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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정신희

 

 

공손하게 마주 앉아

서로를 향해 규칙적으로 다가갔다

흑백으로 갈라지는 길들이 뒤섞이더니

우리 사이는 점점 간격이 사라졌다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비가 올 때까지

기도했다는 것

그가 먼저 돌을 놓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끝까지 돌을 움켜쥐고 있었다

입 안에선 쉬지 않고

돌들이 달그락거렸다

우리는 마주 보고 있었지만

서로에게 위험했다

돌을 던지고

끝까지 서로를 모른 체하고 싶었다

길이 팽창하고

수거함엔 깨어진 얼굴이 가득하고

우리는 맹목적으로 달려갔다

한번 시작한 길은 멈출 줄 몰랐다

 

 

 

 

2016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는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 세우며 내게로 온다

 

여러 해 전 도시 생활을 접고 이곳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우리에게 온 햇빛과 바람과 풀 한 포기, 아이들과 내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는지를 자연에서 배운다. 그것은 소리 없이 물처럼 내게 스며든다. 어떤 과장도 억지도 없이 나를 불러 세우고 일으켜 세운다. 나는 내게 온 어떤 것도 가꿀 줄 몰랐다. 남편도 아이도 부모와 형제도 하물며 이름 없는 풀이며 벌레며 이웃들이랴. 내가 짓고 있었던 것은 시가 아니라 몽상가의 잠꼬대였고 허세였다. 내가 아닌 타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나무와 풀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마음을 읽고 나누고 드디어 그들이 되는 것, 오늘도 햇빛과 바람과 나무들의 살림살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사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시는 나보다 먼저 내게 닿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했다. 몸이 없던 내게 몸을 입혀 수도꼭지를 틀어 밥공기를 닦게 하고 바닥을 훔치게 했다. 밭고랑에 남아 있던 애기파가 등 뒤에 내려앉는 눈을 털어내고 있다. 주저앉아 있던 나를 애기파 한 포기가 가만히 일으켜 세운다. 시는 늘 그렇게 내게로 온다. 시를 쓰기에 앞서 언제나 정직해야 한다고 일깨워주신 이영진 선생님, 내게 온 모든 인연들과 하나 되어 서로를 가꾸어 나가는 것이 시 쓰는 노릇임을 마지막까지 잊지 않으려 한다.

 

 

 

 

 

[심사평] 깔끔한 표현으로 서정적 구체성·투명성 살려

 

이번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많은 분이 응모해주셨다.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부쳐진 작품들을 함께 읽어가면서, 일부 작품이 만만찮은 시간을 축적한 결과라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우리 주위의 타자들을 애정 깊게 응시한 결실도 많았고, 스스로의 경험적 구체성에 정성을 쏟은 사례도 많았음을 깊이 기억한다. 이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함께 주목한 이들은 모두 세 분이었다. 이혜리, 최혜성, 정신희씨가 그분들인데, 오랜 토론 끝에 심사위원들은 정신희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혜리씨의 작품들은 감각적 장면들을 상상적으로 모자이크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충격과 반응으로 연쇄해 가는 감각 운동이 진정성과 독자성과 연관성을 두루 지니고 있었다. 최혜성씨의 시편은 특별히 미동이 끝까지 경합하였는데, 매우 밀도 높은 관찰과 표현이 특장으로 거론되었다.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소묘의 집중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결국 정신희씨의 가족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전언의 구체성과 깔끔한 표현, 그리고 착상과 비유의 과정이 안정된 역량을 보여주었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이 시편은 규칙적으로 서로를 향해 다가가면서도, 맹목과 위험을 동시에 지닌 관계로 가족을 파악한다. 물론 이러한 파악이 정신희씨만의 개성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당선작은 그러한 파악을 그가 먼저 돌을 놓기를 기다리는 동안/나는 끝까지 돌을 움켜쥐고 있었다는 표현에서 보이는 긴장과 예각적 균열을 통해 보여주고, 나아가 의 뒤섞임, 팽창, 멈출 줄 모르는 질주의 형상과 그것을 어울리게 하면서 서정적 구체성과 투명성을 동시에 살려주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점 여러모로 신뢰를 주기에 족했다.

 

심사위원 정호승(시인), 유성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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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조성식
 

 

집에 들어서면 대문 옆에 헛간이 서고처럼 서 있는데 처마 끝에 도서 대여목록 카드처럼 여섯 자루의 호미가 꽂혀 있다. 아버지 호미는 장시간 반납하지 않은 책처럼 한번 들고 나가면 며칠씩 밤새고 돌아온다. 산비탈을 다듬는지 자갈밭을 일구는지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자루만 조금 길면 삽에 가까운 호미, 그 옆에 어머니 호미는 가장 많이 빌려 보는 연애소설 같다. 테이프 여러 번 붙인 표지에서 파스 냄새가 난다. 빛나는 손잡이에 밥주걱의 둥근 날을 가진 넉넉한 호미, 땅을 파는 일보다 아버지가 파 놓은 흙을 다시 훑어보는 돋보기 알 같은 눈 밝은 호미, 나란히 서 있는 아내와 내 호미는 주말이나 가끔 들고 나가는 장식용 백과사전, 철물점 쇳내도 가시지 않은 두 자루 쇳덩어리, 제대로 땅 한 번 파지 못하고 마늘이나 고구마 살점만 물어뜯는 날선 칼날, 그 옆에 장난처럼 걸려 있는 아이들의 호미가 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밭에 나가실 때 말동무로 따라 나서는 동화책같이 착한 호미가 한집에 산다.

 

 

 

 
[당선소감] '호미 손잡이 빛낸 부모·이웃이 스승'


호미가 시의 선생님입니다. 호미의 손잡이를 빛나게 하는 아버지 어머니, 함께 땅을 파는 이웃들의 갈라진 손금이 시의 스승입니다. 시는 쓰는 게 아니라 그려야 한다고, 팔순의 어머니 눈에 선하게 읽혀지는 시. 그 밑그림에 색만 덧칠하는 것이 저의 몫입니다.


시와 꽤 오랫동안 함께 걸었습니다. 내가 먼저 불평을 했고 이별을 고한 적도 있었습니다. 시는 아무 말 없이 그림자처럼 제 뒤를 따라왔습니다. 무거운 제 몸에 시가 날개를 선물합니다. 이제 내가 시를 등에 업고 이웃들에게 날아갑니다. 무디고 날카로운 세상의 일을 다 받아주는 땅으로 시의 뿌리를 내리고 싶습니다. 당선 소식이 늦게까지 잠 못 이루게 합니다. 소주잔에 기쁨 반 두려움 반을 따라 마십니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비무장지대 동인들과 시의 라이벌 은기찬 형, 시 쓰기에 늘 격려해주신 이정록 형과 밤늦도록 술잔을 비우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조준희 조은진, 아빠가 오늘처럼 행복할 때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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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호미와 도서관 카드 결합한 발상 참신'


본심에 올라온 응모작들이 비교적 고른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 같아 흐뭇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고정된 시각을 버리고 어떻게 세상을 새롭게 보는가에 심사의 초점을 맞췄다. 시의 값은 세상과 사물의 내면에 숨어 있는 비의(秘意)를 캐내는 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풍경〉은 시를 다루는 솜씨가 퍽 세련돼 있다. 삶의 갈피에 품은 신비성과 아픔 등이 거슬림 없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소재의 진부성과 새로운 시각이 부족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2007 몽유도원도〉는 비교적 새로운 구성법과 다양한 상상력을 거느리고 있으나 다소 산만한 느낌이 들어 최종선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가족〉을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다. 도서관의 카드목록과 농기구인 호미를 결합해 시를 구성한 발상이 매우 참신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가지의 사물을 매우 절묘하게 합성함으로써 읽는 이에게 새로움과 감동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가족의 분열 현상으로 따뜻함을 잃어가는 현대의 을씨년스러움을 극복하고 가족 각자의 기능과 역할을 통해 가정의 포근함을 회복하려는 숨은 메시지도 이 시대에 매우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작품도 구성의 단순성이 지적되었다. 좀더 많은 사유와 상상적 세계를 구축하는 힘을 기른다면 매우 좋은 시인이 될 것으로 심사위원들은 믿는다.

 

심사위원 문효치·신규호·손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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