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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낯선 도시를 헹구다 / 김지희

 

한잔 노동이 넘실대는 부엌에는
여자의 일생이 부조되어 있다

엄마 허벅지 베개 삼아 달게 잠들었던 소녀시절이
캄캄해 보이지 않는 새벽 어스름
잠든 아이의 꿈자리를 지나 
슬그머니 부엌에 나가 불을 켠다 
문득 완전한 어둠 속에 던져졌던 세상 한 곳이 환하다
옹이 박힌 가슴으로 숭숭 새는 물소리를 잠근다
부엌 속에 갇혀 맵고 짜고 달고 
가끔 바삭바삭 타는 소리 너머
나는 세상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나온 
존재하지 않은 가을이었다
부엌에 앉아 작은 상을 성좌처럼 펴고
나의 언어를, 별을 찾다가 웅크린 어깨선이 
어느 파도에 부딪혀 무너지는지 속이 거북하다 
살다 남은 시간을 쪼개고 
찬 손을 비비고 
싱크대 속에 갇혀 몇 년째 속앓이 한 냄비를 닦고
예리한 어둠에 그을린 낯선 도시를 헹구며
깊은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세우고 국을 끓인다 
파, 시금치 온통 날것인 것들이 불꽃으로 저를 살라
새로운 맛을 낸다 
모든 사랑의 고통의… 뉘우침으로
한 그릇을 위한 부엌의 노동엔 어떤 해석도 필요치 않다
성찬식 밀떡처럼 작은 평화를 입에 물고
부조의 문을 밀고 나와
식구들의 잠든 귀를 깨끗하게 여는 저 폐경기의 새벽!

 

[당선소감]

 

“시를 결코 허욕과 명예의 도구로 이용하지 않았다. 시라는 견고하고 딱딱한 옥석을 말없이 석수장이처럼 갈고 닦는 일만을 했을 뿐이다” -발레리

 

새벽녘 ‘별’을 가지고와 ㄹ을 갈고 갈아 ‘벼’를 만들기도 해보지만, 과연 나는 시를 쓰며 ‘시라는 옥석을 말없이 석수장이처럼 갈고 닦는 일만을 했을 뿐’ 이렇게 말 할 수 있을까? 늘 반문한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보다는 새로운 눈으로 사물을 보며 언어 속에서 마음의 극치를 누리고자 했다. 그러나 언제나 나의 언어는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고 안으로 갇혀 캄캄한 바위 속 소통할 수 없는 무늬만 그리고 있었다.

 

노을이 모닥불처럼 피어, 식어가는 12월을 태우는 거리 크리스마스 캐롤이 어느 상점에서 흘러나온다. 절망도 경쾌하게….

 

낡은 전통에 매달려 있는 언어를 지우고, 손 끝마디로 새겨 넣은 뿌리로, 달의 큰 통 안에 있는 여자로, 투명한 모음들이 풍선처럼 솟아오르는 언어로, 겨울 가로수 가지 끝에 걸린 새벽별로… 말없이 견고하고 딱딱한 시라는 옥석을 석수장이처럼 갈고 닦을 것이다. 이번 겨울이 지독하게도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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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삶의 곡진한 국면과 신선한 이미저리의 조화

 

올해 마지막 수확을 거두고자 하는 의욕 덕분인지, 이번 영주 신춘문예에는 멀리 호주와 미국을 비롯 한국어의 영토가 펼쳐진 곳들로부터 많은 응모작들이 쏟아졌다.

 

문학적 열정으로 가득 찬 1천여 편의 작품들을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며 선자들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응모작들의 분량도 예년에 비해 몰라보게 불어났지만, 문학적 성취의 경중을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시편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자들은 흔히 신춘문예 투라 불리는 지나친 수사와 단단하게 엮여 있지 않은 이미저리의 남발이 불거지는 시편들을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하자는 데 합의하였다.

 

개중에 어떤 이의 작품은 명징한 이미저리의 구사에도 불구하고 시적 전개를 뒤에서부터 뒤집었더라면 더 효과적일 것 같기도 하였다. 그만큼 작자의 마음이 담기지 않은 작위적이고, 파편적인 사유가 팽배된 시편들이 적지 않았다.

 

이에 선자들은 시적 유행에 흔들리지 않는 분별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네 삶의 다양한 국면을 진지하게 담고 있는 시들, 시적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는 이미저리의 구사 능력, 사전적 의미를 넘어 사물을 다양하게 바라보는 신선한 시각을 가졌는가 등의 여부에 중점을 두어 본심에서 논의할 만한 작품들을 골랐다.

 

그 결과 김은정 씨의 <폭설>, 김곳 씨의 <읽어버린 길>, 이명옥 씨의 <구두코를 향하여>, 김지희 씨의 <가을, 낯선 도시를 헹구다> 등을 본심에 올려놓고 논의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사물을 새롭게 보게 하는 묘사력과 사전적 의미에서 벗어나 신선한 의미망을 환기하는 데 상당한 수준을 견지하고 있었다.

 

김은정의 작품들은 그 같은 점에서 주목이 갔지만 작자가 품은 세계관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고, 시상의 전개가 지나치게 작위적이어서 아직 착근이 덜 되었다는 데서 아쉬움을 남겼다. 김곳의 작품들은 이중적 의미망을 엮어가는 알레고리의 구사에 치중하였지만 모호하거나 충분한 전개가 되지 못한 채 마무리를 서두르는 미숙함을 노출하였다.

 

이명옥의 작품들은 해체적이면서도 명징한 이미저리들이 돋보였지만 현실과의 긴장 관계가 이완되어 그 절실함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다.

 

김지희 씨의 작품들은 여성의 삶의 무대인 살림이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한 사려 깊은 천착에 바탕해 있다. 피로를 유발하는 도로를 넘어 화자를 참인간으로 재탄생하게 하며, 나아가 식구들의 건강하고 밝은 삶을 묵묵히 뒷받침하는 사랑의 정신을 담지하고 있다.

 

그것들이 과하지 않은 이미저리를 동반하여 처리되고 있는 점들이 주목을 끌었다. 몇 군데 매끄럽게 다듬어지지 않은 산문적 잔재와, 다소 부족한 정적(靜的) 모티프 들이 선자들의 아쉬움을 자아냈다.

 

선자들은 본심에 오른 작품을 놓고 벌인 토론과 장고 끝에 최근 들어 지나치게 언어 유희와 낯선 상상력의 세계로만 치닫는 신춘문예의 병폐를 답습해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에 따라 삶의 곡진한 국면들을 시의 그릇에 담아내면서도, 명징한 이미저리의 강구를 통해 사상(事象)들에게 새롭게 접근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점들을 사서 김지희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기로 하였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말과 함께 앞으로의 정진과 분발을 당부하며, 아울러 이번에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이들도 더욱 정진하여 새로운 기회의 문을 활짝 열기 바란다.

 

- 심사위원 : 박몽구, 변종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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