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록체에 대한 기억 / 이경주
숲을 떠난 푸른빛의 기억이 갇힌 방으로 들어간다
형광등 불에 달궈진 자갈과 모래알들이 바닥에 깔리어
전갈이 지나는 길을 만들고 있다
마른 바람이 눈에 익거나 때로는 낯선 발자국들을 지우는 한낮에는
미세한 먹이사슬들이 잠깐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하얗다
종일 내리쬐는 빛은 벽에 박힌 나무들의 뿌리와
그걸 바라보는 죽은 새들의 밥상과
좁은 틈새를 뚫고 머리를 든 작은 벌레들의
핏줄까지 하얗게 만든다
한번이라도 불빛에 닿은 것들은 제 본래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오후가 저물 때면 변색의 관성은 더욱 강해져
누구도 아침을 기억하지 못한다
방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나갈 수 없다
아무렇게 발을 들여 놓았다가
깊은 사막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폭풍에 갇히어 돌아설 수 없다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 있고
표정이라고는 창백한 빛뿐인 고요한 방이
암흑 속을 빠르게 날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이상하다 분명 하루가 지난 거 같은데
눈을 뜨면 다시 그 자리에 와 있고
녹색이 사라진 방으로 계속 나비들이 날아 들어온다
[당선소감] 내 삶의 단 하나의 길, 시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겠다
로맹 가리의 단편소설들은 늘 긴 여운을 남깁니다. 그 여운을 감당할 힘이 없어 한동안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이 두려워질 때도 있었지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꺼냈습니다. 새들은 진짜 비상을 위해 머나 먼 바다의 섬을 떠나 조그만 해변으로 날아와서 자신들의 몸뚱이를 던져 버리는 것일까요. 나에게 떠나야 할 섬은 무엇인지, 그리고 마지막 몸을 던져야 할 곳은 어디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언제부터인지 젊은 시절 굵은 노트에 적어 댔던 시들이 나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추억이 되어버린 것을 알았습니다. 먹고사는 일에 몰입해온 현실을 핑계로 시의 바깥에서 기웃거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갈 수 없는 사막에 갇혀 버렸다는 절망감도 컸습니다. 그러나 시를 쓰면서 운명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을 그 지독한 외로움, 고통, 무엇보다도 지켜내야 할 영혼의 투명함과 순수성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음이 솔직한 고백일 겁니다.
작년에는 참으로 많이 걸었습니다. 끝도 없는 길을 걸으면서 내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생각했습니다. 결국 시를 쓴다는 것이 나에게는 세상을 사랑하는 강력하고 유일한 방식이자 수단이 되어야 함을 길이 끝날 어느 즈음에야 알게 되었지요. 시는 갈수록 희미해지는 내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되살리고, 내가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멈추어 버렸던 시를 다시 끄집어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시의 바깥에서 기웃거리지 않고, 시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겠습니다. 고립된 섬을 벗어나 내 몸을 던질 마지막 해변을 향해 날아가겠습니다. 긴 망설임의 여정에서 내 안에 생겨 난 상처를 치유하고, 나의 치유로서 사막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작은 위로와 희망이 될 수 있기를 감히 꿈꾸겠습니다.
이제까지 혼자 써 왔던 시였기에 세상에 내놓기가 참 부끄러웠습니다. 채 다듬지 못한 나무처럼 거칠고 틀어진 저의 작품을 선정해 주신 심사위원님과 귀한 지면을 허락해주신 경남신문사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저를 응원해 준 아내와 가족들, 그리고 제가 어디를 가든 늘 함께 해 준 친구들에게도 고마운 인사를 전합니다. 아름답고 따뜻한 언어로 부지런히 좋은 시를 씀으로써 저를 사랑해 준 숱한 인연들에 보답하겠습니다.
[심사평] 울림 큰 문장들… 시적 틀 만들어가는 상상력 돋보여
코로나19로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단계적 일상회복으로 접어들면서 코로나 19 종식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으나 다시 확진자가 급증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는 등 여러 어려움이 많은 때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 때문인지 예년보다 신춘문예 시부문 투고량이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수백명의 시인 지망생이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해 와 뜨거운 문학적 열기를 느끼게 했다.
올해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에는 신춘문예에 응모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시적 역량을 보여준다는 것이 오히려 과도한 수사에 매몰되어 시적인 깊이와 사유의 넓이를 놓치고 있는 작품들이 눈이 많이 띄었다. 한 사물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집중력이나 정서를 짜임새 있게 압축하여 끌고 가는 긴장감이 부족한 경우도 많았다.
숙고 끝에 심사위원들은 김난(김향숙), 김휼, 나영채, 노수옥, 이경주, 이동우, 임승환, 최수안 제씨의 작품들을 본심에 올려 논의하였다.
몇 분은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현실 등 사회에 대한 인식을 담아내어 보여주기도 했지만 시대 정신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깊은 정서적 울림을 주지 못했다. 또 몇 분은 토속적인 정서에 기대어 서정의 영역을 파고 든 경우도 있었지만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내지 못하고 익숙한 어법에 머물러 있었다. 또 시적 발화가 너무 무성하여 이미지를 응집시키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것이다, 하고 단숨에 손꼽을 작품을 만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런 속에서 노수옥씨와 이경주씨의 작품을 만난 것은 기쁜 일이었다. 노수옥 씨의 응모작 가운데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끈 작품은 ‘입관’이다. 언어를 세공하는 솜씨가 우수했다. 주제에 대한 집중도가 높고 문장을 끌고 가는 힘도 좋았다.
이경주씨의 ‘엽록체에 대한 기억’은 현대인들의 고뇌를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시적인 틀을 만들어나가는 능력과 상상력이 돋보였다. 퇴색되고 변해가는 자아와 만나는 방의 풍경은 흡인력이 있다. “눈을 뜨면 다시 그 자리에 와 있고, 녹색이 사라진 방으로 계속 나비들이 날아 들어온다”는 환상성을 보여주는 문장이기도 해서 울림이 크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노수옥씨의 ‘입관’과 이경주씨의 ‘엽록체에 대한 기억’을 놓고 숙고하고 논의했다. 논의한 끝에 응모작 전편이 편차 없이 고르다고 판단된 이경주씨를 당선자로 합의했다.
축하하며, 한국시단을 이끄는 큰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안타깝게 당선을 놓친 노수옥씨에게 심심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심사위원 이성모·배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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