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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아이스 / 민소연

- 결혼기념일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짙은 약속을 얼떨결에 움켜쥐었을 때

새끼손가락 끝에 검붉은 피가 모였을 때

 

치밀한 혀를 가지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어떤 밤엔 마침내 혀를 쓰지 않고도 사랑을 발음했다

 

맺혔던 울음소리가 몇 방울 떨어지고

태어나고

 

수도꼭지를 끝까지 잠갔다

한밤중엔 그런 소리들에 놀라서 문을 닫았다

너무 규칙적인 것은 무서웠다 치열하게

몸을 움직이는 초침 소리나

몸을 웅크린 채 맹목적으로 내쉬는 너의 숨소리가 그랬다

 

거듭 부풀어 오르는 뒷모습을 보면서 호흡을 뱉었다

어쩌면 함께 닳고 있는 것 같았다

박자에 맞춰 피어오르는 게 있었다 입김처럼

희뿌옇고 서늘했다

 

숨을 삼키다 체한 밤이면 너를 깨웠다

내기를 하자고 했다

누가 더 먼저 없어질 것 같은지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해보자고 했다 너와 나는 모두

내가 먼저일 거라는 결론을 내려서

 

우리는 오래도록 같은 편이 되었다

내가 죽은 척을 하면 너는 나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등 뒤에서 각자의 깍지를 움켜쥐었다

영원한 타인에 대해 생각했다

손끝에 짙은 피가 뭉치면

 

동시에 숨을 전부 내쉬었다

 

품 안에서 녹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살갗이 들러붙었다

 

 

 

예스이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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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부족함 많은 글 가능성 열어줘 감사합니다”

 

문득 거울 속에서 낯선 사람과 눈이 마주칠 때가 있다. 글을 쓰겠다는 건 그런 거울을 자꾸만 닦겠다는 것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기분이 들 때면 그날의 감정을 글로 정리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고 나면 나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되었고, 더는 그 기분이 낯설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는 내가 들어 있지 않은 글을 썼다. 나와 같은 감각을 공유하는 인물만이 거기 있었다. 나의 글 속에서 나라고 우기는 인물들이 나 대신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의 글을 시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가끔은 내가 시라고 부르는 것들이 나 혼자만의 꿈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잠에 덜 깬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는데 당선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소식을 듣자마자 졸음이 한 번에 달아났는데도 도통 정신이 또렷해지지 않았다. 조금 전 꿈에 있을 때보다도 실감이 안 났다. 축하해주시는 기자님께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감사 인사를 드렸다.

 

부족함 많은 글에 가능성을 열어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덕분에 나의 글이 혼자만 믿는 꿈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기로만 남을 수 있던 글을 믿고 시가 될 수 있게 만들어준 이희진 선생님과 시를 통해 더 넓은 시야를 갖게 해준 장석남 교수님, 권혁웅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나보다도 나의 글을 의심하지 않고 응원해주며 매주 스터디를 함께한 우리 학교 언니들과 친구들에게도 감사와 응원을 전한다. 당선 소식을 알고 “내가 된 것도 아닌데 손이 다 떨린다”면서 기쁨을 함께해준 친구들을 비롯해, 당선의 기쁨만큼이나 축하의 기쁨으로도 가득하게 해준 모든 분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매번 나의 선택을 믿고 지켜봐 준 가족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심사평] “착상·비유 안정적 구현… 서늘한 감각 탁월”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많은 작품이 응모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여러 편을 함께 읽어가면서 일부 작품이 만만찮은 공력과 시간을 쌓아온 성과라는 데 공감하였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타자들을 관찰하고 해석한 결실도 많이 보였고, 경험적 구체성에 정성을 쏟아 내면의 정직한 기록이 되게끔 한 사례도 많았음을 기억한다. 이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이들은 모두 세 분이었는데, 김운, 노수옥, 민소연씨가 그분들이다. 오랜 토론 끝에 결국 민소연씨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 심사위원 : 안도현·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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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의 스페인 / 이신율리

 

 

죽는 사람들 사이로 날마다 비가 내린다

사과는 쓸모가 많은 형식이지 죽음에도 삶에도

 

수세미를 뜬다 사과를 뜬다

코바늘에 걸리는 손거스러미가 환기하고 가는 날씨

를 핑계로 미나리 전이나 부칠까

 

미나리를 썰 때 쫑쫑 썰어대는 말이 뒤섞인들 미나리

탕탕 오징어를 치며 바다가 보인대도 좋을

 

다행히 비 내리는 날이 많아 그 사이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

올리브 병에서 들기름이 나오면 핑계 삼아 한판

사과나무에서 다닥다닥 열린 복숭아를 다퉈도 되고

소금 한 주먹 넣으며 등짝도 한 대

 

단양과 충주 사이에 스페인을 끼워 넣는다

안 될 게 뭐 있어 비도 오는데

스페인보다 멀리 우린 가끔 떨어져도 좋을 텐데

 

철든 애가 그리는 그림 속에선 닭 날개가 셔터를 내리고 오토바이를 탄 새가 매운 바다에서 속옷과 영양제를 건져 올렸다 첫사랑의 정기구독은 해지했다

 

꽃병에 심야버스를 꽂았다 팔다리가 습관적으로 생겨나는 월요일, 아플 때마다 키가 자라는 일은 선물이었다

 

불꽃이 튀어도 겁나지 않은 나이는 이벤트였지

 

단풍 들지 않는 우리를 단양이 부른다 스페인은 멀고

안전벨트를 매고 접힌 색종이처럼 사진을 찍는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누군가 멀리 떠난다

 

 

 

 

[당선소감] “이 세상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감사합니다

 

까마귀가 얼어붙은 목청을 녹이자 유자나무가 등불을 켭니다. 노랑은 빨리 달려오는 발목을 가졌다고 생각할 때 벨이 울렸습니다. 편두통은 어느 계절을 돌아 여기 와서 끝이 되었을까. 손끝에 모은 0도에서 바닐라 라떼를 만들어 오래된 연인들에게 나눠주는 상상을 합니다.

 

희망이 텅텅 비었던 정오의 숲에서 길을 잃고 나를 잃었던 시간들 쓸모없는 것에 관심이 많아 세계를 건너 너에게로 간다고 썼습니다. 우주가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깨어나 또 다른 나를 찾아 젤리를 뿌리고 스티커를 붙여 내 안에 어떻게 나를 배치할까 궁리합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말들이 새 이마를 가지고 수천 번의 질문을 하는 상상로를 걸어옵니다.

 

초승달에 그네를 매 하늘을 날았다는 당신의 태몽이 맞았습니다. 죽은 가지를 부러뜨리면서 나는, 밤나무 숲을 걸어 나옵니다.

 

길 열어주신 나의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감사합니다. 선해주신 심사위원님, 세계일보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인생론적 깊이 함축언어적 안정감 탁월

 

202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응모작들은 예년에 비해 숫자는 조금 줄었지만 그 수준과 내실은 더욱 탄탄해졌다고 할 수 있다. 역량 있는 신인들이 이렇게 다양한 작품을 투고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게 다가왔다. 심사위원들은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을 읽어가면서 다수 작품이 빼어난 언어와 안목을 보여주었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시단의 주류 시풍이나 관습적 언어를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의 경험적 언어에 오랜 시간과 정성을 쏟았을 작품들이 많았다. 침체기에 있는 한국 시는 이들의 언어를 통해 새로운 개진을 해갈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그 가운데 김하미, 이신율리, 조민주씨의 작품을 오래도록 주목하였는데, 숙의 끝에 상대적으로 균질성과 언어적 안정감을 가진 이신율리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신율리씨의 비 오는 날의 스페인, 비가 내리는 풍경 속에서 구성해가는 사람살이의 외관과 생태와 속성이 인생론적 깊이를 함축하고 있는 수작이다. 그 안에는 음식들에 관한 숱한 기억의 구체성과 함께, 스페인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더 멀리 떠나 있어도 좋을 사랑과 불꽃과 시간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수없는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의 파노라마가 환상성과 역동성을 함께 거느리면서 그림처럼 사진처럼 다가온 선물이자 이벤트였다. 더욱 성숙한 시편으로 세계일보 신춘문예의 위상을 높여주기 바란다.

 

당선작이 되지 못했으나 구체성과 심미성을 두루 갖춘 사례들이 많았다는 점을 부기한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는 타자들을 애정 깊게 응시한 결실도 많았다. 다음 기회에 더 풍성하고 빛나는 성과가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응모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마음 깊이 당부 드린다.

 

심사위원 안도현·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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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독 / 변혜지

이 세계를 네가 구했어.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린다. 폐허가 된 도시에 둘러싸여서, 꿈속의 나는 아름다웠다. 나의 아름다움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였다.

눈을 빼앗길 만한 장면이어서 나는 이 세계와 어울리는 음악을 마련하였다.

화관(花棺) 속에 두 손을 가슴에 모은 내가 누워있었고, 살아남은 모든 이들의 행렬로 거리가 잠시 가득 찼다.

나는 어떻게 이 세계를 구했나. 나의 궁금증이 이 세계와 무관하였다.

연인이 내게 입을 맞추며 엄숙하게 사랑을 맹세하였고,

잠들었던 관객이 영화의 결말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듯이, 나는 영문 모를 격정에 휩싸였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 네가 아니야. 내가 꿈속의 나를 향해 소리치자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일제히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행렬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의 격정이 나와 무관하였고, 화관에 누운 내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비로소 이 꿈의 구성방식을 알 것 같았고,

나는 이 세계에 두고 나가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당선소감] “기나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응원·채찍·사랑

 

빗장뼈 안쪽에 양을 기르는 친구가 있었다. 그 이야기가 아름다워서 나는 언덕을 갖고 싶었다. 언덕 위에 양을 풀어 놓으면 양은 언덕 너머로 넘어가 보이지 않았다.

 

때로는 시를 써서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너를 생각하면서 썼다고 말해주었다. 누군가 그 사람들을 몰고 언덕 너머로 떠나갔다. 돌아오지 않았다.

 

미워할 사람들이 없어서 나의 미운 구석들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주인공인 시들을 자꾸자꾸 보여주었다. 아무도 나를 데리고 떠나지 않았다. 종종 언덕 너머에서 메에-메에- 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너희들을 사랑해. 매번 같은 대답을 했다.

 

이 서툰 발걸음을 응원해주신 세계일보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정말 긴 시간 동안, 마음 놓고 비빌 수 있는 언덕이 되어주신 박형준 선생님, 오랜 시간 지켜봐 주시고, 격려해주신 김춘식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고집 센 학생을 놓지 않고, 응원과 채찍을 아끼지 않으시던 이원 선생님, 박판식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나의 십 대를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주신 어딘, 정우영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당선 소식을 듣고 내 대신 잠을 설친 엄마에게 사랑을 전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열거할 수가 없다. 같이 쓰고 같이 떠들고 같이 고함치던 모든 친구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한다.

 

 

 

 

 

 

 

돌고래 기르기 / 한준석

미소는 돌고래로 기르기 좋습니다

돌고래의 주파수를 라디오로 들어요

나는 무심하게 시작되어집니다

축축하게 연필심이 밤새 헐었습니다

돌고래는 미소에 좋습니다

 

나는 웅크리기 좋은 무게로 태어났어요

돌고래의 고도는 새떼의 무게 같아요

새들이 흩어지는 사이로 연필 소리가 들립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나가는 새를

잃어버렸다 말할 수 있을까요

나무에 없는 새들을 세어보는 일은

열 손가락으로 모자라고

두 팔로는 충분한 일입니다

 

돌고래를 기르기에는 남해에 사는 당신이 좋습니다

눈 내리는 남해로 가는 버스 창밖

길러 본 적도 없는데

둥글게 헤엄치는 돌고래를 바라봅니다

나는 당신의 웃음을 빌려 가벼워지고 싶습니다

일기예보에 오늘 아침은 잔기침을 주의하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안정은 멀리 있습니까

나는 이런 예감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눈 감으면 버스의 흔들림만 남겨집니다

 

나는 돌고래가 아닙니다

나는 버스에서 내릴 줄 압니다

잘 가, 돌고래는 휘어지는 몸짓으로 수평선을 밀어내고 있어

끝에서 끝이 부드럽게 멀어져야 좋은 미소

나는 돌고래로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돌고래는 미소를 기르기에 좋습니다 슬픔을 조심합니다

세계는 서로를 미끄럽게 기를 줄 알고

나는 입김에서 햇빛으로 조용하게 옮겨집니다

 

나는 한 종류의 돌고래가 됩니다

 

 

 

[당선소감] “바르셀로나에서 마음먹은 꿈 이뤄앞으로 더 정진할 것

 

바르셀로나에서 처음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한국의 가을쯤 되는 때에 사람들이 반팔을 입고 돌아다닙니다. 시차를 생각하지도 않고 한국으로 연락을 걸었던 사람은 지금까지도 소설가의 마음을 지닌 채 의자에 기대 있습니다. 귀국 후 시를 쓰겠다고 홀연히 들어간 양평의 산골 집 옆에는, 기면증 걸린 수학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가끔씩 제 시를 보고서는 재미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학교에 입학해 허우적대던 나의 손가락에, 시차가 달랐던 그 형이 같은 학교를 다니며 연필을 쥐여줬습니다. 그렇게 올해까지 시를 썼습니다. 소감을 쓰고 있는 지금 제 옆에는 이름만 종이에 썼다 지워도 오랫동안 머무를 사람이 있습니다. 은별아, 너무 고맙다. 모두 감사합니다.

 

나의 애칭 꾸르끼, 바르셀로나의 지영 누나와 토미 형! 보고 싶어요. 제 은사님이신 권혁목 선생님, 중요한 순간마다 해주셨던 말씀이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사랑하는 나의 친구들아, 너희 덕분에 내 많은 순간들이 아름다웠어! 지금까지 시를 쓸 수 있도록 도움 주신 선생님들, 앞으로도 헤매지 않고 정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가족. 아버지, 어머니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누나, 매형 항상 응원해 줘서 감사해요. 마지막으로 저의 가능성을 너그럽게 높이 사주신 심사위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시가 너무 좋습니다.

 

 

 

 

[심사평] “작품마다 상처 치유코자 대변과장되지 않은 비유·상징어 눈길

 

저마다 고립된 외딴섬처럼 단절과 멈춤이 뼈저렸고, 과연 우리가 우리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을까, 물음만으로도 버겁고 지난했던 시기. 예심을 거친 스물다섯 분의 시편들이 공통적으로 시절의 무력감에 대응하며 상처와 아픔을 치유코자 대변하고 있었으니, 왜 문학이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을 안기며 시대의 가늠자 역할을 자임하는지 여실히 실감케 했다.

 

최종 논의로 하연, 김성백, 홍진영, 변혜지, 한준석 씨의 작품을 주목했다.

 

하연의 작품은 익숙한 표현과 소재들이란 점이 아쉬웠다. 김성백의 경우 팬데믹 시대를 겪고 있는 젊은 세대의 고민을 엿보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지만 감정과 표현이 곰삭을 시간이 필요하리라 여겨졌다. 홍진영에게서는 시어와 이미지를 다룰 줄 아는 기본적인 능력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몇 개의 서툰 문장들이 심사자의 눈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장래를 위해서 올해의 보류가 본인들에게 더 큰 득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긴 시간 변혜지의 언더독과 한준석의 돌고래 기르기를 놓고 토론을 벌였으나 아쉽지만 당선에 준하는 가작 2편을 뽑기로 합의했다.

 

변혜지의 언더독은 남다른 사유의 깊이로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과장되지 않은 비유를 제대로 다룰 줄 알았고, 절제된 수사의 미덕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어 모자람을 찾기 어려웠다. 막힌 혈로를 뚫듯 날카롭고 예민하되 부드러움과 유연함을 아우르는 너끈한 묘사력을 겸비했으니, 이만한 사유의 세계라면 우리 시단을 풍요롭게 메우고도 남으리란 믿음에 선작(選作)으로 민다. 언제까지 무거운 짐을 걸치고 거침없이 나아갈지 모두가 기대를 걸고서 지켜보리라.

 

한준석의 돌고래 기르기돌고래라는 상징어를 넣어 이미지가 보일 듯 말 듯 그려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미소는 돌고래를 기르기에 좋습니다의 표현이 말하듯 시가 기본적으로 비유의 장르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돌고래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불분명하지만 시 내용으로 보아 사랑, , 슬픔, 기쁨까지 다 아우르게 한다. 돌고래 자리에 이 단어들을 집어넣고 읽어보면 금세 느껴질 것이다.

 

두 분을 축하하며 최종심에 오른 분들도 조만간 지면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위로의 말씀을 얹는다.

 

심사위원 김영남·이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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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주머니에 사탕 있는 남자 찾기 / 김지오(김임선)

 

 

그때 오른쪽 주머니에

사탕 있는 남자가 내 앞을 지나간다

 

혹시, 당신의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세요? 어머,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도둑 아니고 강도 아니에요 당신의 왼쪽 바지 주머니라 해도 상관은 없어요 당신의 왼쪽 심장이라 해도 상관없지요

 

혹시, 사탕 있으면 한 개 주실래요? 에이, 거짓말! 나는 당신의 주머니를 잘 알아요 한 번 만져 볼까요? 꽃뱀 아니구요 사기꾼 아니에요 그렇게 부끄러워 할 것 없어요 그럼 당신 손으로 당신 주머니에 손 한 번 넣어 보세요 어머, 그것 보세요 사탕이 남아 있다니 당신에게 애인이 없다는 증거예요

 

그것이 어떻게 당신의 주머니에 들어갔는지 당신은 모를 수 있어요 누구에게나 주머니에 사탕 한 개씩은 들어 있어요 사랑 말이에요 세균처럼 바이러스처럼 그 사탕 나한테 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달콤한 것을 좋아해요 유난히,

 

망설이지 마세요 그 사탕 내게 주면 당신 주머니에는 또 다른 사탕 생길 거예요 사랑처럼 말이에요 경험해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일 맞아요

 

사탕 대신 꽃은 어때요?

어머, 꽃 피우는 당신 마법사였군요

 

꽃을 나눠 가진 우리

이제 달콤해집니다

 

 

 

2020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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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험 낙방 꿈꾸고 당선신인의 마음으로 정진

 

꿈을 기다렸다.

 

빨간 사과를 먹는 꿈, 흙탕물이 거세게 집안으로 들이닥치는 꿈이 아니라,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를 타고 내리막길을 곤두박질치는 꿈이 아니라, 잘 익은 감이나 따러 감나무에 올라가는 꿈, 기다리다가 운전시험을 보러 가는 길이 꽉 막혀 시험장에는 도착도 못하고 시험에 떨어졌다는 통보를 받는 꿈을 꾸고 당선 소식을 받았다.

 

시인은 정수리에 시의 뿔을 달고 태어나는 사람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시를 향한 욕망이 들끓을 때는 미움, 하는 마음으로 외면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나의 왼눈이나 오른눈 어느 한쪽은 곁눈질을 하고 있었나 보다. 양파 싹을 키우며 장난삼아 사진 기록을 하다가 불현듯 동시 한 편을 썼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느닷없이 깨달음이 왔다. 이것이 시로구나. 그대, 시여! 이토록 오래 나를 기다려주었구나.

 

꿈이 내게로 왔다.

 

하루 종일 가슴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하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서러운 마음으로 찔끔 울었다. 잊히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를 다독이느라, 주눅 든 마음을 추스르며 버티느라 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다시 신인이다. 아니아니 이제 신인이다. 죽지 말고 더 오래 견디어 볼 핑계가 생긴 것이라 생각한다. 이중연애가 시작된 것이니만큼 더 많은 시간과 노력으로 상대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둘 다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다. 내 머리 정수리에도 시의 뿔 하나 생겨나기를 바라며.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심사평] “대화체·소설 화법 활용한 발랄한 표현 신선

 

응모작이 늘었다고 하지만 금년도 응모작의 수준은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작품의 소재는 일상적인 삶의 체험이 주종을 이루었고 그 길이도 상대적으로 길었다. 압축과 긴장의 강도가 약하게 느껴지는 작품이 상당수 있었다. 실험적인 시편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엇비슷한 작품들이 보여주는 일상에의 침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심에 오른 26명의 응모작 중 노수옥, 곽광덕, 김지오의 작품이 최종적으로 논의되었다.

 

노수옥의 기묘한 병()’은 질병과 물병의 한자어가 자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흥미롭게 시작하지만 결말에 이르러서는 언어적 유희성이 짙어 내용이 다소 가볍게 읽힌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곽광덕의 아직 키워드는 가족의 이야기를 남북정상, 건강진단 등의 시사(時事)적 언어를 동원해 매우 인상적인 체험을 그려내고 있지만 피아골, 파르티잔 같은 시어들이 현장감을 심도 있게 살리지 못하여 시적 부담으로 다가왔다.

 

상당한 논의 끝에 김지오의 오른쪽 주머니에 사탕 있는 남자 찾기를 당선작으로 한 이유는 대화체, 소설화법을 활용한 내용 전개의 신선감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외설스럽게 읽힐 수도 있는 한 남자의 호주머니 속 심벌을 화두로 내세워 사탕·사랑·꽃의 의미로 발전적으로 승화시키는 시적 능력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머, 꽃 피우는 당신, 마법사였군요같은 마지막 부분의 발랄한 표현이 이를 증명할 것으로 본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리고 아깝게 탈락한 분들에게는 격려의 말씀을 전해드린다.

 

심사위원 최동호·김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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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가장 작은 별이 발견되다 / 박신우

 

별이 깃든 방, 연구진들이 놀라운 발견을 했어요 그들은 지금까지 발견된 별 가운데 가장 크기가 작은 별을 발견 했습니다 그 크기는 목성보다 작고 토성보다 약간 큰 정도로, 지구 열 개밖에 안 들어가는 크기라더군요 세상에 정말 작군요, 옥탑방에서 생각했어요 이런 작고 조밀한 별이 있을 수 있다니 하고 말이죠 핵융합 반응 속도가 매우 낮아서 표면은 극히 어둡다고 합니다 이제야 그늘이 조금 이해되는군요

 

이 별의 천장은 매우 낮습니다 산소가 희박하죠 멀리서보는 야경은 아름다울지 몰라요 어차피 낮에는 하늘로 추락하겠지만 그래도 먼지가 이만큼이나 모이니 질량에 대해 얘기할 수 있군요 그건 괜찮은 발견이에요

 

먼 곳에서 별에 대해 말하면 안돼요 다 안다는 것처럼 중력을 연구하지는 말아야죠 피아노 두드리듯 논문을 쏟아내지 말아요 차라리 눈물에 대해 써보는 게 어때요 별의 부피를 결정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둘레를 더듬는 일이죠 옥상난간을 서성거리는 멀미처럼 말이에요

 

여기 옥탑에서는 중력이 약해서 몸의 상당부분이 기체로 존재해요 그래요 모든 별들은 항상 지상으로 언제 떨어질지 숨을 뻗고 있는 거죠

 

 

 

 

2019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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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취소]

 

2019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으로 발표됐던 박신우씨의 작품 역대 가장 작은 별이 발견되다의 당선을 취소합니다. 이 작품은 인터넷 블로그 고든의 우주이야기의 내용을 출처 표기 없이 가져와 창작한 것으로, 표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심사위원단의 최종 판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당 심사위원들은 “2019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역대 가장 작은 별이 발견되다는 심사과정에서 출처나 주석 없이 투고되어 당선작으로 선정되었으나, 작품 발표 후 일어난 논란을 심사숙고한 결과 표절의 시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심사의 엄정성을 위해 당선을 취소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당선 취소 이유를 밝혔습니다. 세계일보는 신춘문예 응모와 심사에 대한 엄정한 기준을 적용한다는 차원에서 당선을 취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응모자는 이 결정을 수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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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의 공식 / 우남정(우옥자)

 

 

접힌 표정이 펴지는 사이, 실금이 간다

 

시간이 불어가는 쪽으로 슬며시 굽어드는 물결

무심코 바라본 먼 곳이 아찔하게 흔들리고 가까운 일은 그로테스크해지는 것이다

 

다래끼를 앓았던 눈꺼풀이 좁쌀만 한 흉터를 불쑥 내민다 눈꼬리는 부챗살을 펼친다 협곡을 따라 어느 행성의 분화구 같은 땀구멍들, 열꽃 흐드러졌던 웅덩이 아직 깊다

 

밤이라는 돋보기가 적막을 묻혀온다 달빛이 슬픔을 구부린다 확실한 건 동근 원 안에 든 오늘뿐, 오무래미에 샛강이 흘러드는 소리, 쭈뼛거리는 머리카락이 먼 소식을 듣고 있다 몰라도 좋을 것까지 확대하는 버릇을 나무라지 않겠다

 

웃어본다 찡그려본다 쓸쓸한 표정을 지어본다

()에도 자주 눈물을 주어야겠다고,

청록 빛 어둠이 내려앉는 저녁

지금 누가 나를 연주하는지

주름이 아코디언처럼 펴졌다 접어진다

 

분청다기에 찻잎을 우리며

실금에 배어드는 다향(茶香)을 유심히 바라본다

 

먼 어느 날의 나에게 금이 가고 있다

무수한 금이 금을 부축하며 아득히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2018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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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긴 기다림 끝 기쁨이제 또다른 여정 시작 

 

그날, 대설주의보가 발효되었지만 어느 늦깎이 소설가의 출판기념식 참석차 공주에 가 있었다. 기대와 우려가 폭설이 되어 정처 없이 한옥마을을 덮는 밤. 절절 끓는 구들장에 풀어놓았던 몸을 추스르며 길을 나서고 있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의미는 사라지고 있다. 구태의연한 말씀은 재미없다. 더 신선하고 더 창의적이고 더 발랄하고 더 엉뚱한 것을 즐긴다. 새로운 물건들, 새로운 언어들, 새로운 상상들이 차고 넘친다. 오래된 것들이 빛을 잃는다. 앞으로 걸어가는 데도 자꾸 뒤로 밀리는 것 같은 속도.

 

할 수 있을까막막한 물음에 대한 회신이 도착했다.

내 손을 들어준 최동호 황인숙 심사위원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처럼 자기가 기다리는 것이 뭔지도 모른 채, 그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분명 오고 있는, 그러나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것. 돌아보면 국어선생님을 짝사랑하던 소녀시절부터, 지독한 페미니스트로 이 땅의 딸과 어머니로 살아낸 날들 속에도 면면이 오고 있었을, 지금도 오고 있고 앞으로도 오고 있을, 그것은 삶을 관통하는 오랜 희망이라는 것을 알 것 같다.

 

자신을 불태우고 그 재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신화의 새처럼, 뼛속 깊이 새겨진 구태를 벗겨내는 일은 더디고 혹독했다. 기쁘다. 자고 일어나도 기쁘다. 이 기쁨이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나를 지켜주기를 기도한다. 나의 당선이 누구엔가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마음이 어둑할 때, 늘 불빛이 되어주는 경희사이버대학 김기택 교수님을 떠올리며 걸어왔다. 격려를 아끼지 않은 유종인 시인, 윤성택 시인, 마경덕 시인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오랫동안 함께한 새울음나무’, ‘글샘’, ‘책이 있는 풍경文友,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흡사 바다에 이른 강물이 비가 되어 다시 시원을 향해 떠나는 여정과 같은, 나의 를 꽃 피우고 싶다. 문단에 그늘이 되지 않도록 정진을 다짐해 본다. 이제 또다시 시작이다!

 

 

 

 

[심사평] “섬세하고 감각적인 목소리 돋보이는 작품” 

 

신춘문예 예심 통과 작품이 담긴 봉투를 열어보는 건 사실 숙연한 일이다. 어떤 진기한 보석, 혹은 어떤 신비로운 식물이나 동물과 감전되듯 조우하게 되기를 바라 마지않지만, 그런 행운이 닿지 않더라도 봉투 안에는 자신의 생을 시에 걸어보려는 이들의 시적 감수성을 꿈틀거리게 한 삶과 최선을 다한 기량이 오롯이 지어낸 시편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처음에 심사자들은 본심에 올라온 21명 응모자의 작품들이 다 고만고만하고 확 오는 게 없다고 착잡해했는데, 최종 후보자 세 사람을 두고 당선작을 고를 때는 다 뽑을 만한 것 같아 행복한 갈등으로 갈팡질팡했다. 같은 작품들을 두고 상이한 반응을 일으킨 원인은 아마 처음에는 너무 큰 기대치로 티끌 같은 흠도 잡아내게 됐고,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에서는 내려놓기 아까운 장점이 마음을 붙들어서이리라.

 

꽃밭과 물고기와 뛰는 물4편을 응모한 정금하씨의 작품들은 깔끔한 감각과 상상력이 돋보였다.

 

특히 공중무덤이 심사자들의 눈을 끌었는데, 자기의 기록을 깨는 게 목표인 운동선수처럼 그만한 웅숭깊음을 기준으로 시를 쓴다면 참으로 매혹적인 시인이 될 듯하다.

 

지난 시간은 풍경이 된다 해도4편을 응모한 장정희씨 작품들 중 은행나무 솜틀집은 완성도 높은 따뜻한 시로서 재미있게 읽힌다. 리듬감 있게 언어를 이끌고 가는 감각이 범상치 않은데, 굳이 흠을 잡자면, 소재가 좀 신선도가 약하다.

 

당선자는 돋보기의 공식4편을 응모한 우남정씨다. 그의 응모작 중 죽은 발톱은 섬세하고 적확한 묘사로 이야기를 끌어가며 탄탄한 구조의 서사를 만들어낸다. “세상을 지키는 힘은 저 묵묵한 마중에 있었다.”로 마감되는 희망의 메시지도 새해 첫날을 장식하는 신춘시로 제격이어서 물망에 올랐지만, 우남정씨의 감각과 목소리를 더 섬세히 음미할 수 있는 돋보기의 공식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축하합니다!

 

싱싱하고 싱그럽고 신선할 듯한, 새파란 청년 응모자가 줄어드는 추세는 아마도 생존문제가 절박한 ‘77만원 세대에게 시가 사치여서가 아닐까. 문학에 뜻이 있었으나 생활에 쫓겨 습작 단절시기를 가졌다가 다시금 문학을 시작하는 이들이 많아진 것 같다. 그대로 묻혔으면 아까울 재능을 발굴한 듯한 즐거움이 각별하다.

 

심사위원 최동호·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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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풋 / 석민재

 

 

군함처럼 큰 발을 끌고

 

아버지가 낭떠러지까지

 

오두막집을 밀고 갔다가

 

밀고 왔다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스텝을 맞추며

 

말기 암, 엄마를 재우고 있다

 

죽음을 데리고 놀고 있다

 

죽을까 말까 죽어줄까 말까

 

엄마는 아빠를 놀리고 있다

 

아기처럼 엄마처럼

 

절벽 끝에서 놀고 있다

 

 

 

 

2017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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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꿈꾸던 성탄 선물투병 중 모친께 바친다

 

누구나 그렇듯이 쓸모없는 하나님이 제게도 있습니다. 감사와 은총보다는 원망과 타박이 필요할 때 종종 요긴합니다. 그런데 가끔 산타클로스처럼 선물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은 좀 놀랍습니다. 아니 많이 놀랍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줄 선물을 잠깐 혼동하신 게 아니었나 할 정도로. 마치 어린 여자아이가 받은 성인용 브래지어·팬티 선물세트처럼 당선 통보는 신기하고 민망하고 설렜습니다.

 

고백하건대 저는 시를 잘 모릅니다. 내가 써놓고도 잘 모릅니다. 아무리 봐도 가짜 같아서 어디다 버젓이 내놓을 만한 물건이 못 됩니다. 하지만 가끔 자해공갈단처럼 내 시를 중인환시에 던져놓고 싶었습니다. 온갖 모욕과 모멸을 참담하게 당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기다리고 있던 수모 대신 누군가가 칭찬을 해줄 때는 하나님처럼 난감합니다. 그 칭찬을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어서 혼란스럽습니다. 지금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꿈꾸던 농담이지만 비현실적입니다.

 

무슨 군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앞으로 잘 써야지요. 이렇게 겨우 시를 흉내 내는 데도 얼마나 많은 분들에게 빚졌는데요. 특히 진주의 김언희, 유홍준 선생님, 하동의 김남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들이 아니었으면 산타클로스는 저를 알아보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이신 친정의 어머니와 극진한 간병인이신 아버지께 이 선물을 고스란히 드립니다. 잠시 효도한 것 같아 위안이 됩니다.

 

끝으로 뽑아 주신 김사인, 황인숙 선생님과 세계일보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 한 줄의 약력을 쓸 때마다 상기하겠습니다. 이 어색한 소감문은 얼른 끝내고 서둘러 나를 학대하러 가야겠습니다.

 

 

 

엄마는 나를 또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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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해학·역설의 묘미 살려 삶의 애환 잘 갈무리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좋게 말하면 말과 느낌을 적절히 짜 맞추는 솜씨들이 상당해서 안정감이 있었다. 그런데 한 발 떨어져서 보면 평면적이고, 어딘가 낯익은 형언과 방식에 기대어 있는 느낌이다. 그런 가운데 석민재씨의 응모작 계통2편은 단연 돋보였다. 그의 시들은 수월하게 읽히면서 수려한데 그 속에 삶의 애환이 갈무리돼 있다. 또 근년의 젊은 시인들에게서 보암직한 축조방식으로부터도 자유로이, 시를 다루는 방식이 신선하다. 좋은 시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응모한 세 편의 시들이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건 빨강 네가 아무리 우겨도 빨강/파랑 같아도 이건 빨강/노랑 같아도 이건 빨강으로 시작되는 시 계통은 빛깔 이미지들과 이응의 음성상징이 공처럼 통통 튀면서 설사 내용을 모르더라도 읽으면서 기분이 좋다. 그의 시 빅풋을 당선작으로 기쁘게 뽑는다. ‘빅풋은 무지무지하게 슬픈 상황인데 아버지의 당당함(‘군함처럼 큰 발을 끌고’)과 쾌활(‘왼발 오른 발 왼발 오른발 스텝을 맞추며’), 그리고 엄마의 해학(‘죽을까 말까 죽어줄까 말까’)으로 상황을 뒤집어 보여준다. 상상력의 전복, 역설의 묘미를 깔끔하게 끌어낸 시다.

 

함인우(‘아스피린3), 의현(‘여유가 있다면2), 김순철(‘복숭아2)의 응모작들도 놓치기 아까운 작품들이었다. 특히 이미지를 첩첩 겹쳐 연결시키는 힘이 여간 아니며 변두리 주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뛰어난 함인우의 시들이 그러하다. 약국이라는 작은 공간을 그 이름이 우주인 것을 빌려 우리네 작은 세상의 삶과 죽음을 우주에 병치시키는 아스피린이나 피아노와 노파와 파를 음계와 연계시키며 펼치는 버려질 것을, 산다나 삶의 통증과 페이소스로 자욱하다. 당선자께 커다란 축하를, 세 분께 안타까움을 전한다.

 

심사위원 김사인·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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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크나 흰 구름 / 이윤정

 

 

타크나 흰 구름에는 떠나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

배웅이 있고 마중이 있고

웅크린 사람과 가방 든 남자의 기차역 전광판이 있다

전광판엔 출발보다 도착이, 받침 빠진 말이

받침 없는 말에는 돌아오지 않는 얼굴이 있다가 사라진다

 

흰 구름에는 뿌리 내리지 못한 것들의

처음과 끝이 연결되어

자정을 향해 흩어지는 구두들

구두를 따라가는 눈 속에는 방이 드러나고

방에는 따뜻한 아랫목, 아랫목에는 아이들 웃음소리

몰래 흘리는 눈물과 뜨거운 맹세가 흐른다

 

지금 바라보는 저 타크나 흰 구름은 출구와 입구가 함께 있다

모자 쓴 노인과 의자를 잠재우는 형광등 불빛

그 아래 휴지통에 날짜 지난 기차표가 버려져 있다

 

내일로 가는 우리들 그리움도 잠 못 들어

나무와 새소리, 새벽의 눈부신 햇살이 반짝이고

어제의 너와 내일의 내가 손을 잡고 있다

새로운 출발이 나의 타크나에서 돌아오고 있다

 

우린 흘러간 다음에 서로 흔적을 지워주는 사이라서

지우지 않아도 지워지는 얼굴로

지워져도 서로 알아보는 눈으로

뭉치고 흩어지고 떠돌다 그렇게 너의 일기에서 다시 만나리

 

 

 

 

2016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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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동면 깨어나 마음 다독이는 시 쓰겠다

 

몇 번의 겨울을 애벌레로 동면했습니다. 날개 달지 못한 채 셀 수 없는 밤을 어둠에서 보냈습니다. 어느 날 태양이 눈부시게 다가왔습니다. 푸른 하늘이 보이고 겨드랑이가 가볍습니다. 길었던 겨울 동안 날개를 키우며 오늘을 기다린 보람이 있습니다.

 

내 짝사랑은 이제 긴 어둠을 걷어내고 새로운 곳으로 나를 초대합니다. 그동안 나는 나를 지탱하고 나를 세우는 힘을 익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늘 새로움으로 나를 채워주는 호기심과 변하지 않는 날개를 달고 푸른 하늘을 날아오를 것입니다.

 

늦은 밤 역사에서 갈 곳 없어 서성이는 사람들을 봅니다. 종착역도 출발역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종이박스로 방을 만들어 추운 잠을 청하는 사람들. 저들도 한때는 푸른 하늘을 날았었지요. 돌아갈 곳을 잃어버리고 떠도는 쓸쓸한 풍경에 가슴이 시려 옵니다. 타크나에서 떠돌던 구름처럼 잠들지 못하고 우리는 그렇게 흘러가는 것 아닐까요. 오늘 밤 흰 구름 속에서 떠도는 사람들 모두에게 따뜻한 온기가 감싸지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이 영광은 심사위원 최동호 선생님, 이시영 선생님 두 분께서 날개를 달아 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세계일보사에도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든든한 반석이 되어준 용정씨, 가장 냉정한 평론가 민희, 지중해 하늘을 날면서 뜨거운 용기를 보내준 서윤, 눈빛만 봐도 마음 읽어주는 준호, 그리고 친구들. 두 눈으로 마주친 세상 모든 인연들과 오늘의 이 기쁨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늦었지만 서두르지 않고 마음을 다독이는 시를 쓰겠습니다.

 

 

 

 

 

[심사평] 오랜 시적 연마 느껴지고 서정적 언어 돋보여

 

1200여명의 응모자들 가운데 예선을 거쳐 넘어 온 30여분의 작품을 꼼꼼히 읽었다.

 

많은 응모작 때문인지 응모자들의 수준은 향상되어 있었으며 어느 작품을 선정해야 할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일반적인 신춘문예의 수준을 넘어서는 작품이 많았다는 것이 솔직한 소감이다.

 

그럼에도 심사를 위해 다음 네 분의 작품으로 좁혀서 논의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은지의 구름의 공회전3, 이규정의 오르막에 매달린 호박4, 노운미의 일요일의 연대기3편 그리고 이윤정의 모자는 우산을 써 본적이 없다4편 등이었다.

 

이 네 분의 작품은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하나를 우선적으로 선정하기가 어려웠다.

각각의 장단점을 다시 살펴보고 심도 있게 검토한 결과 김은지와 이윤정의 작품이 최종 심사 대상이 되었다.

 

김은지의 작품은 시행을 밀어나가는 힘이나 사물을 관찰하는 시선이 세밀하고 좋았지만 전반적으로 시행의 압축보다는 다변의 서술에 의존하고 있어서 시적 언어의 절제력이 조금 부족하다는 것이 아쉬웠다.

 

이윤정의 작품은 서정과 서사를 아우르면서 적절한 균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일차적 장점이었다. 우리 시단에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는 새로운 시인으로서의 자격도 갖추고 있다고 여겨졌다.

 

예를 들면 이규정의 오르막에 매달린 호박과 같은 작품은 시적 완성도에 있어서는 뛰어난 점이 있었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어 주저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이윤정의 작품을 놓고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느냐를 정하기 위해 좀 더 논의했다.

 

모자는 우산을 써 본적이 없다의 경우는 새롭기는 하지만 접속어가 많아 시행의 흐름이 일부 어색했고, ‘흔적의 이해는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조금 관념적이어서 구체성이 약했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는 타크나 흰 구름이 당선작으로 적정하다는 것에 의견이 일치했다. 오랜 시적 연마가 느껴지는 다른 시편들의 안정감도 이런 결정에 도움을 주었다.

 

당선자에게는 아낌없는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리고 아쉽게 탈락한 다른 응모자들에게는 따뜻한 격려의 말을 전해 드린다.

 

- 심사위원 최동호,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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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로 / 김성호

 

 

나는 너에 대해 쓴다.

 

솟구침, 태양의 계단, 조약돌이 되는 섬; 깊은 수심에 가라앉은 이야기를 떠올리다가 나는 너를 잊곤 한다.

 

로로, 네 빛깔과 온도를 나는 안다. 네 얼굴이 오래도록 어둠을 우려내고 있는 것을 안다. 더 이상 깊지도 낮지도 않은 맨살 같은 나날을 로로, 나는 안다.

 

네가 생각에 잠길 때 조금씩 당겨지는 빛과 무관한 조도를 안다. 마음에 마음이 부딪혔다. 소리가 났다. 그쯤은 네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어서 내 망각은 너의 미래에서 쑥쑥 자란다.

 

마을은 물에 잠기고 고통은 가장 가볍다. 로로, 내 한 살 된 부엉이를 로로라 부를 때 날개에 대해 적고 싶은 두려움도 모른 채 쿵쾅이는 마음을 너는 알까? 여긴 쓸려갈 거야,

 

온 마을의 고양이가 낮 동안 밋밋하게 비상하는 것을, 환호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너는 알까? 로로, 우리 모두는 네 내면과 살았다. 나는 그곳에서 눈에 띄지 않는 한 형상이었다. 우린 오래도록 있어도 고요한 줄 몰랐지. 나는 오늘 온통

 

상처투성이여서 내일도 빛을 삼키고 반짝일까 무섭다. 사지를 갖추고 내일이 지상에 엎드릴까 무섭다. 로로, 나는 널 부르면서 여전히 네가 고스란히 피어오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동안만은 날 잊곤 하는 걸까. 로로, 네가 들린다. 언제일까?

 

로로, 나는 너에 대해 쓴다.

 

내면에 내면이 쏟아졌다. 카스트라토

 

구름, 비틀림, 작은 의식, 이런 것들을 떠올리곤 하다가 나는 다시 너를 잊어버린다.

 

 

 

 

 

2015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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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를 바라보지 못한그 고통이 날 살렸다

 

시인이 됐다.

 

엄마 함순옥

아빠 김기화

누나 김은정

 

이원 선생님

이준규 선생님

 

세계일보사 그리고

뽑아주신

문정희 선생님

김사인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시를 썼더랬다. 여름 내내 고양이와 지냈더랬다. 거울엔 내가 있었고 뭘 읽었는데 기억나지 않고 산책로에서 어둠을 바라보다가 너무 무서워져서 걸음을 돌리는데 집에 돌아가기가 더 무서웠으며 아무 문장이나 나를 받아줄 거라 사과를 내리치는 칼에 씻기는 날 시 연주를 하고 시 배역을 맡고 욕지거리에 반찬을 입에 물고 이건 반찬이다, 반찬이다, 각설하고 부글거리고 아, 미쇼와 김록이었지 어둠 속에서 쥬스 주스 쥬스 주스 쥬스 춤추는 거 같지, 울 거 같지, 이 식별을 감당해낼 수 없었더랬다. 어제 누군가에게 갔다. 나의 얘기를 했다. 나는 캄캄해졌다. 그가 시라고 생각하지 않소. 아름다운 한 여자라고 생각하오. 어둠은 잠잠하오. 열망 또한 그러오. 그렇게 된 것이오.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옮겨가는 자락을 맡고 도대체가 여름으로, 바보와 천재를 하루에도 몇 십번씩 왕복하는 것이다. 대개는 분노하며 칭호에 가려진 자, 그 고통 속에서 빛을 보리라. 나는 죽느니라, 나는 나다. 대개는 흥분에 차 느껴지오? 물음을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미 그릇된 정신을 선택한 자오. 아프오. 아프오. 고양이가 터지지 않는 게 싫고 좋았더랬다, 절정을 건드렸더랬다, 쭈그러졌더랬다, 흔들리오. , 여름이었더랬다, , 바라보지 못했더랬다. 이 판단과 오류가 나를 살았소. 다시 계속 속으로 일구며 집어삼키며 그 혼이었더랬다.

 

 

 

 

 

[심사평] 내면을 언어로 투시하는 힘음악처럼 다가와

 

우리는 어떤 새 시인을 기다리는가.

 

우리를 두렵게 하는 동시에 매혹하는 시쓰기, 읽기 전과 후의 우리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해방과 자유의 에너지를 내장한 시쓰기, 그러므로 쓰는 이뿐 아니라 읽는 이에게도 근원적 의미의 모험이어 마땅한 그런 시쓰기의 시인을 우리는 설레며 기다린다.

 

시라는 이름의 관행적 작문방식에 갇혀 오히려 생과 세계의 피 흐르는 실상으로부터 시 자체가 유리되는 자가당착을 돌파하는 패기의 글쓰기, 한국어의 갱신과 재구성이 그로부터 시발될 글쓰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것은 무조건 정당한가. 바로 이 오래된 물음을 또한 고통스럽게 치르는 가운데 일종의 시적 윤리성을 확보한 글쓰기이기를 바란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진정한 희망의 새로움이지 새것 흉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 시대 민중시풍의 단순 답습이 오늘의 문학적 대안일 수 없는 것과 똑 같은 이유에서 안이하고 나태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최종환, 맹재범, 김성호로 최종 후보를 압축한 다음, 김성호를 이견 없이 당선자로 확정했다. 최종환이 적출해내고 있는 생의 비극적 아이러니들은 진지하고 시의성 있는 것이었지만, 관점과 시적 사유에서 어떤 투식이 느껴졌다. 더 자신을 던져넣어 돌파해야 한다고 보았다. 맹재범은 생의 구체와 형상화의 신선함이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어설픈 점이 있었다.

 

김성호는 내면을 언어로 투시하는 힘, 나아가 그것을 시적 문장으로 조직하는 감각과 내공으로 우리를 움직였다. 그는 확보된 관념이나 느낌, 사실의 서술로 시를 삼지 않고, 참 자체가 스스로 드러나는 언어적 형식으로 시가 기능하기를 바라는 듯하다. 안이 비어있는 비인칭의 이름 로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마음과 언어의 섬세한 탄주에 귀를 기울이면, 윤곽이 모호한 듯하나 매우 진실하고 예민한 한 벌의 심미적 긴장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김성호의 언어사용이 구현하는 미감과 아우라를, 처음 듣는 음악을 만나듯 체험해 보기를 독자들께 권한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긴장이 견지되는 한에서만 이런 시는 유효하다는 것, 그렇지 않을 때 요령부득의 주관적 요설이나 겉멋의 함정에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일 수 있다는 우리의 우려가 기억되기를 바란다. 심사 또한 모험이다. 새 시인의 미래에 우리 자신을 걸고자 한다. 각고의 정진을 당부한다.

 

심사위원 문정희·김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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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장은 쓴다 / 이영재

 

 

눈은 이미 내렸다 새가 날아온다 그리고 새는 날아간다 이곳에서 시가 시작되는 건 아니다

 

세상엔 먹을 것이 참 없다 먹는 것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만들 생각까지 했을까

 

허기가 시보다 나은 점이라면 녀석은 문을 두드릴 줄 안다는 것 요리는 곧 완성 된다 완성되기 전에 이 깨끗한 접시를 쓰레기통으로 던질 수 있을까

 

내 몸에겐 건강한 학대가 필요하고, 다행히 이곳은 학대에 매우 알맞다 떠나는 새조차 둥지를 훌륭하게 지을 줄 안다

 

시를 포기하고 시인이 된다는 건 멋진 일이다 더 멋진 건, 죽어서 시인이 되는 일

거짓이다 누구도 시인이 될 수 없고 되어선 안 된다 담배를 문 주방장만이 오래도록 써왔을 뿐이다

 

휘파람이 휘파람을 불 생각이 없듯 우체통은 붉을 필요가 없다 다행히 라면집은 가끔만 문을 연다

 

요리는 완성될 필요가 없다 이 깨끗한 접시를 온전하게 버리기 위해

 

철새가 돌아올 둥지를 삶아 먹고 이사를 할 것이다 겨울과 더 가까운 곳에 주방을 열고 문을 닫을 것이다 어디서든, 시작하지 않기 위해

 

거짓인 명제가 가득한 접시 위에만

쓴다

 

 

 

 

2014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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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을 쓰겠다

 

무엇보다, 아주 조금 운이 좋았습니다.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게 먼저인 것 같습니다. 부모님. 생각만 해도 늘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계속 시를 쓰게 된다는 것, 사실 앞으로도 그 죄송한 마음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것에 더욱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선생님들. 김혜순 선생님, 채호기 선생님, 이광호 선생님. 전해주셨던 말씀들이 저를 지금껏 견디게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서울예대에서 배움을 주셨던 수많은 선생님들, 모두 감사합니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분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어주었던 나의 친구들. 효준, 준섭, 상우. 고맙다. 이름을 적지 못한 수많은 친구들도. 윤동주, 백석, 이상, 김춘수, 김수영. 이 시인들의 이름을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며칠 동안 수상소감에 적을 말을 생각해 봤는데 도통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시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이미 시는 제게서 분리된 것 같습니다. 이제 시는, 시의 몫입니다.

 

사는 얘기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늦은 졸업입니다. 주말마다 열두 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곧 서른이 됩니다.

 

신춘문예 당선을 하긴 했지만 이력서는 꽤 많이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서울의 월세방은 비싸고, 라면은 더는 먹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회의 속도에 뒤처지고 있다는 좌절감은 도통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이쪽의 뉴스와 저쪽의 뉴스를 매일 보려고 노력합니다.

 

누군가는 살아있지만 이미 살아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거리의 찬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사진으로만 접합니다. 혼자 있을 때도 웃어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럼에도 거울 속 얼굴은 그다지 안녕해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남들만큼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일뿐인 것 같습니다.

 

예술과 정치에 대해 오래 생각하겠습니다. 우선 주어진 대로, 써 나가겠습니다.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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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기발한 詩想·세련된 언어감각 지녀

 

올해도 900명이 넘는 예비시인들이 응모해 주셨다. 현실적 보상이 따르기 어려운 이분들의 고독한 헌신에 한국문학은 크게 힘입고 있다. 그 아름다움을 일일이 기려야 하겠지만, 차라리 아쉬운 점을 몇 가지 적시하는 것으로 상투적 덕담에 대신하려 한다.

 

우선 긴장이 떨어지는 설명조의 사설이 적지 않았다. 이것은 장황한 관형어구의 습관적 사용과 무관하지 않은데, 그것으로는 산문과 구별되어 마땅한 시적 촌철살인을 구현하기 어렵다. 두 번째로, 언어 일반에 대한 자각, 모국어에 대한 자의식이 부족하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생활언어의 많은 부분이 국영문 혼용체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구미 중심의 가속적인 세계화 추세가 가져온 불가피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누구보다 언어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시인들은 모국어의 쓰디쓴 현실에 좀더 깨어 있어야 마땅하다. 이것은 편협한 외래어배척운동을 다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해요’ ‘이에요투의 어미가 유행처럼 많았다는 점도 지적하고자 한다. 여성스러운 경어체 입말의 실감이라는 특수 효과가 없지 않지만, 이것은 시를 주관화, 연성화하고 자칫 시를 사적 독백 쪽으로 끌고 가는 역기능을 수행하기도 하는 듯하다. 역시 자각과 절제 속에서 제한적으로 구사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요컨대, 작위적으로 시를 꾸려가고 있거나 낡은 시적 투식을 답습하는 투고작들 대부분에서 그러한 문제들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시작에 임하는 태세의 안이함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검토를 거쳐 김동환 민현 이영재로 범위를 좁힌 다음 재독에 들어갔다. 서민적 삶의 그늘을 침착한 시선으로 포착하고 있는 김동환의 시들은 고르고 품위가 있었다. 반면, 시적 긴박감이 부족한 느낌과, 안정적인 대신 선도가 떨어지는 비유와 이미지들이 지적되었다. 민현의 시들은 일견 낯익은 듯했지만, 절실함이 그 내부를 채우고 있는 간곡’ ‘아이가 자는 방등은 아름다웠다. 어투의 기시감을 극복한다면 그는 더 높은 시적 성취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영재는 언어에 대해 좀더 민첩하고 세련된 감각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은 존재의 미세한 기척들에 대한 민감함과 결부된 것이었다. 빠른 리듬은 독특하고 매력적이었으며, 좋은 발상과 표현이 신인으로 손색없었다. 그를 당선자로 합의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언어의 운용에 깊이와 신중함이 더해지기를 당부하는 우리의 노파심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심사위원 김사인·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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