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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국어연습 혹은 그림 / 오다정

 

 

달력 뒷장을 읽는다

무심한 세월이 쓰고 간

투명한 글씨 위 아버지

長江 한 줄기 그리셨다

마킹펜이 지난 자리

푸른 물결 굽이굽이

 

배를 띄우랴

가보지 못한 세월 너머로

進進, 언덕으로 포구로

그 어디 너머로 進進

화면 가득 띄우고도 모자라

반 토막만 남겨진 배

 

돛대도 물결도 반 토막이

된 자리, 아버지 또 그리신다

정직한 삼각형

· · ·

넘어보자 했으나 넘지 못했던

능선 뾰족뾰족 이어진다

 

빨갛고 검은 日歷의 뒷면

연습 없어 미리 살지 못한 세월로

열 두 척 반, 배 떠간다

아버지, 그려내신 한 장 그림

소실의 문자 빼곡히 박힌

발음되지 않는 국어책 같다

 

 

 

 

 

[당선소감] 글자들에 세상을 구겨넣던 나...오늘은 오래 들여다봐 주세요

 

노래를 듣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하고 손장단을 맞추기도 하고 따라도 불러 봅니다. 그러다가 잠잠히 그저 듣기만 합니다. 세상에 노래는 얼마나 많던가요. 얼마나 많은 가수들이 그의 순정을 다해 노래해 왔던걸까요. 그들의 노래는 저렇게 아름다운데 나의 노래는 왜 이렇게도 못생겼을까요? 그런데도 거기 누군가는 제가 부르는 노래에 귀를 좀 귀울여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바로 당신이었으면 합니다. 못생긴 노래에 담은 지극한 순정함과 곡진함을 당신이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외로움에 지쳐 저의 노래들이 시들기 전에 말입니다

 

다르게 말 할 줄 몰라서, 다른 말을 배우지 못해서 아무도 봐주지 않는 글자들에 죽어라고 나의 세상들을 구겨 넣고 앉았었던 저를 당신은 기억하실까요? 못생긴 노래를 힘을 다해 부르고 앉은 저를, 저의 지난 날들을 당신은 기억하실까요? 저의 기억이 혹여 당신의 기억인 걸까요?

 

저는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 대한 빚을 쓰는 것이라고만 믿어 왔던 제가 떠나 온 자리는 너무 먼 곳이어서 이젠 처음 빚을 냈던 자리로 갈 수 없어요. 당신이 저를 무너뜨린 게 아니라 제가 절 무너뜨렸던 걸까요?

 

보세요, 정신의 가장 차가운 바닥에 나를 쓰러뜨렸던 당신, 몇 번이고 꺾이면서도 무릎을 털며 일어서려 할 때마다 다시금 나를 주저앉히곤 했던 당신, 삼엄한 당신, 다정한 당신, 그리고 우스운 당신, 오늘은 저를 좀 오래 들여다봐 주세요.

 

가족이 힘임을 다시금 깨닫게 하신 아버지 어머니, 형부 양웅식 큰언니 김종민, 영원한 마음속의 은사, 민해 선생님, 신대철 선생님, 지치지 않고 나를 믿어 주었던 미선언니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연옥, 용옥, 향선. 모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밝은 눈으로 늙은 미래를 축복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열심을 다해 노래부르리라 다짐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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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은유·상징 적절히 조율된 수작앞으로 좋은 시인 되리라 확신

 

오다정씨의 '중세국어연습 혹은 그림'은 당선작으로 손색없는 시다.

 

이 분의 시에는 우선 어려운 말이 없다. 시에 어려운 말을 쓰면 정말 어려워진다. 그런데 본심에 올라온 시가 대개 그러한 시였다. 시는 간결하고 핵심적으로 삶을 노래하자는 것이므로 문장이 헛갈리거나 하면 그냥 놓아버리게 된다. 누가 끙끙거려가면서까지 시를 읽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있을 건 다 있다. 행과 행 사이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으며 사유의 도약은 읽는 사람을 화들짝 깨어나게 한다. 시와 산문의 구별점이 그것 아니겠는가.

 

당선작은 은유와 상징, 환상, 그리고 우리네 생활이 적절히 조율된 수작이라 할 만하다. 가령 '마킹펜이 지난 자리/ 푸른 물결 굽이굽이// 배를 띄우랴'에서 연과 연 사이의 바다를 보라! 게다가 '반 토막만 남겨진 배'는 우리를 금세 이 세상 저편으로 싣고 가지 않는가. 더불어 '굽이굽이' , '進進', '뾰족뾰족' 등등 적절히 배치한 리듬은 시의 맛을 크게 살려준다. 이만한 '언어''사유'라면 당선작으로 충분했다. 최근 회자되는 장광설의 시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상쾌한 작품이다. 앞으로 좋은 시인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마지막까지 논의한 작품은 최인숙씨의 '무지개' 와 허영둘씨의 '고요를 잘 살펴보면' 등이었다. 모두 잘 짜여진 작품들로 읽혔으나 굳이 단점을 들라면 너무 기성품 같다는 것이었다. 조금은 서툴지만 독자의 감각을 자극하는 작품이 더 새롭고 매력적이라는 점에서 아쉽게 내려놓게 됐다. 이 분들 역시 훗날 좋은 시인으로 만나게 되리라고 믿는다. 단지 운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해주시기 바란다.

 

- 심사위원 : 안도현, 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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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차우 / 김진기

 

 

사자개 차우차우

긴 갈기를 바람에 빗질하며 서쪽 하늘을 바라본다

칠장사 참배객의 발길이 어스름을 따라 사라지고

스님의 독경 소리 어둠에 몸을 누이면

티베트에서 온 차우차우

몰래 경내를 빠져 나가 칠현산에 오른다

바라보면 멀리 눈 덮인 고향이 보인다

달라이라마가 포탈라 궁을 버리고 망명길에 오른 이후

그는 이곳으로 흘러왔다

호기심 어린 눈들이 발소리 지우면서 다가오면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듯

괜찮다 괜찮다 가벼이 꼬리 흔든다

꿈속에서나 만나는 그리운 히말라야 캄파라 패스를

이불처럼 두른 라싸 포탈라 궁

누가 구름 위에 백홍의 궁전을 지었나

돌아가는 마니차는 눈빛에 반짝이고 막 피어 올린 향내가

미로 같은 포탈라 경내를 적신다

얼어붙은 티베트 고원을 오체투지, 몇 달을 넘어온 장족이

다리를 질질 끌고 도착할 때마다

차우차우 맨발로 뛰어 나간다

고행을 먹고 사는 것인지

갈라터진 손바닥 무릎에서 흐르는 피, 내세의 제단에 올리면

신은 때때로 길을 비켜 준다

소문은 바람을 타고 먼저 왔는지

칠장사 차우차우가 도착하기 무섭게 라싸 차우차우들이 몰려나온다

부여잡고 얼굴 부비는 뭉클한 안부가 골목에 흥건하다

 

 

 

 

 

차우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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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작 늦어 만만찮던 시인의 길머무르지 않고 더욱 정진할 것

 

일요일 아침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좀처럼 흥분을 모르던 내 단단한 노하우가 맥없이 빗장을 풀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남들은 "그 나이에 무슨 시 공부냐? 편히 지내지." 하며 핀잔 반 충고 반 던지곤 했다. 그러나 아득한 꿈은 나를 지금에야 불러냈다. 대학에서 4년간 국문학 공부를 한 나는 배고픈 시인의 길을 버리고 현실을 좇아 취업을 택했다. 3년 전 다시 여유를 찾아 시에 매달리게 된 것은 4년 동안 공부한 문학의 애착이 아까워서였다. 나는 국문학 중에서도 특히 시가 좋았다.

 

그러나 시세계에 발을 들여 놓고 보니 이쪽은 결코 만만한 동네가 아니었다.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복병, 선수마다 꺼내든 무기가 달랐다. 같은 말을 표현하는데 표현하는 방법이 신출귀몰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수없이 망설였다. 아직도 정확한 길은 모른다. 남들이 하루 5시간을 자면 나는 4시간을 자야하고 남들이 하루에 시 10편을 읽으면 나는 15편을 읽어야 한다. 나는 지금에 머무르지 않겠다. 뒤 돌아보지 않겠다.

 

기축년 한해는 내 생애에서 가장 힘들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혔다. 인생을 다시 공부해야 했다. 돌아가신 부모님은 나를 기특하게 보신 것 같다. 태백산 검용 소물이 흘러 한강의 젖줄이 되듯 내 고향의 맑은 마음도 시처럼 흐를 것이다. 항상 내가 어려울 때 손을 내밀면 조건 없이 도와준 인간미 풍기는 여러 선생님들의 정이 생각난다. 그리고 객지에서 동분서주하는 내 아내와 중국의 큰 아들 내외와 손자 동주, 싱글 의 둘째 아들 모두와 기쁨을 나누고 싶다. 특히 미숙한 내 글을 뽑아 불씨를 당겨 준 경인일보 관계자와 심사 위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심사평] 성찰로 이끄는 힘 빼어나고진정성·서정적 울림 돋보여

 

경기·인천 지역의 유일한 신춘문예답게 예심을 거쳐 온 응모작들은 수준이 상당했다. 우선 자기만의 생각이나 체험을 시의 그릇에 얼마나 잘 담아내는가에 주목하며 정독에 들어갔다. 또 은유를 거친 삶의 육화라는 시의 본질적인 특성도 염두에 두었다. 이즈음 시단에 팽만한 시류 좇기나 손끝에서 만든 것 같은 작품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정독 후 고른 작품은 권대희의 '지팡이를 두드리는 부처님', 김진기의 '차우차우', 김태환의 '분필', 이영희의 '풍천장어', 이담정의 '사라진 상징'이었다. 다시 이들의 작품이 갖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따져 나갔다. '지팡이를 두드리는 부처님'은 내용의 진정성을 평가받은 반면 뒤로 갈수록 처지는 완결성 부족과 작위성 등이 지적됐다. '분필'은 가장 많은 작품을 보낸 의욕적인 습작으로 눈길을 끌었다. 특히 '분필'의 호소력과 전달력이 두드러졌지만 잦은 반복으로 인한 이완과 직설적인 면이 거슬렸다. '풍천장어'는 신선한 발상과 언어 다루는 솜씨를 인정받은 데 반해 공소한 느낌과 어디서 본 듯한 상투성으로 내려놓게 되었다.

 

마지막 남은 '사라진 상징''차우차우'를 놓고 논의를 거듭했다. '사라진 상징'은 무엇보다 발랄한 상상력에 언어 감각이나 비유 구사가 능했다. '사라진 상징', '주파수 이론'처럼 제목에서도 습작의 시간이 엿보였지만, 산문시 형태나 기법 등의 면에서 시류 혹은 기성 시인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낯익음이 지적됐다. 그와 달리 '차우차우'는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과 서정적 울림이 돋보였다. 특히 라싸 '포탈라 궁'이라는 우리 시대의 한 정신적 극점을 현재의 구체적 장소에 겹치면서 성찰로 이끄는 힘이 빼어났다. 티벳에서 온 '차우차우'가 안성의 '칠현산'에 올라 '멀리 눈 덮인 고향'을 보는 모습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고행을 통해 올라야 하는 어떤 가치나 세계를 환기하는 힘에도 신뢰가 갔다. 시 당선작은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고통을 통해 도달해야 할 화해 같은 정신의 향기를 보여준다. 특히 칠장사가 임꺽정이 머물며 거듭난 절이라는 점에서 '티베트에서 온 차우차우'의 발견과 각성은 더 깊은 여운을 지닌다. 당선을 축하하며, 부디 새로운 진경 열어가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정호승. 정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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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에서 온 풍경 / 유병만

 

 

베트남 며느리가 순산했다는 읍내 전화에

논두렁이 파랗게 깨어나고 있다

노인의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완만하게 달라붙어 있던 들판이 뚝 떼어진다

잠시 주춤하던 족보의 한 갈래가 생기를 되찾고

상속되어져야 할 땅의 분량이 새로운 식량을 서두른다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한 혼잣말이 논두렁을 가로지르던 바람에 베어 물리고

들녘 한 켠이 툭 닫힌 핸드폰 밖에서 곰곰이 쭈그려 앉는다

지난 시절은 불임의 푸르름이었다

지난날들은 불안한 가계였다

일찍 여문 씨알 몇 훑으려다가 부주의한 손가락이 주춤 열리고

갈길 바쁜 소나기가 허릴 낮게 구부려 담배내음 짙은 안쪽까지 적신다

문득, 월남전에서 아뿔싸

그 옛날 그 땅에 고엽제를 뿌렸던 기억을 하자

노인의 숨결이 노랗게 말라버린다

의족을 짚지 않으면 일어서지 못하는 기억들을 챙기려는 듯

낮게 기어 다니던 소나기가 더운 열기의 정수리 위로 떠밀리고

웅크려 있던 호흡을 힘껏 곧추세운다

며느리가 온 후

집안의 날씨가 더 따뜻해진 것도 태양을 혼수품으로 가져온 때문임을,

논두렁에 묻어 두었던 걱정을 가로질러 읍내로 빠르게 달려간다

 

 

 

 

 

[당선소감] "택했기에 설레고 아파할길 뚜벅뚜벅 내일 걸어가겠다"

 

내 안에 희미하게 웅크리고 있는 공복이 당신인가요?

 

충혈된 낙타의 눈빛같은 홍차를 오늘도 그들과 함께 마셨습니다. 테러와 전쟁의 뉴스를 접할 때마다 차도르며 터빈 두른 글썽임으로 찾아와 그들의 나라가 내게 준 집, 티그리스 강물 소리로 거실을 서성거립니다. 양 볼에 눈물을 파종한 맨발의 아이들이 커서를 켜면, 나 또한 어린 촉수를 가진 유령이 되어 한밤중을 수런거립니다.

 

태양의 연인 같던 나라, 별 내리는 구릉과 신기루를 범한 푸른 날의 나의 죄, 유정(油井)에서 길어 올린 사하라의 울음은 꿈의 모래폭풍이 되어 새벽까지 입안에 으적거리곤 합니다.

 

지구촌에서 온 노동의 얼굴들마다에서 읽는 나, 우리들, 누가 누구에게 과연 이방인일까요. 섬같은 이 땅의 인연이 되어 며느리가 되어 탯줄 잘라 내일을 순산하는 지구촌의 여인들이 사랑스럽습니다. 희한하고 달콤하다고 낯선 겨울 풍경을 두 손에 가득 받아 웃는 모습에서 함박눈은 내 기억의 사막과 정글 위에 모든 종교가 되어 내립니다.

 

처음 얼음장들의 밤을 사유의 울림으로 함께 걸어 주신 진춘석 선생님, 다른 나무, 다른 열매가 되라는 주문으로 일갈하시던 박경원 시인의 참 정신이 쟁쟁 가슴에 들립니다.

 

도반들의 한글사전 앞에 새로운 격려를 꺼내어 랭보처럼 좋아하시던, 울컥울컥 살가운 중앙대 문창과 이승하 교수님, 한 해 동안 우주를 받아 안느라 향유고래 가시를 감히 목젖에 따끔거리게 했던 장석주 선생님, 경인일보사와 주위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택했기에 설레고 아파해야 할 길임을 잘 압니다.

 

길 없는 길을 열어 낙타처럼 가야겠지요. 발굽보다 가슴이 뜨거워야 하고 알람시계의 새벽을 불면으로 더 많이 살해해야겠지요. 오아시스에 비친 태양의 동공을 만나면 또 글썽거리면서요. 에둘러 돌아와 마주한 당선 소식, 참새들마저 포릉, 포르릉, 자선(慈善)의 썰매를 끌고 날아다니는 계절이어서 이런 받음이 부끄럽습니다. 늦게나마 거실의 공간을 허락해준 곽일영(郭一寧)여사와 미나, 민영의 응원 늘 힘이었다고 뚜벅뚜벅 가야할 내일을 겸허히 추슬러보는 다시 혼자만의 새벽입니다. 편운제의 문우들과 시샘동아리의 맑은 눈빛들, 사계절 환한 '안성  문학회' 사람들이 아른거립니다. 늦깎이에게 마다않고 휘둘러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소중하고 고마운 회초리, 기꺼워 옷깃을 여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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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죽음통해 생명 영속력 표현리얼리티+상상력 조화로워"

 

대체로 평년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이번의 응모작들은 소재주의가 눈에 띄었다. 시대적 소외의식의 반작용이라고 보여지는 가족애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았다. 이런 시편들은 자연스럽게 회고지향의 색깔을 띄게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지나치게 신춘문예를 의식하고 씌어진 작품들이 많았다. 이 경우 시편들은 결핍된 의식을 드러내거나 현란한 수사와 함께 허위의식으로 시문이 채워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응모작이 응모자의 기본정조에 따라 지향성을 이루면서 독특한 색깔을 드러내고 있어 상당한 수준의 어법을 터득하고 있다고 판단되지만 지나치게 안정되어 있어 파격적인 실험정신을 볼 수 없었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잘 못 배달된 편지처럼', '정글에서 온 풍경', '김밥에도 천국은 있다', '그녀가 내 마음의 틈에'를 최종심에 올리고 토론을 거쳐 김순자의 '잘 못 배달된 편지처럼'과 유병만의 '정글에서 온 풍경'으로 수상작을 압축했다.

 

'잘 못 배달된 편지처럼'은 현관문 오른쪽에 나란히 붙어 있는 네 개의 명패를 우표로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시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화자의 집은 편지봉투이고 집으로 귀가하는 화자는 한통의 편지인 것이다. 편지의 끝에는 의례히 타인의 말인 추신이 따르고 "어디로든 반환되어야 할 떠돌이 우편물이"라고 스스로를 말한다. 삶의 정처 없음과 부박함을 드러내는 '가볍디 가벼운 지구의 검불'이라는 인식은 새롭지는 않으나 성찰의 소산이다.

 

'정글에서 온 풍경'은 베트남 며느리가 순산했다는 전화에 "논두렁이 파랗게 깨어나고 있다"는 신선한 충격으로부터 시가 시작된다. 서사가 있는 이 시편의 주인공은 월남전에 참전했던 퇴역의 군인이며 농사를 짓는 노인이다. 노인에게 "지난 시절은 불임의 푸르름이었"으며 "지난 날은 불안한 가계였". 이제 며느리의 순산으로 "잠시 주춤했던 족보의 한 갈래가 생기를 되찾"았을 뿐 아니라 "집안의 날씨가 더 따뜻해진 것도" 며느리가 태양을 혼수감으로 가져온 때문이라고 안도하는 것이다.

 

김순자가 경쾌한 상상력의 시세계를 보인다면 유병만은 삶의 곡진한 무게를 드러낸다. '정글에서 온 풍경'은 월남참전의 역사적 부채의식과 다문화가정으로 대변되는 인류애를 드러내면서 손자로 상징되는 생명과 노인으로 상징되는 죽음의 의미를 통해서 영속하는 생명력을 보여준다. 시는 기본적으로 리얼리티이다. 그러나 리얼리티만으로 시가 되지는 않는다. 상상력이라는 창조적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유병만의 작품은 이와 같은 시의 준거를 모두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심사위원 두 사람은 쉽게 '정글에서 온 풍경'을 당선작으로 뽑는데 합의했다. 아깝게 기회를 놓친 김순자의 시도 머지않아 우화등선의 기쁨을 누릴 것으로 믿으며 당선자 유병만의 시세계가 더욱 깊어지고 풍요로워지기를 기대한다.

 

- 심사위원 : 김윤배·홍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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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신 / 김소연

 

 

달이 붓는다

가지가 휜다

일터에서 돌아온 어머니

발 매만지면

굳은살 갈라진 발바닥에서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 들린다

 

어머니 얼굴에

꽃 지고

단풍마저 떨어져

잔가지들만

힘없이 흘러내린다

새벽녘

새근대는 어머니의

숨소리에서

낙엽 쓸어내는 소리 들린다

 

숨죽이면

눈발이 날린다

어머니가 벗어놓은

구겨진 신발 위로

새순 같은

새하얀 눈꽃이 핀다

눈부신 꽃신이 된다

 

 

 

 

 

 

/ 김소연

 

 

빗방울이 소년의 얼굴을 때린다

 

자전거 바퀴가 천천히 구르고 어깨를 움츠린

 

소년의 등 뒤 비닐 덮인 신문지 위로

 

빗방울이 쌓인다

 

새벽의 푸른 발등을 한 바퀴 돌아

 

소년이 반지하 구들장 위에 신발을 얹으면

 

늘 기침하는 어머니 갈라진 숨소리, 소년을 마중한다

 

살가죽만 늘어진 마른 젖가슴에 얼굴을 묻으면

 

어머니 가슴까지 축축이 멍들이는 시퍼런 빗물

 

소년은 엊저녁 남은 찬밥을 물에 말아

 

후루룩 마신후 다시

 

흥건히 젖은 신발에 발을 담근다

 

우산도 없이 뛰는 소년의 등 뒤에서

 

책가방이 자꾸만 넘어질 듯 소년을 떠민다

 

빗방울은 사정없이 소년의 얼굴을 밟는다

 

 

 

 

 

[당선소감]

 

달이 밝고 자연 경관이 빼어난 곳에서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았다. 처음으로 오래도록 집을 떠나 자연과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 출발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글을 쓰기 위한 것이 되었다. 집을 떠나지 못하고 도심 속에 있을 때는 내 삶의 힘든 것만 보였다. 그래서 시도 힘들었다.

 

하지만 자연은 나에게 삶을 다르게 바라보는 법을 깨우쳐 주었다. 석 달 가까이 자연의 신비한 기운을 받으며 낮에는 산길을 걷고, 밤이면 달빛에 젖으며 밤이 새도록 만물의 창조주께 내 살 속 깊은 곳에서 곪고 부르튼 상처들을 들춰 보였다. 사람에게는 보일 수 없는 은밀한 것들조차도 자연의 침묵과 그 신비로움 앞에서는 아무것도 감출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에게 주어진 형벌 같은 이 삶의 고단함과 쓸쓸함까지 감사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연으로부터 들려오는 시의 소리는 삶이 너무 아프기 때문에 시를 쓸 수밖에 없는 그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나에게 시인의 정신과 삶을 일깨워 준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겨 본다. "눈을 뜬 사람은 반딧불만 보아도 '빛난다'고 할 수 있지만, 눈을 뜨지 못한 자는 태양이 떠도 '어둡다'고 한다. 그러니 너는 눈을 뜨라"고 했다. 눈을 떠야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고, 그 생활 속에서 시가 온다는 것을, 시의 흐름에는 나의 생활의 흐름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깊은 시는 내가 삶 속에서 그물을 깊이 던져 그것을 있는 힘을 다해 건져 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끝까지 열심히 할 것이다. 조금 더 수고를 하고 조금 더 애를 쓰면서. 마지막 최고까지 몸부림을 치며 정말 그만두고 싶은 순간에도 목숨을 내걸고 조금 더 올라가고 올라가면 더 엄청난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끝끝내 내 앞에 쌓아 놓은 종이가 바닥이 날 때까지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그렇게 시를 쓸 것이다.

 

고기를 몰아야 이미 쳐 놓은 그물망에 고기가 걸리듯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고달픈 인생이 시를 쓰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그물망에 몰았을 때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커다란 기쁨이 걸려들었다. 그리하여 나에게 삶에 대한 위로와 더불어 커다란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어린 감사를 드린다. 또한, 나의 소망되시는 하나님과 내가 시를 쓸 수 있도록 늘 사랑으로 가르쳐 주신 나의 스승께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유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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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경제'라는 말의 위력에 비해 '양심'이라는 말의 힘은 너무도 미약해 보이는 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다. 경제가 아량을 베풀어 셋방이라도 살게 해줘야 양심이 깃들 곳이 있게 된 세상이다. 하지만 경제는 아무리 먹고 마셔도 배고픈 신화 속의 괴물처럼 만족을 모른다. 그 괴물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미약하나마 양심의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

 

시다운 시의 징표 가운데 하나는 얼마나 시에 양심이 살아 있느냐이다. 시 쓰기 자체가 살아가는 의미 찾기와 깊이 연관되는 것이라면 그 의미 찾기의 진실성 여부가 양심의 문제로 나타난다. 그것이 돈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돈벌이와 무관하게 시를 읽고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 땅에 시가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고 신춘문예의 수많은 투고작 또한 희망의 한 모습이다.

 

모두 200여 명의 투고자 가운데 마지막까지 검토의 대상이 된 시를 보낸 이는 이문 신지영 심명수 김기훈 김소연씨 등이다. 이문의 '리딩 로드'는 발랄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언어구사가 돋보였는데 시상의 초점이 잘 모이지 않는 것이 흠이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이야?'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주제 구현에 좀더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신지영의 '열섬'은 시적 형상을 구축하는 저력이 배어 있는 시이다. 하지만 투고작 세 편만으로는 시인으로서의 역량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심명수의 '내 책상 위의 포도 한 알 구를 때'는 상상 자체가 신선하고 재미있는 시이다. 사소한 소재로도 얼마든지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함께 투고한 시들이 이 시를 받쳐주지 못하였다.

 

김기훈의 '월세방 있습니다'는 가난에 찌들지 않고 그것을 일종의 동화적 상상력으로 날려버리는 시이다. 무거움에 대해 가벼움으로 대응하는 발상이 신선한 시이다. 한편 김소연의 '꽃신'''도 가난한 삶의 체험을 우려낸 시인데 소박한 언어 속에 속 깊은 마음이 녹아들어 있다. 마지막 두 사람의 시에 심사에 임한 두 사람은 오래 눈길을 주었는데 결국 '소박한 언어 속의 속 깊은 마음'으로 저울추가 기울었다. 잔뜩 화장한 시가 유행하는 풍조에 견주어 중요한 미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정진을 빈다.

 

- 심사위원 : 장석주 최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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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쟁이를 맛보다 / 한창석

 

 

하늘과 수면 사이

왈츠처럼 경쾌하게 미끄러지는 사내는

愁心이 깊어 차라리 소금이 되면

감옥의 水深을 가늠해 볼 수 있을까 마음을 절였다

蓮塘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가라앉고 싶지만

후들거리던 다리 그 어디에

그처럼 완강한 삶의 근육이 붙어 있었는지

그래도 살고 싶다 살고 싶다

도무지 가라앉을 수가 없다

차라리 발을 굴러 하늘로 날아오르려 해도

날개가 없어 새의 그림자를 따라 못의 언저리까지 질주해 볼 뿐

潛泳昇天도 하지 못한 채 세상 바람이 죄다 그의 몫이다

젖을 수 없는 못은 도리어 沙漠

내려다봐야 보이는 하늘은 도리어 苦海

잔비를 맞으며 세상을 미끄러진 하루

잔비에도 등허리가 시큰했을 사내 생각에 코허리가 시큰하다

이 부딪쳐 깨어지는 수면

바람과 바람이 부딪쳐 흐느끼는 세상

하루 종일 위태롭게 뒤뚱거렸을 사내

盡人事의 땀이 마르고 응답하지 않는 을 향한

巫女의 눈물마저 다 마르고 境界에 갇힌 자

마른 영혼을 찔러 혀에 가만히 대 보니

몸서리쳐지도록 짜다

타들어간 鹽田의 까만 소금

刑期를 가늠할 길 없는 사내 어느 새

철없이 겁없이 세상을 지치는 어린 새끼들을 수습하여

水草 사이로 부끄럽게 여윈 몸을 감춘다

 

 

 

 

 

[당선소감]

 

어떤 음성도 수신되지 않는 묵음과 잡음뿐인 라디오를 붙잡고 상심해도 그는 당신의 때가 이르기 전에는 응답하시지 않는다. 내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고 맘을 놓아야 당신의 꿈을 나를 도구삼아 이루심을 믿는다. 하나님이 열어 주시지 않으면 호리병에 다시 나를 가두고 네 번째 천년을 기다리려고 했다. 가나안에 다다를 수만 있다면 광야의 시간은 셈하지 않겠다고 기도했다. 그 때 당선 소식을 들었다. 필마단기로 시와 씨름한 시간들을 떠올리며 눈이 젖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님. 그 분들이 당신의 살을 남김없이 발라내어 나를 먹이신 것을 잘 안다. 당연한 일인 양 받아먹어 온 부끄러움에 목이 메인다. 송하춘 선생님! 내게는 너무도 푸르고 넓은 바다인 그 분의 품에서 나는 영혼의 뼈마디까지 틀어 퍼덕이고 싶었다. 나의 헤엄으로 선생님께 작은 미소라도 드릴 수 있기를 바란 것은 이미 너무 오래된 소원이었다. 정진규 선생님, 최동호 선생님과 김인환 선생님, 이남호 선생님께서도 나의 서툰 헤엄을 지켜보아 주실 것이다. 떠나온 모천의 이상우 선생님, 박범신 선생님, 김석환 선생님, 이재명 선생님, 고운기 선생님을 뵙고 떠나온 나날들만큼 이마를 땅에 대고 아가미를 벌름거려야 할 일이다. 연두부 같은 오빠를 응원해준 동생 정화와 승덕이에게도 언제나 고맙다. 깜깜한 지난 외로움이 달콤했다고 위증하지만 사실 무수한 멀미들은 맵고 썼다. 고비마다 산호섬이 되어 준 소중한 동무들, 대학원 식구들에게 마음으로부터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옹알이에 귀 기울여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시시한 시, 시들시들한 시, 급기야 허연 배를 위로하고 떠오르는 시체가 되지 않고 늘 등 푸른 시를 쓰겠다고, 아니 등 푸른 삶을 살겠다고 약속드린다. 끝으로, 귀한 지면을 통해 시인의 삶을 다짐하게 해 주신 경인일보사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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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를 쓰는 우리도 늘 경계에 서 있다.

 

그 경계에 서서 "하루 종일 위태롭게 뒤뚱거리며" 산다. 연못가에서 소금쟁이를 바라보다가 시의 화자가 느꼈던 그 경계의 아슬함과 위태로움은 시에도, 시를 쓰는 삶에도 역시 매일 찾아온다. "잠영도 승천도 하지 못한 채" 우리는 가라앉을 수도 날아오를 수도 없는 진퇴유곡의 경계에 갇혀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 고해(苦海)를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응시하면서 건너가는 일, 그게 우리의 선택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소금쟁이를 맛보다'는 밀도 높게 형상화 하고 있다.

 

미세한 현상을 놓치지 않는 감각적인 눈이 있고 그것을 깊이 있는 삶의 철학으로 끌고 갈 줄 아는 힘이 있다. 시적 긴장이 살아 있고 시의 내면이 꽉 차 있다.

 

심사위원들이 당선작으로 합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울러 언어에 의존하고 싶은 유혹에 끌려가기보다는 '호랑이가 없다'와 같은 시에서처럼 삶에서 우러난 시가 좋은 시라는 믿음을 견지하면 좋겠다.

 

'바닷가에 서서','곰국'과 같은 시들도 충분히 당선작이 될 만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었다. '야영'도 삶과 언어가 육화되어 있는 탄탄한 작품이었다. 다만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이 이런 작품과 같은 완성도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포클레인','바다는','종착역에 대한 세 개의 레토릭'등도 모두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이번에 선정되지 않은 것이 더 좋은 시를 쓰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 심사위원 : 김정환,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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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680의 굴뚝새 / 심은섭

 

 

면사무소에서 4더 지나 우편번호 233-872에 살던

굴뚝새는 사내 굴뚝새를 산 14번지에 묻어 두고

경적소리와 높은 빌딩들이 난무하는 우편번호 100-866

69층 아랫목에서 무-말랭이가 되어 간다

우체국에서 지어준 100-866의 우편번호를

문패에 문신처럼 새겨놓고 살지만

14번지 바람소리 전해줄

우편배달부의 발길이 끊어져버린 지가 오래다

몇 날을 견딜 수 있는 수분이 얼마 남지도 않은

해발 680에 살던 굴뚝새를

굴뚝새의 굴뚝새들이 바라보며 쌀독에

파랑주의보가 내려 호미자루를 놓지 못하던 날들과

냉수에 간장을 섞어 헛배 채우며 새우잠 자던 날도

미납된 등록금 영수증 머리맡에 두고

밤새워 신열을 내던 일들을 떠올린다.

절구공이에 짓이겨진 그녀의 가슴에는

슬픈 보석 몇 개 박혀 있다

두어 개의 천둥소리

하얀 달 몇 개와 서너 개의 태풍 그리고

몇 밤에 내린 무서리에 말라진 몸, 더 말려야

천국의 층계 만이라도 가볍게 오르려는 듯

남아 있는 그들의 짐이 가벼워진다는 것도 안다

점점 더 멀어진 눈과 눈 사이의 간격

문 밖까지 나온 기침소리가 폐경을 맞는다

우편번호 없는 묘비를 들고 오후 내내

창 밖에서 서성이던 검은 도포를 입은 바람이

조등(弔燈)을 든 굴뚝새들의 포효를 뿌리치며

반송되지 않을 정량(定量)의 화석을

목관 속에 편히 눕힌다

 

 

 

 

 

K 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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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목 매 달아 죽어도 좋을 나무 - 

 

종은 울지 않으면 종이다 종은 울지 않으면 종이 아니다 종은 울면 종이다 종은 울면 종이 아니다 부재중인 수신함에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전화 한 통으로 문학의 종이 되려고 한다. 나에게 문학 속의 시()는 목 매 달아 죽어도 좋을 나무가 되었다 신춘문예 당선의 소식을 듣고 바이러스에 감염된 고인돌처럼 오래도록 서서 침묵했다 종이 될 수 있는 여러 갈래의 길을 생각했다 산에 사는 산죽(山竹)이 떠올랐다 속을 더 비워야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길 거라고,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말자고, 작은 키라도 더 낮추자는 깨달음이 없어 한 번도 산에서 마을로 내려오지 못해 대쪽이라고, 이것이 문학의 종이 되려는 해답의 근본이며 해답의 결과이며 해답의 이유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놓으려던 붓을 잡아야겠다 소외받는 달동네 사람들의 반장이 되어 언어를 잃어버리고 사는 그들의 의미를 써야겠다 영육간에서 방황하는 어휘들을 불러 모으고 다듬어야겠다

 

지금까지 시의 의미를 부여해주신 이언빈 선생님, 시를 경작하는데 필요한 도구 사용 방법을 알려주신 '시와 세계' 발행인 겸 주간이시며 대관령 시인학교를 운영하시는 송준영 선생님, 곁에서 만날 때마다 격려해주신 김학주 시인께 이 지면을 빌려 감사드리며 나와 시와의 싸움에서 늘 중립적 입장을 지켜오며 감나무 까치밥처럼 외톨의 나날이었던 권기순 아내에게도 감사드린다.

 

끝으로 문학의 성찬을 마련하고 초대하여 주신 경인일보와 단단하지 못한 작품에 당선이라는 영광을 안겨주신 두 분의 심사위원께 독한 다짐을 바치며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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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예심을 통과한 서른 명의 시를 다시 선고하여 심사한 결과 본심위원은 심은섭씨의 '해발 680m의 굴뚝새'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심은섭씨의 작품은 죽음을 안으로 조용히 끌어들이면서 서정적 상관물에 대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여 생사의 슬픔을 대칭적으로 이미지화하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까지 최종 경합한 장인수씨의 '쪽방 인현동 일 번지' 한창석씨의 '로드 킬' 김명옥씨의 '날마다 황선에 선다'도 수준작이다.

 

하지만 죽음을 과장되게 표현하고 상투적으로 터치함으로써 시적 진실이 훼손된 부분이 지적되었다. 문명 비판적으로 죽음을 선취하고 삶을 직시하려는 의표가 과한 나머지 시적 성취도는 오히려 떨어졌다. 우리 삶 깊숙이 스며든 죽음의 냄새도 사회적 미학적 거리를 유지할 때만이 시의 의상을 걸칠 수 있다.

 

당선작은 상당한 수준을 보여준 심미적 작품이다. 죽음의 종결을 파괴하지 않고 보존하고 기억하는 와 화자의 복화술은 이 처녀시를 돋보이게 했다. 시 형상이 서정적 자아에게 바라는 요구는 불립문자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 있는 바, 생이 불가피하게 성찰해야 하는 떠도는 자의 비애를 이 시는 건드리고 있다.

 

특히 산 번지와 도시의 우편번호, 살아있는 자와 죽은 굴뚝새로 매개되는 서사 구조의 소통은 아름답다. 당선자는 이 작품에 구속되지 말고 더 깊은 시세계를 펼쳐 시의 자유를 누리기 바란다.

 

- 심사위원 : 신경림, 고항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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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지역 / 정경미

 

 

굴피집 처마 끝에서 포크레인이 홰를 친다

노란 살수차가 산동네의 새벽을 깨우며

을씨년스런 거리를 적신다

콘크리트 더미에서 요란하게 터져 나오는

철지난 전화부가

다이얼을 돌리며 안부를 묻는 동안

재개발 택지 분양 프랭카드는

부푼 몸을 날리는 햇살에 눈을 뜬다

비닐 하우스의 골담초는

봄을 기다리며 세간들을 살피고

떠도는 개똥지빠귀새 추운 어깨에

살풀이구름이 내려앉는다

찢긴 연체료 고지서가 수화를 건네며

검은 입술에 묻은 상처를 펄럭이고

왼쪽 어깨가 밀려나간 외등이

백밀러 속으로 뒷걸음질 친다

멈춰버린 괘종시계는 언제나

뜨거운 한낮에도 저무는 하늘을 가리킨다

팽팽한 오후가 하수도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골목길은 말 잔등처럼 출렁거리며

어두운 길목에서

희미한 등불을 켜고 있다

 

 

 

 

어린 철학자는 꽃이 지는 이유를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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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뙤약볕 내려 쬐는 자갈길을 맨발로 걸어왔습니다. 발이 부르트는 지경에서도 시에 대한 믿음 하나로 마다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시를 향한 우직한 집념으로 더러는 흔들리는 걸음걸이로 더욱 시에 대한 오기와 열정을 용솟음치게 만들었습니다.

 

한때는 바닥이 두껍고 편안한 신발을 갈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에 대한 절명의 애착 때문에 외로운 수행자의 고행처럼 세속적인 소망을 애써 저버린 채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결코 앞으로도 평탄한 걸음이 되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름다움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노래한 키이츠의 행로를 따라 걸어갈 것입니다.

 

가장 진실한 지혜는 사랑하는 마음이라 여겨왔습니다.

 

신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그곳에 빛나는 시의 소재가 숨어있고 현란한 관념과 이미지가 내재해 있음을 깨달아 왔습니다.

 

그것이 곧 진실의 표정이요 지혜의 속내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다짐해 왔습니다.

 

당선 소식을 접하자 문득 봉숭아꽃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어릴 적 봉숭아꽃 속에는 시의 텃밭이 되어 주신 아버지의 영상이 겹쳐져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세상을 버리신 아버지께서 사랑과 망각을 깨우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8년 전 가을 어느 날 봉숭아꽃이 피었다고 나들이 오라시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그리움의 울타리 안에서 피어오릅니다.

 

부족한 글을 눈여겨 살펴주신 경인일보사와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부르튼 맨발을 말의 붕대로 감싸주신 하현식 교수님과 이신정 시인을 비롯한 문우들과 악동님께 감격을 나누어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고집스런 시의 길을 따뜻한 눈으로 지켜준 가족들과 아들 성로, 그리고 올케 송인숙 님께 고마움을 전하면서 이 영광을 아버지 영전에 드립니다.

 

 

 

 

차라투스트라의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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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의 위기라는 말이 무색하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시인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이번에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좋은 시와 좋은 시인이 눈에 띄게 늘어나지는 않은 것 같다. 원래 그저 좋은 것은 희귀하게 마련이지만 시의 기본적인 품격조차 갖추지 않은 시의 과도한 생산은 시의 위력과 본래 의미를 희석시키고 있지는 않는지 한 번쯤은 되돌아 볼 일이다. 영상 매체의 발달에 따라 활자 매체의 존립 근거가 퇴색해 가고 있다는, 단순하고도 문학 외적인 진단에 의한 시의 위기론보다는 좋은 시의 위기를 우려해야 할 시점이 지금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좋은 시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 앞에서 우리는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좋은 시는 기존의 시적 상상력을 무너뜨리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언어 표현이 생기를 얻을 때 발아한다. 단 한 편만 뽑는 신춘문예를 의식해서일까. 모두들 수준이 엇비슷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오래된 집'은 크게 나무랄 데 없는 깔끔한 시다. 시에서 감정을 제어하는 능력도 오랜 수련의 결과로 생각된다. 하지만 소품이라는 점이 끝내 마음에 걸렸다. 때로 시의 스케일을 크게 잡아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밥상'은 발상이 참신하고 평범한 소재를 평범하지 않게 그린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 사람은 앞으로 시를 세밀하게 다듬는 데 더욱 신경을 써야 할 듯하다. 난데없는 돌부리들이 곳곳에 출현해 시의 품격을 해치고 있기 때문이다.

 

'경마장 풍경''철거지역' 두 작품을 놓고 고심했다. 앞의 시는 세상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바탕으로 시에 삶의 온기를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다. 군더더기가 거의 없고 감각적 표현도 아주 볼 만하다. 하지만 어디에선가 본 듯한 몇몇 이미지들이 신선도를 떨어뜨리고 있다.

 

당선작으로 고른 '철거지역'은 주체의 개입을 철저히 배제한 객관적 묘사의 시다. 특별히 눈에 띄는 표현은 없지만 안정적으로 시를 마무리하고 있는 점이 믿음직스럽다. 상처 입은 것들에 시의 렌즈를 들이대는 시인으로서의 자세를 지속적으로 지켜나가기를 바란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드린다. 

 

- 심사위원: 정희성, 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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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혼제 / 성유리(본명 성배순)

 

 

어머니 삼베치마를 입은 가오리연이

꼬리로 허공을 차며 솟구쳤다

네 귀퉁이 지느러미를 파닥이며 연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길 떠나고 있었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가슴까지 휑하니 비운 모습이

추워보였다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고 있는 가는 끈만은

서로 놓아버리지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우리는 목 아프도록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난 칼을 꺼내 팽팽한 순간을 그었다

사선으로 끊었다

연은 비로소 가볍게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그래 보였다

그런 줄 알았다

 

아침 까치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니 감나무 가지 꼭대기에

연이 걸려 있었다

이슬에 온통 젖어

날 보고 있었다

 

 

 

 

세상의 마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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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기꺼이 내 속으로 몸을 던진 집 앞 논바닥의 그렁그렁 툼벙, 도서관 가는 길가의 돌멩이, 질경이, 민들레, 공설운동장의 그 바람, 어둠, 공허, 이세상의 모든 암컷, 어머니. 내 몸 속을 유영하다 내 손을 따라 나온 그들에게 감사하다.

 

7년 전쯤 시적 진화를 위해 손을 잡아 주신 교수님, 해마다 이때쯤이면 신문을 모조리 사서 내 이름을 찾곤 한다는 문우들, 감사하다.

 

남들 앞에서 조금도 망설임 없이 과대평가 해주던 그이와 사랑하는 아이들, 가족모두에게 감사하다.

 

한때 계절이 오기 전에 미리 익은 건 아닐까 하는 초조함에 몸의 병만 키우며 폭식과 구토를 반복해 왔다. 많이 비뚤어져 있었다. 시골, 이름 없는 들판 한구석에 쑥으로 시들지라도 나팔꽃이 되기는 싫었던 내 자존심을 지켜준 경인일보사에 감사를 드린다. 날개를 달아 주신 심사위원님께 큰절을 올린다.

 

 

 

 

아무르 호랑이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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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문사에서 예심을 거쳐 선자들에게 넘어온 100여편의 작품들을 숙독하며 떠오르는 느낌은 작품 수준의 균등화이다.

 

많은 응모자들의 시적 역량이 일정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주관적인 시적정서를 크게 흠잡을 데 없이 진술한 다수의 시들 앞에서 선자들은 시를 지향하는 응모자들의 유행적 안이주의와 대중적 규격화를 우려했다.

 

특히 압축과 절제가 시의 미덕이라는 점을 망각한 산문화 경향을 심각하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범을 넘어 기성시단의 구각을 깨트리는 치열한 고뇌는 신춘문예를 통해 새로운 시인으로 등장하려는 신인에게 으뜸으로 요구되는 덕목일 터, 선자들은 그 결핍을 읽으며 아쉬움을 가진다. 심사의 기준으로 시의 정신적 바탕과 깊이, 그리고 언어적 결정능력의 균형을 염두에 두었다.

 

최종적으로 논의된 작품들은 박복영의 '풀잎처럼', 김주관의 '송이보고서', 성유리의 '진혼제', 강전욱의 '불국 찾아 가는 길', 하재청의 '공단세탁소', 이명자의 '길이 휘청거린다' 등이었다.

 

이들 작품중 먼저 박복영과 이명자의 작품들이 제외되었다. 기성시인들의 그림자가 너무 짙게 드리워져 독창적 개성이 결핍되어 있었다.

 

김주관의 작품은 재기가 넘치나, 수사적 화려함으로 너무 멋을 부린 나머지 언어의 긴장이 부족해 감동을 주지 못했다. 하재청의 작품은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길과 건강한 현실의식이 돋보였지만 곳곳에서의 부적절한 표현이 시의 품격을 훼손하고 있었다.

 

강전욱의 시는 독특한 발상과 언어로 선자들의 관심을 모았지만 함께 보낸 시들의 편차가 커 아쉽게 제외되었다.

 

마지막 남은 성유리의 '진혼제'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육친, 죽음, 이별, 인연, 집착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몇 개의 알레고리를 통해 간결하면서도 비범하게 형상화해낸 능력이 돋보였다. 부디 끝없는 노력으로 한국시를 빛내는 큰 시인으로 대성하기 바란다.

 

-심사위원 : 하종오·김명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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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관에서 / 박세인

 

 

몇 번이고 물어서 갔다

저물 무렵 차는 늦게 도착했다

강원도 옥수수 술을 마셨다

잎새 우수수 떨구는 바람, 삭풍인갑다

무너진 탄촌 바라보며 저문 강물소리 들었다

여행지에서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걸었다

그 생각의 끝에 늘 두고 온 사람들 있었다

추억은 잊어버리려 해서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진장 쏟아지는 저 청천 하늘

별 속에도 그 사람 있었다

토방에서 중늙은이 몇 화투를 치고

나는 낮게 엎드려

두고 온 도시와 지난 생을 생각하였다

세상이 받아주지 않으면

가끔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된다

검은 밤이 길고 길었다

강물 거센 물살 소리, 잠이 오지 않았다

허름한 여관 벽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그래도 삶이란 살아 볼만한 것이다'

그곳을 나올 때 한 번 더 보았다

 

 

 

 

[당선소감]

 

아이 엄마와 계약한 '양육 합의문'에 기초하여 4년째 딸을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오고 있습니다. 바람이 몹시 불던 이번 겨울 어느 날. 차를 서해 갈대밭에 주차시키고 딸과 차안에 있었습니다. 딸과 나는 감기가 심하게 들어서 밖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고, 딸은 조수석 의자를 뒤로 젖혀 미끄럼을 탔습니다. 붉은 노을이 낀 서해와 갈대숲을 바라보던 딸이 말했습니다.

 

아빠, 누가 저 아름다운 숲을 데려가면 안될텐데.”

 

사물을 바라보는 딸의 말이 시를 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딸은 벌써 아름다운 숲과 주체의 관계 맺기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삶 안에서 우주는 전개되는 것이며 우주사 안에서 이 삶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침묵을 하나의 이름으로 열매 맺게 하는 것이 시를 쓰는 일입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전체적 조망아래 사태를 바라본다는 것인데, 사태 그 자체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편견과 선행된 지식을 중지하는 것이며 그리스 회의학파처럼 판단 중지를 수행하는 일일 것입니다.

 

인간에게 진리나 진실 찾기가 삶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시인이나 학자, 재판관은 선행된 편견에 판단 중지를 해야할 것입니다. 저에게 시는 사태나 사물을 반성적으로 보게 하는 길이었습니다. 저는 모든 인간이 선입관이 배제된 세상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잘것없는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경인일보에 감사드립니다. 당선이 낙선보다 더한 경책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시를 쓰는 것은 쉬워도 시인으로 살기는 힘들다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 삶과 시에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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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에 있어 새로움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죄악이다. 새로움은 사물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며 시정신의 문제이다. 사물에 대한 재인식이 없이는 새로움은 불가능한 것이며 자기 안에서의 혁신이나 실험은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새로움은 실험정신에 가서 닿는다. 뿐만 아니라 새로움은 기존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전통에 대한 부정,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 언어에 대한 부정, 삶에 대한 부정이 새로운 시세계를 담보하는 것이다. 이번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으면서 심사를 맡은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느낀 것 중의 하나가 새롭지 않다는 것이다. 오래 만난 사람처럼 혹은 오래 입은 옷처럼 편안하고 익숙한 시편들을 놓고 우리들은 고민했다. 결국 새로움이 엿보이는 시를 찾을 수밖에 없었고 다행히 다음 세 분을 최종심에 올릴 수 있었다.

 

'내소사, 그 어두운 전나무 숲으로'의 김선아, '다 쓸려간 모래밭이 상쾌하다'의 김해선, '타관에서'의 박세인이었다. '내소사, '는 상상력의 신선함이 돋보인다. “스스로 새로워지는 나무들의 상처에선 어느새 버섯의 포자들이 자라 오르고같은 재생과 극복의 이미지들이 시를 읽는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시적인 분위기에 경도된 흠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다 쓸려간'는 간결한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시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북채를 든 바다파도는 한치씩 올라가고발정난 갈매기의 울음소리와 같은 빼어난 표현이 보이지만 지나치게 사소한 것이 흠이다.

 

심사를 맡은 두 사람은 쉽게 박세인의 '타관에서'를 당선작으로 뽑는데 합의를 했다. 이 작품은 형식의 새로움과 삶에 대한 진지한 되돌아봄이 돋보인다. “잎새 우수수 떨구는 바람, 삭풍인갑다와 같은 신선한 표현도 이 시가 흡인력을 갖게 한다. 함께 투고된 다른 작품들도 고른 수준을 보이고 있어 저력을 짐작케 한다. 삶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바탕으로 한 수없는 부정과 긍정의 모습 또한 이 시인의 잠재력을 읽을 수 있게 하는 요소이다.

 

그러나 언뜻언뜻 보이는 상투성의 나락을 경계할 일이다. 좋은 시인 한 사람을 새롭게 만난 기쁨이 크다. 대성하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 황동규·김윤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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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판 / 송정화

 

 

낯선 간이역에는 거대한 몽상과 혼돈의 장이 섭니다.

그곳에서는 가끔 죽은 바다도 싱싱하게 거래됩니다.

 

수전증에 걸린 노파에게 좌판의 으로 끌려다니는 그녀는 등 푸른 생선입니다. 미끈거리는 그녀의 몸을 좌판 위에 올려놓고, 노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떨리는 손으로 진로를 더듬습니다. 제발 나를 풀어 줘. 몽롱한 그녀의 눈은 점점 빛을 잃어가지만 푸른 물살의 전율을 기억하는 몸은 여전히 싱그럽습니다. 가는귀 먹은 노파의 손은 좌판만 땅땅 두드립니다. 비릿한 바다 냄새에 이끌린 사내들이 그녀의 주변으로 모여듭니다. 신명이 난 노파는 덜덜거리는 손으로 바다를 들고 한껏 부풀립니다. 그녀의 푸른 등에는 매혹의 바다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매력적인 바다야. 뭇 사내들의 탐욕이 번득입니다. 불빛도 슬쩍 끼어들어 그녀의 등을 한 번 쓰윽 쓰다듬어 봅니다. 탄력 있는 몸이야. 몽상의 바다 속으로 한 사내가 출렁거리며 걸어 들어옵니다. 노파는 서둘러 그녀의 몸을 도마 위에 모로 눕힙니다. 그녀의 몸에서 우우 깃털처럼 바다의 지느러미가 일어섭니다. 한껏 달구어진 몽상의 도마 위에서 그들이 몸을 섞습니다. 지폐를 챙긴 노파의 손은 알고 있습니다. 비릿한 그녀의 몸속 깊이 깊이 들어가 보면 바다는 이미 딴 세상으로 훌훌 떠나버린 지 오래란 것을.

 

 

 

 

거미의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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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정현종 님의 '')

 

최근 일 이년 동안 제 문학의 화두는 ''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시를 쓰는 일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섬의 탐구, 혹은 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일이 문학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사람들 사이에만 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도 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섬과 나와의 간극조차 메우지 못하고 헤매던 나날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극을 도저히 메울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과 절망으로 제 시는 자주 길을 잃곤 했습니다.

 

고백하건대, 저는 아직도 내 안에 존재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섬의 실체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제 시는 앞으로도 얼마 동안은 섬으로 가는 길 위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부끄러운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제 시를 애정 어린 눈으로 보아주시고, 제게 섬으로 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신 김명인, 김윤배 두 분 심사위원님과 경인일보사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좌절하지 않고 힘차게 물살을 저어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가는 길 위, 곳곳에서 만나는 세상과 사물들을 섬세하고 깊게, 때로는 독살스럽게 응시하여, '잘 썼네.' 정도가 아니라, '사무쳐오는 시'를 써서 보답해 올리겠습니다.

 

이 밖에도 제겐 고마운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기철 교수님과 홍신선 교수님을 비롯하여 제 시에 북을 돋워 주신 은사님들, '백실 글벗', 십 년 지기인 '그들 동인', 대학원 문우들, 학교 동료들, 친구들 모두 고맙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은 며느리를 늘 감싸 안아 주시는 시부모님, '빌어먹어도 자식 공부는 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손수 쟁기질을 하시며 칠남매를 올곧게 키워 내신, 지금은 고희를 목전에 둔 내 어머니, 사랑하는 오빠, 언니, 동생들 그리고 친구이자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남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심사평]

 

올해의 경인일보 신춘문예의 경향을 보면 유난히 추운 겨울이 보인다. 실직한 가장의 처진 어깨와 노인들의 무료한 풍경과 하루하루의 삶이 힘겨운 사람들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전체적인 풍경은 을씨년스럽고 암울하며 출구가 보이지 않는 회색의 풍경이다. 이러한 풍경들은 우리들의 곡진한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풍경이어서 진지한 모습이지만 그러나 익숙한 풍경이기도하여 낡은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시에서 낡았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신춘문예의 성격상 생명감, 참신성, 도전 의식, 긍정적인 세계관 등이 시편 속에 녹아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또 다른 풍경으로는 시인 자신의 내면의 풍경인데 이 풍경은 시인의 자기 분열의 모습이어서 시적 공감을 얻지 못하는 작품이 많았다. 그렇다고 올해의 응모작들이 지난해에 비해 처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심을 거쳐 선자들에게 넘겨온 100여 편의 시편들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20대 초반의 젊은 응모자가 많이 눈에 띄었으며 40대의 응모자들은 상당 기간 수련을 쌓은 흔적이 역력했다.

 

선자 두 사람은 장현숙의 '', 길동호의 '선인장', 이동메의 '어항', 박복영의 '햇살, 길을 묻다', 송정화의 '좌판'을 최종심에 올려놓고 검토에 들어갔다. 장현숙의 ''은 희망 없는 걸인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인데 견고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지만 시적 화자가 관찰자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어 감동이 적은 것이 흠이었다. 길동호의 '선인장'은 선인장의 이미지와 사형수의 이미지를 병치시킨 작품으로 상상력이 뛰어난 작품이기는 하지만 '가슴에 다지지 못한 메아리가 눈썹을 쓸어내리듯'이라는 요령부득의 구절들이 보이기도 하여 그 역량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이동메의 '어항'은 명징한 시이다. 그러나 시상이 단조롭고 마지막 연 '그 해,/나도 내 사랑을 잃---.'가 상투적인 결함을 보인 작품이다.

 

박복영의 '햇살, 길을 묻다'는 무료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는 과일장수 한씨와 슈퍼주인 강씨의 정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시제가 사변적인 것에 비해 시는 구체성을 획득하고 있으나 시인의 내부에서 다시 한번 치명적인 도약을 하지 못한 것이 걸린다. 송정화의 '좌판'은 수전증에 걸린 생선장수 노파의 이야기지만 이 시에서 서사는 별 의미가 없다. 도마 위에 눕혀진 생선은 바다가 떠난지 오래된 우리들이기도 할 것이다. 풍부한 상상력이 미덕인 이 작품은 '우우 깃털처럼 바다의 지느러미가 일어섭니다'같은 빼어난 표현을 보인다. 함께 투고된 '푸른 운동장'에서도 이 시인의 숨겨진 능력이 엿보여 선자 두 사람은 쉽게 합의에 이르러 당선작으로 뽑았다. 한국 시단의 시사를 다시 쓰는 시인이 되기를 빈다.

 

- 심사위원 : 김윤배, 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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