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산 / 박해빈
누나의 산은 매일 누군가의 입술이다
입 모양을 보고 소리를 읽는 누나는
눈에서 멀어지는 산을 오를 때마다
기울어가는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바람의 호흡이 가빠질수록
침묵을 소리로 메울 단어를 찾고 있다
혼자 산을 오르던 어제도
처음 만난 상대의 입술빛이 어두워져
가파른 말을 해석하다 발을 잘못 딛는 바람에
웅덩이에 발을 빠뜨렸다는 누나
내가 젖은 양말을
말려주며 조심스레 물어봐도
또 입 모양을 못 봤다는 핑계를 댄다, 항상
김치와 치즈를 비슷하게 발음하는 누나
사진을 같이 찍으면 ㅈ 발음이 어려워서
김치도 치즈도 아닌 미소를 발음하던
닳아버린 소리를 가진 누나는
소리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맑지 않은 밤에도 입술을 벙긋할 수 있게 연습한다
언젠가 자신과 같은 아이들에게
나만의 소리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다고
또박또박 정확하게
제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찾아 발음하는 누나,
누나가 흐릿한 날에도 산을 오르려는 이유
가장 큰 산을 넘기 위해 오늘도
작은 산들을 넘나드는 누나는 소리를 내기 위해서
저만의 소리를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뒤꽁무니에 내가
몰래 응원 한 마디씩 던지는지도 모르고
또다시 김치도 치즈도 아닌 미소를 짓는 누나는
마지막 정상을 향해서 간다.
[으뜸상] 폐교의 기다림 / 장서영
다 떠나도
난
이곳에 있을 거야
이 다음
이 다음에
추억의 징검다리 건너
찾아오는 사람 있을 테니
이끼
잡초
빈 그네가
같이 기다려
아이가
어른 되어 찾아오면
빈손으로
보낼 수 없어
뒤뜰 감나무에
부지런히
감 익히고 있어.
[버금상] 산 / 김은경
[아차상] 나목 / 김태준
[장려상] 산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 홍덕기
[심사평] 가보지 못한 길도 걸어가면 길이 된다
겨울의 끝자락이었지 싶습니다. 그때는 바이러스의 정체조차 몰라서 무어라 이름 지어 부르지도 못한 채였습니다. 마스크 대란이 오고 세계 곳곳에서는 국경의 봉쇄가 이어졌습니다. 지구촌의 사람들은 우왕좌왕 하면서 저들을 ‘코로나 19’라고 이름 지어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름은 생겨났지만, 저들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정확한 무늬도 모르겠고, 백신도 없고 치료약도 없는 이 이상하고 두려운 적과의 싸움은 하루가 다르게 조용히 퍼져나가 사람들의 생활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했던 일상을 빼앗긴 채 ‘거리두기’라는 아주 낯선 사회 현상을 저항 없이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은 언제 어떻게 어떤 생김새로 마감을 할지 아무도 모르는 미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렇게 안개 자욱한 미지의 시절에 박두진 문학관에서는 전국백일장을 개최했습니다. 암울한 시절을 건강하게 건너가 보려는 각고의 노력이라 생각합니다. 문학이, 문학만이 피폐해진 사람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다는 신념으로도 읽혔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마음으로 건너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문학으로 열어놓은 것입니다. 전국의 초등학생부터 중학생, 고등학생, 일반부까지 너무나 많은 원고가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적어나간 저들의 이야기는 모두 진솔했고 간절했습니다. 별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는 어느 시인의 글귀처럼 암울한 시절의 싯구는 모두 아름답고 신비스럽고 또한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나름의 모색이고 탐험이었습니다. 가보지 못한 길도 걸어가다 보면 길이 만들어진다는 신념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투고된 한 편 한 편의 시들을 정성껏 읽어나갔습니다. 암묵중에 약속된 상황은 오로지 작품만 보는 것을 가장 커다란 심사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거기에는 출신 학교나 지역 또는 학연과 지연 같은 미시 담론은 배재되었습니다. 그렇게 엄중한 심사의 잣대로 초등부 4편, 중등부 4편 고등부 4편 일반부 4편, 그리고 문화관광체육부 장관상 1편이 선정되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에 선정된 고등부의 ‘산’은 누구나 힘겹게 올라가야 하는 ‘산’을 통해 가족애는 물론, 반드시 어려운 고비를 넘고야 말겠다는 힘찬 메시지를 적절한 비유법을 통해 잘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고통도 이겨내면 고유의 무늬가 될 수 있음을 담담하게 시사하면서, 함께 오르면 못 오를 산이 없다는 메시지도 아름답게 형상화하고 있었습니다. 초등부의 ‘텅텅텅’은 코로나 19라는 작금의 현실을 뛰어가는 슬픔처럼 노래하는 주술적인 힘도 보여주었습니다. 중등부의 ‘산’은 전통 서정의 기법을 고수하면서 산의 의미망을 추억까지 끌어올리는 놀라운 비약을 구사하였습니다. 그러나 각 편 편의 시편 마다 모두 이 시절의 아픔이 짖게 녹아나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소설이 고통을 진술하는 것이라면 시는 개인의 슬픔을 형상화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시를 읽어 내려가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가보지 못한 길은 정녕 갈 수 없는 것일까요. 시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을 합니다. 길은 걸어간 만큼이 길이 된다고, 가보지 못한 길도 걷다가 보면 길이 된다는 것을 많은 시들은 강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에도 문학의 끈을 놓지 않고 응모해주신 전국의 예비 시인들에게 갈채를 보냅니다. 또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여 주신 박두진문학관에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 심사위원장. 손현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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