 1초 만에 앞당겨 세상의 끝 역자 후기를 대출한다 y가 연탄과 소주를 담아 온 마트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을 때 자연스럽게 제목을 볼 수 있도록 책을 비스듬히 세워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

 

범우주아카이빙센터 12호 연구소장은 x, y, z 세 어린이를 한 차원에 모아 두고 질문을 시작한다

 

말을 끊어서 미안하지만 여러분 어떻게 연결되었으며 이런 건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세 어린이 동시에 말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연구소장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어린이들 모르게 언어 변환 버튼을 누른 후 짧게 욕을 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능력은 어떤 문헌에서 찾은 것인가요?

 

어린이 일동, 문헌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 Hypercube 4차원에서 모든 변의 길이가 같은 도형, 10개 이상의 처리기를 병렬로 동작시키는 컴퓨터의 논리 구조

 

 

 

 

 

[당선소감] 기억과 기록오래 써나갈 것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쓰는 것이 시일까, 내가 시를 쓸 자격이 있을까? 경향신문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울먹이는 제가 선뜻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게 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외면당했다고 느꼈을 때, 세상의 빛나는 것들이 하찮아 보일 때, 사는 것을 잠시 그만두고 싶을 때 쓰였습니다. 분노와 슬픔과 괴로움 그리고 부끄러움, 그런데도 살아보겠다고 꿈틀대는 욕망이 시 속에서만 비로소 쓸모를 찾았습니다. 어두운 방에서 더 어두운 생각을 톺아보고 그보다 어두운 곳에 있을 존재에 기대어 썼습니다. 그랬던 시가 살면서 가장 빛나는 자리로 저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시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잊을 것 같은 두려움에 꿈속에서도 문장을 중얼거립니다. 좋은 시란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르는 마음으로 덤벼봐도 된다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그 속으로 마음껏 몸을 던져도 된다고, 길을 잃은 곳에서 더 길을 잃기 위해 난장을 부려도 된다는 목소리였습니다.

 

함께 시를 써나간 김미라 언니, 양송이 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우리는 오래 들어왔던 시 수업이 갑작스럽게 폐강한 후 임시저장이란 이름의 작은 모임을 만들어 시를 쓰고 서로의 것을 읽었습니다.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절에 모니터 화면 너머로 표정을 나누고 이어폰으로 전달되는 낭독을 들으며 저는 써나갈 힘을 가까스로 얻었습니다. 어느 우스갯소리가 기억나네요.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Ctrl+S만 차리면 산다고요. 계속, 습관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저장한다는 임시저장이란 기능처럼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 것, 돌아보아야 하는 것을 신경질적으로 시에 저장하며, 오래 써나가겠습니다. 칠흑 같은 바다 위로 둥실 떠오른, 혼불 같은 목소리를 들려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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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미학적 자유로움은 정확함 위에서 탄생한다는 것 보여줘

 

우리 삶의 시간은 살아내는능동과 살아지는수동이 얼마간 뒤섞이기 마련이다. 반면 우리가 시를 쓰는 시간은 온전한 능동만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투고된 작품들은 언어와 삶의 주체를 회복하려는 저마다의 고투다. 이 흔적을 따라 읽는 것은 경외가 가득한 것이었고 이들 가운데에서 한 편만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것은 고민을 더하는 일이었다.

 

5명의 작품을 정해 더 깊은 논의를 이어나갔다. 이미 모두 자신만의 것을 가지고 있는 고유함들. 김소영은 구어와 문어의 적절한 활용을 통한 활달한 에너지로 일순간 세계의 이면을 서늘하게 드러낼 줄 안다. 박규현은 개성 있는 호흡과 리듬이 돋보였다. 행의 배열이나 문장이 끝나는 지점을 어슷하게 두어 여운을 발생시키는 감각도 좋았다. 원예린은 무심한 듯 부리는 언어들로 미감을 이끌어내는 능이 상당했고 시적인 것을 발견해내는 밝은 눈도 인상 깊었다. 박다래의 원고는 끝까지 놓지 못했다. 평이한 진술 가운데 묘한 긴장감을 불러내는 능력. 숨어 있는 서정을 잡아채는 감각. 다만 문장의 반복이나 중복이 만들어내는 효과에 대해 스스로 한번쯤 의심해주었으면 하는 고언을 드리고 싶다.

 

백가경의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4편을 당선작으로 정한다. 백가경의 시는 명징한 언어로 작품을 구축한다. 어떤 모호성에 기대어 상상을 비약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사유와 진술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방법론은 자칫 단순해지고 평이해질 위험이 따르는 것이지만 시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 공고하게 세계를 확장시킨다. 미학적 자유로움은 정확함 위에서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름답고도 투명하게 상기시켜주는 시인이다.

 

앞으로도 내내 지난할 시간 속에서 시인만의 가장 고른 것들을 우리에게 꺼내주시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박준, 김행숙, 김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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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즈 캔슬링 / 윤혜지

 

 

우리는 한껏 미세해진 우리를 내려다보며 기내식을 먹었다 책을 뒤적거렸다 구식(舊式) 동물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그것은 동물들이 있다,로 시작된다

 

유기인지 실종인지 자연발생인지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구식의 동물들이 발견되었고

 

그들은 제각기 살고 있다

 

매일 똑같은 구절을 읽어줘도 너는 언제나 놀라워한다

 

연하게 와서 끊임없이 훼손되는 마음으로

 

침목(枕木)을 고른 적이 있다 비를 맞고 볕을 쪼이길 반복한 나무토막들 위로 뜨거운 기차가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달렸다 모든 것이 멈추면 아웃렛에 가서 새 셔츠를 사고 카페에 앉아 아주 뜨겁고 단맛이 나는 차를 마셔야지 하다가 자신이 데려올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영영 잊어버린 사례도 있었다 이것이 소음으로 소음을 지워내는 방식입니다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각자 잊어버린 것을 접어올리고 등받이를 세우고 얌전히 차례를 기다렸다

 

가팔라지는 날개

 

여러 개의 의자에 앉아야만 생각나는 것이 있다

 

이국의 빛과 온도
잎사귀와 해변의 선량한 사람들

 

규칙적인 것은 예상 가능해서 지울 수 있다 다만 어떤 통화 소리
바빠, 계속 바빠서 그래 배회하듯 하는 사과
그것은 틈입이다

 

나 좀 안아줘, 같은 말은 꼭 돌아누우면서 하는

 

어떤 나쁨은 너무 구체적이어서
꼭 대낮 같다

 

물결이 물결로
공들여 썩는 냄새를 맡았다

 

그것을 생각할 때
깨끗한 공기 속으로 무언가 빠르게 나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눈앞에서 파도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저마다의 계단처럼




 

[당선소감] 내 안팎 드나들며 지치지 않고 오래도록

 

글을 쓰면 종종 시적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시적이라는 게 뭔지 궁금해서 아예 시를 써봤는데 생각보다 잘 맞았다. 마음속에서 덜컥거리는 것, 어두운 것들을 꺼내 썼다. 흐릿하게 써도 되니까. 모호하게 써놓고 시라고 이름 붙이면 되는 줄 알던 때도 있었다.

 

가던 길의 방향을 틀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친구들과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 글쓰기스터디원들에게 감사하다. ‘지금-여기의 시 쓰기친구들이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면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가족에게도 고맙다. 동생들과 아빠, 그리고 엄마. 나는 자주 엄마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만삭의 몸으로 백일장에서 가을 강을 바라보며 글을 쓴 이야기. 상으로 받은 세계문학 전집을 들고 퇴근한 남편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듣고 있으면 그 어린 부부와 내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다가, 이내 참을 수 없을 만큼 좋아진다. 그러니까 이 상은 사랑하는 당신과 내가 함께 받는 두 번째 상이다.

 

삶은 계속 모호하겠지만, 정확한 시를 쓰고 싶다. 또 다른 시를 꿈꿀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린다. 이제 내 안팎을 유연하게 드나들면서 지치지 않고 오래오래, 내 곁에 있어준 사람들과 닮은 글을 쓰고 싶다.

 

마지막으로 허술하고 이상한 나를 견뎌준 동윤에게 많이, 깊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유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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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가능하면 오래, 더 가까이서 듣고 싶은 목소리

 

시가 고백의 장르라면 당연히 그 내용보다 방법이 중요할 것이다. 아무리 전언이 분명하고 어조가 강렬해도, 나와 당신 사이 징검돌을 하나하나 밟아오지 않는다면 금방 무용해지는 게 고백이니까. 이제 바위처럼 던져져 이 세계의 진의를 되묻는 식의 낯익은 새로움보다도, 무심하게 놓인 돌의 모양과 간격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존재를 확인한다. 물론 징검다리 이편과 저편에 있는 나와 당신세계와 언어또는 삶과 시로 바꾸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최종까지 함께 읽은 시는 그렇게 서로를 건네주는 것들이었다. 여한솔의 시가 시간을 견디는 슬픔을 연구실 불빛으로 켜놓는 저력을 보여줄 때도, 박다래의 시가 낯익은 순간의 낯섦을 비닐하우스의 물방울로 달아놓을 때도 그랬다. 전윤호가 사물과 세계를 빈틈없이 연결하고 정보영이 존재의 물질성을 생의 실감으로 드러낼 때, 우리는 이 시대의 고립을 단순히 고독의 심연을 헤매는 일로 소진하지 않고 세계의 이면을 파헤치는 힘으로 돌려놓는 데 놀라워했다.

 

윤혜지의 노이즈 캔슬링에는 기차 소리로 달려가는 지상의 시간이 있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공중의 시간이 있다. 날아가는 동안, 우리는 자신들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시는 부유와 진공이 꼭 공중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물결처럼 규칙적으로 이어지던 관계가 대낮의 파도처럼 무너질 때, 일상의 비애를 지워내는 것 또한 일상이고 그것이 진짜 비극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흔한 구식(舊式)의 삶을 일깨우는 것이 유일한 미덕이었다면 이 시를 내려놓고 각자의 비애 속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우리를 붙든 것은 그 말의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실어나르는 목소리였다. 숨기지도, 대놓고 드러내지도 않으며 이어짐과 멈춤의 무심한 굴절을 만들어내는 매혹 앞에서 우리는 가까스로 구식(舊式) 동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면 어떨까. 가능하면 오래, 그리고 더 가까이서 이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 심사위원 김현, 김행숙, 신용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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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과 용석 / 박지일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알게 되었다

 

세잔과 용석은 호명하는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하나의 인물이었다

 

나는 세잔을 찾아서 용석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하고 반대로 용석을 찾아서 세잔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했다

 

용석은 빌딩과 빌딩의 높이를 가늠하는 아이였고

세잔은 빌딩과 빌딩의 틈새를 가늠하는 아이였다

 

세잔과 용석 몰래 말하려는 바람에 서두가 이렇게 길어졌다

(세잔과 용석은 사실 둘이다)

 

다시,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세잔과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모르게 되었다

 

세잔은 새총에 장전된 돌멩이였다

세잔은 숲의 모든 나무를 끌어안아 본 재였다

세잔은 공기의 얼굴 뒤에 숨어있는 프리즘이었다

 

용석아

네게서 세잔에게로 너희에게서 내게로

 

전쟁이 유예되고 있다

용석아

네 얼굴로 탄환이 쏘아진다 내 배후는 화약 냄새가 가득하다

 

세잔과 용석은 새들의 일회성 날갯짓, 접히는

세잔과 용석은 수도꼭지를 타고 흐르는 물의 미래, 버려지는

세잔과 용석은 공중의 양쪽 귀에 걸어준 하얀 마스크, 아무도 모르는

 

나는 누구를 위해 세잔을 기록하나

용석을 기록하나

 

시의 모든 굴뚝에서

세잔과 용석이 솟아난다 수증기처럼 함부로

 

 

 

 

2020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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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하기의 재미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말이라는 것으로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퍽 힘들었습니다. 대화 도중 더듬기 일쑤였고 네, 글쎄요, 그러게요, 같은 짧은 말들을 주로 내뱉었습니다. 뱉지 못한 것들은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누군가 훔쳐간 물건처럼 제 것이었으나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글로 옮기는 것은 더욱 힘들었습니다.

 

누군가 그랬습니다. 신인은 패기가 있어야 한다고, 당선 소감에 앞으로의 방향성을 적음으로써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고. 저는 패기 있게 전진하는 것보다, 옆과 뒤를 살피며 걸음을 옮기는 것이 좋을 뿐인데요. 방향성 같은 거창한 것을 쓰기에는 이곳보다는 일기장이나 메모장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뿐입니다.

 

아무래도 제게 시하기의 이유는 재미였던 것 같습니다. 시라는 것은 제게 경전도 아니었고 성서도 아니었고일종의 부채감 같은 것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은 제게 시하기는 즐거운 행위였습니다. 정상성이라는 무서운 허구를 자꾸 들이미는 세계는 이상해 보였고 또 어찌어찌 세계라는 것이 굴러가고 있다는 것. 그것은 더 이상해 보였습니다.

 

그러니 제가 아는 것은, 어떠한 것도 모르는 저밖에 없다는 것. 그런 나와 함께 순간들을 잠시 붙잡는 것, 그곳에서 뛰어노는 것. 그런 것들이 재미있었습니다. 꾸려지는 찰나의 세계에 저를 잠깐 비집어 넣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었더라도 말입니다.

 

시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최 모르겠어요. 모르겠다는 질문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선생님들, 친구들, , , 재영 감사해요. 있는 어머니 아버지, 없는 동생, 가능성을 발견해주신 심사위원님들,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써보겠습니다. 과감하게 놀아보겠습니다. 이름 없는 이름들과 함께 순간을 붙잡고 있겠다고, 믿어보겠습니다.

 

 

 

 

 

[심사평] 고유한 호흡, 긴 여운

 

심사를 맡은 세 사람이 응모작들을 읽기 전에 한 약속 아닌 약속은 지금 한국 시에 부족한, 비어 있는 감각을 채워줄 만한 작품을 눈여겨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그 감각의 정체에 관해서는 굳이 합의하지 않았고, 다른 눈(관찰), (호흡), (언어)을 가진 작품들을 각자의 손에 쥐었으며, 그것들을 거듭 살핀 끝에 일곱 분의 응모작들을 최종심 대상으로 삼았다.

 

공 하나를4편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청사로 들어간 사람은 매끈했다. 행과 행 사이에 간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음이 믿음직했다. 그러나 응모작들이 모두 어딘가 낯익었다. ‘소풍과 정원4편은 구조적으로 잘 짜인 작품들이었다. 착상을 확장하는 힘이 느껴졌으나 시상의 전개가 다소 예상 가능한 차원에 머물고 있어서 심심했다. ‘그래, 나는 곤란할 때 메모지를 찾아4편은 투박함이 장점이었다. 쓰고 있는 이가 쓰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썼다는 느낌이었지만, “손가락에 핀 서러움을 삼키다 혀가 베였다와 같은 성긴 문장들이 다음을 기약하게 했다. ‘황소가 춤출 때4편은 다른 서정에 대한 기대를 일순 품게 했으나 뒷심이 부족했다. ‘오이, 오일러5편 역시 표제작에서 드러나던 활력이 응모작 전편에 깔려 있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최초의 충돌4편은 주저하지 않고 내뻗는 말의 에너지가 인상적이었지만 다소 중언부언이었고 그로써 시의 리듬이 굳어 있었다. 그리고 세잔과 용석4편이 남았다. 박지일님의 응모작들은 무엇보다 읽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머물렀다. 자신만의 고유한 호흡을 유지한 채 여간해선 서두르지 않았다. 따뜻하고 유려하다가도 일순간 차가워질 줄 알았다. 사유가 과장 없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두 사람을 호명하며 이룩하고 있는 당선작의 기체(氣滯)적인 시 세계는 정물적으로 보이면서도 또한 움직였다. 기록하면서도 함부로 기록하지 않고자 했다. 심사위원들은 이러한 매혹이 지금 한국 시에 필요한 감각임에 마침내 합의했다.

 

당선자에게는 조금 이른 축하를, 다른 지면을 통해 곧 만나게 될 이들에게는 조금 늦은 환대의 인사를 전한다. 심사 내내 당신들과 맺을 우정에 관해 생각했음을 덧붙인다.

 

심사위원 신용목·김행숙·김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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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작은 숫자 / 성다영

 

 

도로에 커다란 돌 하나가 있다 이 풍경은 낯설다 도로에 돌무더기가 있다 이 풍경은 이해된다

 

그린벨트로 묶인 산속을 걷는다

 

끝으로 도달하며 계속해서 갈라지는 나뭇가지

 

모든 것에는 규칙이 있다 예외가 있다면 더 많은 표본이 필요할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 공학자가 계산기를 두드린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렇기에 더 중요합니다 너무 작은 숫자에 더 작은 숫자를 더한다

 

사라져가는 모든 것은 비유다

 

망할 것이다

 

한여름 껴안고 걸어가는 연인을 본다 정말 사랑하나봐 네가 말했고 나는 그들이 불행해 보인다는 말 대신 정말 덥겠다 이제 그만 더웠으면 좋겠어 여기까지 말하면 너는 웃지

 

그런 예측은 쉽다

 

다영 씨가 웃는다

 

역사는 뇌사상태에 빠진 몸과 닮았다

 

나무 컵 받침이 컵에 달라붙고 중력이 컵 받침을 떼어낸다

 

물이 끈적인다 컵의 겉면을 따라 물방울이 아래로 모이는 동안 사람과 사물은 조금씩 낡아간다

 

조용한 공간에 금이 생긴다

 

되돌릴 수 없다

 

 

 

 

2019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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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낯선 변방에서 시를 쓰겠다

 

한 사람씩 부르며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하는 것만큼 촌스러운 수상소감이 없다고 누군가 말한 적 있습니다. 수상소감은 평생 남는 건데 멋있게 쓰라고 그랬습니다. 어떤 자세로 시를 쓸지 태도를 보여주라고 그랬습니다. 저는 사랑하고 고마운 사람에게 사랑하고 고맙다고 말하는 게 가장 멋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순간 가장 소중한 것을 소중하다고 말하는 것.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이것이 저의 태도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하고 고마워요.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제가 하는 일을 이해할 수 없어도 지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한아 사랑하고 고마워. 고운 언니 사랑하고 고마워요. 시현아 사랑하고 고마워. 양지야 사랑하고 고마워. 규찬, 광록, , 스터디 친구들 사랑하고 고마워요. 파랑새 친구들 사랑하고 고마워요. 김혜순 선생님, 이원 선생님, 송승환 선생님, 김언 선생님, 이광호 선생님, 김승일 선생님 사랑하고 고맙습니다. 부족한 작품을 읽어주시고 조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당선 소감은 2018730일 서울에 폭염경보가 내려진 날 미리 썼습니다.

 

그리고 2018730일 이후에 만난 준수에게 사랑과 고마움을 전합니다.

 

매년 그렇듯이 올해도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은 무기력한 순간에도 시를 썼습니다. 그때마다 미리 써놓은 당선 소감을 꺼내 읽으며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저는 시가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를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시를 씁니다. 문학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것 같아서 실망할 때에도. 시를 쓰다가 실패할 때에도. 삶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어서 깜짝 놀랍니다. 살아있다는 감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전화를 받고 사람들에게 당선 소식을 알렸습니다.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매우 놀라거나 그저 그런 반응. 매우 놀라는 사람은 대체로 시인을 위대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카프카가 말했듯이 시인은 사회의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보잘것없고 연약합니다. 그래서 지상 생활의 어려움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느낍니다. 시인이 연약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뭘까요.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삶을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물론 저도 미래를 걱정합니다. 20년 후에 임플란트 비용을 어떻게 낼 수 있을지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다는 감각은 깨끗하게 포장된 안전한 길 위에 있지 않습니다. 저는 길을 잃기 시작하면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설렙니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낯선 것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낯선 것은 변방에 있습니다. 변방에는 소위 정상이라는 괴상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변방에는 나이, 지역, 국적, 인종, 질병과 장애 여부, 학력, 가족 형태, 성적지향, 성정체성이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시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시를 쓰겠습니다.

 

 

 

 

[심사평] 쓰고자 하는 것을 쓰는 힘

 

적어도 시에서 고유한 세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세계를 향해 가는 언어적 의지일 것이다. 언어적 의지는 시인의 의지가 아니라 시인이 구사하는 언어에 숨어 있는 힘에 가깝다. 그 힘으로 인해 우리는 시가 만드는 특별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어떤 언어는 동시대 시인들에게 마치 공통감각처럼 통용되기도 하는데, 그 유행에 시인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방법론에 휩쓸린 나머지 자신의 세계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심사 마지막 단계에서 흰 토르소와 천사의 나날5편을 보낸 김혜린의 시를 더 기다려보기로 결정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김혜린은 유려한 연결 속에 특유의 정서를 끌어내는 장점이 있었다. 그것은 박다래, 김지미, 서귀옥, 유승아 등에게 지적된바, 시상의 전개가 인식의 과도한 관여로 자연스러움을 잃거나 언어적 질감을 해치는 단점을 감각적으로 극복한 사례였다. 그러나 그 감각이 가진 정서적 울림만큼이나 자신의 세계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고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우리는 모두가 잘 쓰고자 한다. 하지만 쓰려는 것을 잘 쓰는 것잘 쓰기 위해 쓰는 것은 다르다. 시가 고유한 세계를 갖는 이유는 그것이 언어의 장르이면서 또한 진실의 장르이기 때문이다. 성다영은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선작 너무 작은 숫자는 침묵과 수다를 격정 속에 교차시키고 딴청과 응시를 침묵 속에 빠뜨리면서, 이러한 언어의 불균질성이야말로 상실 앞에 선 마음의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말한다. 비록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사라짐의 의미를 깨달을 수는 없지만, 그 순간에 동참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들이 겪는 상실의 필연적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컵에 달라붙어 있던 컵 받침이 무심하게 다시 떨어지는 일에서조차도 말이다. 그것이 성다영 시가 가진 언어적 의지이다. 막 등장한 신인에게 그만의 세계를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하지만 시의 세계란 언제나 유예되는 것이어서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그 세계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야 한다는 믿음을 성다영은 가졌다. 신인에게 그보다 중요한 태도는 없다.

 

심사위원 장석남·김민정·신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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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바스에서 / 박정은

 

 

왁자지껄함이 사라졌다 아이는 다 컸고 태어나는 아이도 없다 어느 크레바스에 빠졌길래 이다지도 조용한 것일까 제 몸을 깎아 우는 빙하 탓에 크레바스는 더욱 깊어진다 햇빛은 얇게 저며져 얼음 안에 갇혀 있다 햇빛은 수인(囚人)처럼 두 손으로 얼음벽을 친다 내 작은 방 위로 녹은 빙하물이 쏟아진다

 

꽁꽁 언 두 개의 대륙 사이를 건너다 미끄러졌다 실패한 탐험가가 얼어붙어 있는 곳 침묵은 소리를 급속 냉동시키면서 낙하한다 어디에서도 침묵의 얼룩을 찾을 수 없는 실종상태가 지속된다 음소거를 하고 남극 다큐멘터리를 볼 때처럼, 내레이션이 없어서 자유롭게 떨어질 수 있었다 추락 자체가 일종의 해석, 자신에게 들려주는 해설이었으므로

 

크레바스에 떨어지지 않은 나의 그림자가 위에서 내려다본다 구멍 속으로 콸콸 쏟아지는 녹슨 피리소리를 들려준다 새파랗게 질린 채 둥둥 떠다니는 빙하조각을 집어먹었다 그 안에 든 햇빛을 먹으며 고독도 요기가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얼음 속에 갇힌 소리를 깨부수기 위해 실패한 탐험가처럼 생환일지를 쓰기로 한다 햇빛에 발이 시렵다

 

 

 

 

2018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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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열린 문틈, 더 깊이 걸어 들어가겠다

 

스무 살 무렵 한 프랑스 소설가가 제 삶에 문을 만들어준 이후, 어느 길로 가야 그 문이 열리는지 알 수 없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당선 통보를 받고 그 최초의 문틈이 살짝 열린 것 같아서, 드문드문 내리는 비처럼 온종일 떨었습니다.

 

터질 듯한 열망과 열정으로 꿈을 좇는 제게, “지금 자신의 방에 앉아 시를 쓰고 있다면 그는 이미 시인이라는 격려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계속 시를 쓸 수 있었습니다. 지금껏 수많은 실패를 겪으며 걸어왔던 것과 똑같이 앞으로도 그 수많을 실패와 함께 걷겠습니다. 시를 향해 걷겠습니다. 더 깊이 걸어 들어가겠습니다. 더 멀리 걸어가고 싶습니다.

 

부족한 제게 문을 열어주시고 귀한 기회를 주신 최정례, 장석남, 강성은, 신용목 심사위원님들과 경향신문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서툰 문장에서 저를 발견해주시고 시를 계속 쓸 수 있도록 고무해준 손택수 시인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최고의 튜터 신동옥 시인께 감사합니다. 추운 날에도 대학로에 모여 함께 합평했던 동기분들 고맙습니다. 언제나 한쪽 날개를 빌려주는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곁에서 수많은 좌절을 지켜보며 한결같이 지지해준 정근, 고맙고 사랑해요.

 

일요일 오후, 한강으로 이어지는 쭉 뻗은 천변을 따라 계속 걷고 싶지만 발길을 돌려야 하는 그 마음들을 생각하며 계속 쓸 것입니다. 우리들의 산책로에는 끝이 없습니다. 낮은 곳에서 끝없이 정진하겠습니다.

 

 

 

 

 

[심사평] 삶의 비극적 일면을 웅숭깊게 구현

 

완벽한 시 한 편이 이 세상에 있을까마는 만족스러운 그 한 편에 가닿기 위해 그저 그렇고 그런 시들을 백 편 천 편 쓰게 되는 것 같다. 예심을 통과한 열셋 응모자들은 시를 향한 열의와 욕망을 한껏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세세히 살피면서 어느 한 편을 선택하자니 만족스러운 작품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엉뚱한 단어로 문장을 조립 교체하여 새로운 감각을 만들려는 시도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적확한 단어가 놓일 마땅한 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의 생각은 구체화되고 발전하며 새로운 길을 찾는다. 정확한 문장을 통해 구체화되는 생각, 그 생각이 이행 혹은 비약하면서 깊이를 얻고 새 길을 찾을 때 시에 힘이 생긴다.

 

밀밭의 생성을 쓴 백선율은 초반부의 신선한 발상을 매력적으로 끌고 갔으나 중반 이후부터는 그 생각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하고 말았다. ‘경영혁신추진팀이라는 전혀 시적일 것 같지 않을 제재로 시를 시도한 변호이는 현대를 사는 우리 일상의 일면을 새롭게 보여주려 했으나 이분 또한 끝마무리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신선한 생각과 그 생각의 발전 과정과 비약의 정점을 내장한 시의 마지막 문장을 찾기 위해 우리는 시를 계속 시도하는 것이다. ‘모서리의 생활을 쓴 전윤수의 시를 마지막까지 당선작으로 고려한 이유는 이 도시의 한 모서리, 방 한 칸의 틈에서 신산스럽게 사는 우리의 일상이 언뜻 보였기 때문이다. 정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뚜렷하게 묘사했더라면 올해의 당선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심사자 둘이 동시에 손뼉을 친 한 작품을 발견하였다. 박정은의 크레바스에서는 절제된 감정을 인상적으로, 긴장과 이완의 국면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그 속에서 우리 삶의 비극적 일면이 웅숭깊게 구현되어 울림이 컸다. 2018년의 신인 박정은의 발견으로 우리 시단이 한층 풍요로워질 것을 의심치 않는다. 만족스러운 시 한 편을 만나게 되어 기쁘다. 그에게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장석남, 최정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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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소음 / 이다희

 

 

조용히 눈을 떠요. 눈을 뜰 때에는 조용히 뜹니다. 눈꺼풀이 하는 일은 소란스럽지 않아요. 물건들이 어렴풋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눈길로 오래 더듬으면 덩어리에 날이 생기죠. 나는 물건들과의 이러한 친교에 순응하는 편입니다.

 

벽에 붙은 선반에 대하여,

나에게 선반은 평평하지만 선반 입장에서는

필사의 직립(直立)이 아니겠습니까?

 

옆집에서는 담을 높이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점점 높아지는 담에 대하여, 시멘트가 채 마르기 전에 누군가 적어 놓는 이름에 대하여. 며칠째, 습한 날씨가 계속되고 투명한 문신 같은 이름이 피부에 내려앉습니다.

 

피부가 세상에 가장 먼저 나가는 마중이라면

나는 이 마중에 실패하는 기분이 듭니다. 나는 이 습기에 순응합니다.

 

하지만 만약 손에 닿지도 않은 컵이 미끄러진다면

컵을 믿겠습니까? 미끄러짐을 믿겠습니까?

 

유일한 목격자로서

이 비밀을 어떻게 옮겨 놓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이 습기는 누구의 이름입니까.

 

눈꺼풀을 닫아도 닫아지지 않는 눈이

내가 사라지고도 내 곁을 지키는 잠이

오래 나를 지켜봅니다.

 

 

 

 

2017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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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기록할 힘, 다른 이에도 위로 되길

 

사랑 안에서 무력한 저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할 힘이 있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부디 그 힘이 다른 사람에게도 위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상처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먼 길을 달려 노래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힘의 근원에 계신 이가 저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숲을 이루는 바람처럼

바람을 모르는 화살처럼

화살에 맞아 뒹구는 짐승처럼

노력하겠습니다.

 

저는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고 교수님들과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나희덕 교수님, 이승우 교수님, 신형철 교수님, 이장욱 교수님. 길이 막막할 때 교수님들을 떠올리면 다시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잘 배울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저에게는 있었습니다. 문학 이야기를 하며 같이 밤을 새웠던 친구들. 할 거 하는 모임, 스터디 멤버들 모두 고마워요. 항상 든든합니다. 지금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는 곧 지면에서 만나게 될 후배들이 많습니다. 지금 받은 축하를 곧 돌려줄 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엄마, 아빠, 언니. 늘 덜 좋은 것, 남는 것만 주는 것 같아 미안합니다. 더욱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 같은 가족을 만난 것도 저에게 행운입니다.

 

저는 2016년을 20대로서, 여성으로서 통과했습니다.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저에게 계속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에게 시인의 자리를 내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경향신문 감사합니다. 일상을 지켜내는 일에 게으름 피우지 않고 더욱 성장하겠습니다. 겸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와 사물의 의미 탐구하는 자세 믿음직

 

전체 응모자 1025명 중 예심을 통과해 본심의 대상이 된 열한 분의 작품들은 대체로 기존의 시적 관습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 그 이상으로 말을 정확하게 운용하고자 하는 노력은 부족한 듯했다. 예심 통과작 중에서 몇 편은 구체적 정황을 나타내는 단어의 앞뒤에 모호한 관념어나 철학적 냄새를 풍기는 용어를 결합하여 그 정황을 애매하게 뭉개버리는 시들이 있었다. 또는 이제는 사라져 버려 우리의 현재 생활과는 동떨어진 시골 전경이나 자연을 낭만적으로 그리며 이상화하여 사실감을 뭉개버리는 시들도 있었다. 박다래의 토끼의 밤과 김나래의 넙치는 생생한 말로 시작했으나 시의 마무리 부분까지 그 생기를 끌고 가지 못하고 긴장을 풀어버리는 허약함을 보였다. 주민현의 시들은 구문과 구문 혹은 연과 연을 긴밀하게 조직하는 힘이 부족해 보였다.

 

이들 중에서 돌올하게 신선하고, 침착한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며 생각을 펼쳐내고 있는 작품이 이다희의 백색소음이었다. 심사위원 둘이 서로 다른 감식안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마음으로 단번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며 흔쾌하게 이 작품을 올해의 당선작으로 결정하기로 하였다. 이 작품에 함께 호감을 표한 이유는 아마도 시적 화자인 나와 대상과의 관계, 즉 우리가 담겨 있는 이 세계 속에서 와 사물의 의미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자세가 믿음직스럽고, 말의 꼬리를 붙잡고 조근조근 할 말을 밟아나가는 말의 운용 방식 또한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당선작과 함께 응모한 나머지 작품들도 당선작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차분하고 여유 있는 목소리로 끈기있게 밀고 나가는 자세에서 저력이 느껴졌다. 시는 원래 뜻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이어서, 앞으로 시 쓰다 어려운 고비를 만나더라도 오늘의 기쁨을 원천으로 삼아 지치지 말고 정진하기를 바라며, 2017년 신춘의 새 시인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이시영, 최정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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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가 있는 골목 / 변희수

- 李箱에게

 

 

아오?

의자에게는 자세가 있소

자세가 있다는 건 기억해둘 만한 일이오

의자는 오늘도 무엇인가 줄기차게 기다리오

기다리면서도 기다리는 티를 내지 않소

오직 자세를 보여줄 뿐이오

어떤 기다림에도 무릎 꿇지 않소

 

의자는 책상처럼 편견이 없어서 참 좋소

의자와는 좀 통할 것 같소

기다리는 자세로 떠나보내는 자세로

대화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하오

의자 곁을 빙빙 돌기만 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 힘드오 그런 사람들은 조금 불행하오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오

 

의자는 필요한 것이오,

그런 질문들은 참 난해하오

의자를 옮겨 앉는다 해도 해결되진 않소

책상 위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백지가 있소

기다리지 않는 질문들이 있소

다행히 의자에게는 의지가 있소

대화할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저 의자들은 참 의젓하오

 

의자는 이해할 줄 아오

한 줄씩 삐걱거리는 대화를 구겨진 백지를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을 이해하오

이해하지 못할 의지들을 이해하오

의자는 의자지만 참 의지가 되오

의자는 그냥 의자가 아닌 듯싶소

의자는 그냥 기다릴 뿐이오

그것으로 족하다 하오

 

밤이오

의자에게 또 빚지고 있소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소

따뜻하게 남아 있는 의자의 체온

의자가 없는 풍경은 삭막하오 못 견딜 것 같소

의자는 기다리고 있소

아직도 기다리오 계속 기다리오

기다리기만 하오

 

여기 한 의자가 있소

의자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골목을 보고 있소

두렵진 않소

 

 

 

 

2016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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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의자는 시를 낳는 성소궁합 잘 맞는 난 행운아

 

이 세상에는 의자가 참 많다. 카페에도 도서관에도 지하철에도 의자는 넘쳐난다. 아니다. 의자보다는 엉덩이가 훨씬 더 많다. 내게도 늘 의자를 그리워하는 엉덩이가 있다. 가끔 시를 쓰는 대신 차라리 나무를 심었다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결국 나는 그 나무로 또 의자를 만들었겠지만 이제 의자와 나무가 같은 혈족이라는 걸 안다.

 

오늘은 잠시 의자와 떨어져 있었고 황송하게도 누워서 당선소식을 받았다. 몽중일까. 눈을 뜨고 있어도 꾸는 꿈처럼 더듬더듬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본다. 여전히 내 머리맡을 지키는 의자, 이 기회에 의자에게 한마디 안 할 수가 없다. 의자여! 정말 미안하다, 아니 참 미안했다, 그리고 다시 더 미안하겠다. 당선소감을 쓰는 지금도 나는 의자를 믿고 까분다.

 

나는 행운아다. 의자와 궁합이 잘 맞는 엉덩이를 갖고 있으니. 시를 빌미로 의자와 엉덩이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해가 즐겁다. 언젠가 삐거덕거리던 시들이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어주는 날들이 올까. 대화는 계속될 것이고 의자는 나의 모든 시들이 마지막으로 태어나는 성소다. 어떤 자세로 의자에 앉아야 할까 늘 함께 고민하는 구밀‘13나의 시동지들과 행운을 나눈다. 의자에 항상 따뜻한 방석을 놓아주는 나의 가족 연, 동 그리고 남편 너무 고맙다. 심사를 해주신 이시영, 황인숙 선생님 그리고 손택수, 김행숙 선생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경향신문사에도 깊은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영광은, 의자에게 바친다.

 

 

 

거기서부터 사랑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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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기존 틀 차용했지만 사유를 끌고 가는 의식 우뚝

 

14건의 응모작이 예심에서 올라왔다. 그중 우선 고른 작품이 의자가 있는 골목’ ‘벽과 대화하는 법’ ‘투명한 발목이었다. 이 과정이 수월했다는 건 좀 서글픈 일이다. 새로운 종의 시를 포획하기를 기대하며 무엇이든지 빨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심사자들의 눈에서 그토록 쉽사리 빠져나가는 시들이라니. 재량껏 성심을 다한 시들을 보내주신 분들께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하다. , 하지만 왜 그리 겉도는 거지? 붕붕 떠 있지? 한 걸음 더 성심을 담으시라. 진정을 담으시라. 하긴 열네 분의 시가 근사하면 얼마나 머리가 터졌을까. 고마운 일이다만.

 

벽과 대화하는 법은 감각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이이가 갖춘 표현력에 세상-사물을 읽는 힘, 인식의 힘이 더해지기를 바라며, ‘투명한 발목의자가 있는 골목을 최종심으로 놓았다. ‘투명한 발목은 섬세하고 예민하고 차분한 묘사와 어조로 독자를 시의 정황 속으로 천천히, 깊게 이끄는 시다. 그런데 이 매력적인 시에도, 흠을 잡자고 눈에 불을 켜니, 성근 부분이 있어 아쉽다. ‘의자가 있는 골목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로 시작되는, 이상의 가장 널리 알려진 시 거울의 말투를 베껴서 쓴, 즉 이상 풍으로 쓴 시다. 새로운 시인을 가려 뽑는 자리에 기존 시인이나 시를 패러디함으로써 오마주를 보이는 시를 뽑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 틀 속에 자기 생각, 자기만의 세계가 담겨 있는 점을 높이 샀다. 사유를 길게 끌고 나가는 힘 있는 진술 속에 시인 의식이 우뚝하다. 그의 다른 응모작들도 두루 소재를 다루는 솜씨가 예사가 아니어서 믿음이 간다. 건필을 빌며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이시영·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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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 / 김관용

 

 

전성기를 지난 저녁이 엘피판처럼 튄다

도착해보면 인저리타임

목공소를 지나 동사무소, 골목은 늘 복사된다

어둑해지는 판화 속에서 옆집이라는 이름을 골라낸다

옆집하고 발음하면 창문을 연기하는 배우 같다

보험하는 옛애인이 전화한 날의 저녁은

폭설과 허공 사이에서 방황하고

괴외하는 친구의 문자를 받은 날 아침은

접시 위의 두부처럼 무심해진다

만약이라는 말에 집중한다

만약은 수비수 두세 명은 쉽게 제쳤으며

늘 성적증명서보다 힘이 셌다

얇은 사전을 골라 가장 극적인 단어를 찾는다

아름다운 지진이란

지구의 맨 끝으로 달려가 구두를 잃어버리는 것

멀리 있는 산이 침을 삼킨다

하늘에선 땅을 잃은 문장들이 장작 대신 타고

원을 그리며 날던 새들의 깃털이 영하로 떨어진다

원점은 어딘가 빙점과 닮았다

양철 테두리를 한 깡통처럼

전력을 다해 서 있는 트랙처럼

잠시라도 폼을 잃어선 안 된다

전광판이 꺼지더라도

경기가 끝나면 유니폼을 바꿔 입어야 한다

 

 

 

 

2015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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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책으로 만났던 이들이 나를 선택눈밑이 뜨거워

 

올해는 유독 어머니의 투병이 아름다웠고 건강을 찾은 그녀에게서 상상할 수 없는 감사의 의미와 진폭을 깨달았다. 서랍 어디쯤에 크로키한 태양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점퍼 안쪽 주머니에, 또는 뒷주머니에 꼬깃꼬깃 넣고 다녔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을 까맣게 잊었다.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누구나 잊고 산다. 나는 어느 지층에 숨어 있던 언어였을까. 어떤 문장은 대답할 수 없어서 무거웠고, 어떤 대답은 질문의 근처에서만 맴돌았다. 밤의 유전자가 열목어처럼 자라는 것인지, 열목어에선 왜 자꾸 눈먼 단어들만 떠오르는지. 열차가 지나간다.

 

우선 영덕 스님께 감사드린다. 막막하던 내게 화엄을 소개해 주셨고 감수성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난 스님이 야단치셨던 그 계절을 잃고 싶지 않다. 이원 선생님, 퇴고를 가르쳐주셨던 그 분을 감격스러운 8주라 부르고 싶다. 121일 임택수형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차영일, 말을 아껴야 할 사람들.

 

서울에서 이주해 적응하기 힘들던 울산생활이 있었다. 이런 형태의 이주는 언제나 상투적이고 적응의 실패는 늘 언어가 문제다. 세리을이란 고교 문학동아리에 들었고 재미있었다. 오래전이지만 이런 일들은 대체로 잊히지 않는다.

 

무엇보다 책으로만 만나뵈었던 분들. 나를 선택하셨다. 말들이 수증기처럼 끓어오르며 눈 밑이 뜨겁다. 그런데 어떻게 표현하더라도 굳어진 수증기는 이렇게만 고정되는 것이다. 이시영, 황인숙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균열·의외성자본의 시대, 시가 필요한 이유 증명

 

선자들 손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네 편이었다. “벚꽃은 지상에서 초속 5센티미터/ 속도로 떨어지고 있겠지라는 빛나는 감성을 품은 휠체어 드라이브는 무리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직관을 형상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세계를 조용히 응시하는 이 시편은 시인의 상상력이 뜻밖의 시적 전개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간밤 느티나무 찻상이 쩍/ 갈라졌다는 직핍으로부터 출발한 느티나무 찻상은 사물의 갑작스러운 붕괴로부터 빛과 향을 흡입하는 착상이 신선하고 발랄했다. 그러나 이 시인 역시 예상 가능한 상상력의 구도에서 비약하지 못한 채 익숙한 은유로 생의 비의를 드러내는 데 안주했다. 어느 병동에서의 남녀의 갈등을 바둑에 빗대어 버릴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결심을 가진 백과/ 그것을 초조하게 바라보는 흑 사이로 묘사하며 사뭇 긴장감을 자아내는 직선을 이탈한 두 남녀가 모이는 점역시 우리 삶의 한 단면을 아프게 드러냈으나 곳곳의 상투적인 시행들의 병렬로 인해 이른바 언어 자체가 살아있는 물활’(物活)의 경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응모작들 중 가장 두드러진 작품은 선수들이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도 그러했지만, 이 시인은 무슨 제재를 다루든지 일거에 대상을 장악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과 리듬으로 시를 운산(運算)하는 범상치 않은 솜씨를 보여주었다. 특히 표제작인 선수들은 언어와 언어가 충돌하며 파열하는 섬광 같은 것을 뿜어내면서 자기 시를 전력을 다해 서 있는삶의 트랙으로 밀어붙인다. 그리하여 이 시는 시적인 것으로부터의 일탈을 통해 다른 시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한치의 오차도 허락지 않는 이 주밀한 자본의 세계에서 시가 필요한 것은 바로 이 균열과 의외성이다. 트랙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결말을 짐작할 수 없는 것으로의 이 과감한 투신의 성과를 당선작으로 미는 데 우리는 주저하지 않았다.

 

심사위원 황인숙, 이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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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진 교육 / 심지현

 

 

오빠 내가 화장실 가다가 들었거든, 내일 아줌마가 우릴 갖다 버릴 거래. 그 전에 아줌마를 찢어발기자. 우리가 죽인 토끼들 옆에 무덤 정도는 만들어 줄 생각이야. 토끼 무덤을 예쁘게 만들어 주는 건 오빠의 즐거움이잖아. 아줌마는 가슴이 크니까 그건 따로 잘라서 넣어야겠다. 그년의 욕심만큼 쓸데없이 큰 젖. 여긴 아줌마가 오기 전부터 우리 집이었어, 난 절대 쫓겨나지 않을 거야.

 

너 시들지 않는 새엄마를 시기하고 있구나. 아버지가 무능해서 고생하는 예쁜 나의 새엄마. 그녀가 나를 버려도 괜찮아. 개처럼 기어가서 굶겠다고 말하면 그만인걸. 그게 안 먹히면 그녀의 가슴을 빨고 엄마라고 부르면 되지. 잠 설치는 아이를 달래는 척 밤마다 날 찾을지도 몰라. 자꾸 커지는 나를 본다면 오히려 그녀는 아이가 되겠지. , 못생긴 엄마가 떠나면서 주고 간 선물. 예쁜 우리 새엄마!

 

 

 

 

2014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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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읽히는 것만으로도 영광더 좋은 글 향해 정진

 

버려야 채워지는 것이 있어요. 허공에 잠긴 밤들을 살았지요. 학교에서는 글을 썼고, 그렇지 않은 시간엔 질투를 했어요. 저를 글 쓰게 하는 사건들이 올해 참 많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처럼 진심을 쓸게요.

 

폭탄이 터졌는데 어쩐 일로 기쁘대요? 어머니, 아버지. 조금 다른 걱정들을 하기로 해요. 바르게 걸을 수 있는 계기이자 감동인 현우에게 아픔이 다신 없기를.

 

김수복 선생님, 박덕규 선생님, 강상대 선생님, 최수웅 선생님. 매일 되새길 수 있는 배움들이 있어요. 위태롭던 제 글에 바닥을 그려주신 이덕규 선생님 감사해요. 새봄맞이, 그 처음을 가르쳐주신 이시영 선생님, 그 시간들로 글을 썼어요.

 

다 지난 4년 전이 여태껏 벅찬 이유, 문과 임, , , . 그립지 마요. 든든한 재롱받이 요섭 선배와 기호 선배, 동우. 아름다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시누리. 우리에겐 무엇이라도 괜찮을 논쟁이 있어 즐거워요. 단단하나 날카로운, 성규는 내 성장의 원동력. 우리 서로의 부러움을 자랑하도록 해요. 내가 먼저 말할게요, 그대의 가슴! 읽히는 것만으로도 영광임이 분명해요. 감사해요. 김사인 선생님, 황현산 선생님. 아무리 잘해도 부족한 보답이겠지만 더 좋은 글을 보일 수 있도록 정진할게요.

 

 

 

 

[심사평] “불편·설렘 동시에 안겨주는 당당함생생하다

 

본심에 넘어온 10(장혜령·김영미·서진배·서명옥·이현우·김묘숙·박승렬·이호준·엄기수·심지현)의 후보작들을 검토하며, 오늘의 삶과 의식이 처한 현실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후보작들 다수가 그 음울과 살풍경을 막막하게 앓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 고통의 복판을 피해갈 시의 길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을.

 

시는 참말을 하려 한다. 담긴 메시지가 논리적·도덕적으로 맞다거나 합당하다는 뜻이 아니다. 태초 이래 무수한 사람들이 살고 갔지만, 그럼에도 모두의 생이 진부하기는커녕 매순간 새롭고 아프고 기막힌 것이며, 누구에 의해 대신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참이다. 그때 참말, 설사 낯익은 메시지를 싣고 있는 듯 보일지라도 반드시 새롭고 절실하다. ‘참말은 또한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습성화된 느낌과 생각과 말의 회로로부터 우리를 흔들어 깨우기 때문이다. 그러한 참말의 힘은 겉을 꾸며 흉내낼 수 없다. 오직 온몸을 던진 낮은 포복을 거쳐 이루어질 뿐이다.

 

신춘문예가 일부 문학 지망생들의 잔치를 넘어, 전 한국어 사용자들의 공동 관심사이며 그래야 마땅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리의 기꺼움과 설움과 고뇌를, 우리의 아름다움과 매혹과 깊이를, 나아가 우리의 공포와 분노, 우리의 파렴치와 비열함까지를 우리 자신보다 더 예민하게 앓고 노래해줄 새 소리꾼, 새 만신, 새 예언자를 기대하는 사회적 형식이기 때문이다.

 

재독을 거쳐 우리는 이호준·엄기수·심지현 3인으로 일단 후보를 압축했다.

 

이호준의 감각과 솜씨는 훌륭한 것이었다. 그의 매력적인 언어들은, 필요하다면 신선함조차 연출할 수 있을 만큼 잘 다듬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 노련함과 자신감의 과잉이 오히려 시적 모험의 기개와 순결성을 손상하기도 한다는 것을 지적해 둔다.

 

엄기수도 이미 능숙한 시인이었다. ‘이끼소녀등의 시편들이 보여주는 바 비애를 갈무리해 내는 낮은 톤의 목소리는 오랜 습작의 내공을 엿볼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의 어투와 시적 조형방식에는 선배 시인들을 떠올리게 하는 낯익음이 없지 않았고, 시들이 좀 더 다채로울 필요도 있을 것이다.

 

심지현의 당돌함 앞에서 우리는 불편한 동시에 설렜다. 독자들도 그러할 것이다. 그의 시들은 어딘가 불균형한 듯하지만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는 새롭고 생생한 발화로서의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정면으로 감당하기 쉽지 않을 삶과 세계의 잔혹과 비극성을 그는 피하지 않았다. 슬픔과 상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의 언어들은 감상에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노련과 안정감보다 심지현의 이 용기와 젊은 당당함 쪽을 선택했다. 세상의 고통과 환희를 자신의 것으로 깊이 앓는 좋은 시인이 되기를 빈다.

 

- 심사위원 황현산, 김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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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번동 / 이해존

 

 

1

햇살은 오래전부터 내 몸을 기어다녔다 문 걸어 잠근 며칠, 산이 가까워 지네가 나온다고 집주인이 약을 치고 갔다 씽크대 구멍도 막아 놓았다 네모를 그려 놓은 곳에 약 냄새 진동하는 방문이 있다 타오르는 동심원을 통과하는 차력사처럼 냄새의 불똥을 넘는다 어둠 속의 지네 한 마리, 조정 경기처럼 방바닥을 저어간다 오늘은 평일인데 나는 百足으로도 밖을 나서지 않는다

 

2

산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 희끗한 뼈마디를 드러낸 절개지, 자귀나무는 뿌리로 낭떠러지를 버틴다 앞발이 잘리고도 언제 다시 발톱을 세울지 몰라 사람들이 그물로 가둬 놓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곪아가는지 파헤쳐진 흙점에서 벌레가 기어나온다 바람이 신음소리 뱉어낼 때마다 마른 피 같은 황토가 쏟아져 내린다 무릎 꺾인 사자처럼 그물 찢으며 포효한다

 

3

저마다 지붕을 내다 넌다 한때 담수의 흔적을 기억하는 산속의 염전, 소금꽃을 피운다 옷가지와 이불이 만장처럼 펄럭이며 한때 이곳이 물바다였음을 알린다 흘러내리지 못한 빗줄기를 받아내는 그릇들,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방안에 고인 물을 양동이로 퍼낼 때 땀방울이 빗물에 섞였다 오랫동안 산속에 갇혀 있던 바다가 제 흔적을 짜디짠 결정으로 남긴다 장마 끝 폭염이다 살리나스*처럼 계단을 이룬 집들을 지나 더 올라서면 산봉우리다 계단 끝에 내다 넌 내 몸 위로 햇살이 기어다닌다

 

* 페루 고산의 계단식 염전.

 

 

 

 

2013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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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지치지 않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사무실 마감 일 때문에 정신없을 때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올해도 이렇게 지나가버리는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잊기 위해 일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울 때였습니다. 연말연시를 생략하고 2월의 어느 일상으로 앞질러가고 싶을 때였습니다. 믿기지 않아 당선 전화를 받고난 후, 누군가 잔인한 위로의 장난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확인 전화까지 해야 했습니다.

영화 <폴락>에서 피카소는 ‘질서’를, 폴락은 ‘무질서’를 화폭에 담아냅니다. 피카소는 성공을 거둘수록 행복해지지만, 폴락은 그 반대가 됩니다. 성공할수록 질서가 잡히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리겠습니다. 최종심에서의 수많은 고배가 모루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위로를 건네준 고마운 분들이 많습니다.

옆에 계신 것만으로도 가르침이 되어주시는, 언제나 현역이신 정진규 선생님그리고 이승훈, 김소연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분화구 절벽에 둥지를 틀어 날아오를 수밖에 없는 태생의 시천동인들, 전형철, 윤성택, 안시아, 최치언, 천서봉, 박성현, 서동균 시인, 김솔 소설가, 고영, 박후기 선배님, 가까이에서 언제나 힘이 되어주신 부모님과 최희강 시인 그리고 등단을 손꼽아 기다려준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끝으로 긴 어둠에서 불을 밝혀 주신 황현산, 박주택 심사위원님과 경향신문사에 감사드립니다. 굳은 결의는 변명의 다른 이름일지 모릅니다. 그냥 지치지 않고 열심히 쓰겠다는 말로 대신합니다.

 

 

당신에게 건넨 말이 소문이 되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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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는 자신을 비워줄 때 조금씩 다가오는것”

 

모든 것이 그렇듯이 시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여 기예를 넘어 정신의 한 경지를 드러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시다운 시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온힘을 다하여 시에 헌신하고 시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비워줄 때 시는 온전한 모습으로 조금씩 다가온다. 시는 결코 설익은 자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최종에 오른 네 편의 시 가운데 ‘그 여자의 거실에는 기차가 달려가지’ 외 4편을 응모한 서진배의 시는 발랄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어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산문적 진술에 기대고 있고 급격히 장면을 전치시키거나 전복시켜 시를 읽는 데 재미만큼의 감동을 주지 못했다. ‘침묵의 불법 점거에 대한 진술서’ 외 4편의 김희정의 시는 소음과 환청, 자본주의와 물신과 같은 도시적 생태를 다루고 있으면서 눅눅한 서정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시의 관절이 부드럽지 못하다는 점에서 아쉽게 선외로 밀렸다. ‘귀갓길’ 외 4편의 김창훈의 시는 “그림자에도 단내가 난다” “노을에도 마블링이 있다”와 같이 선후 문맥을 잇는 뛰어난 관찰력과 세밀한 묘사력이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응모작의 수준이 고르지 못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녹번동’ 외 4편을 응모한 이해존의 시는 그간의 적공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어 당선작으로 합의를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을 구조(構造)하고 있는 안과 밖의 경계에 대해 사유와 감각을 적절하게 가로지르며 생의 경험이 곧 시의 경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 다른 무엇보다도 신뢰할 수 있었다.

모름지기 시는 시여야 한다는 기원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는지조차 모른다면 시는 언제 찾아올 것인가? 당선자의 대성을 기대해본다.

 

심사위원 황현산·박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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