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 / 김종화
너의 서식지는 날짜 변경선이 지나는 곳, 어제와 오늘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가방 속에 접어 넣은 지도의 모서리가 닳아서 어떤 도시는 갑자기 사라지고 만다 오늘의 해가 다시 오늘의 해로 떠오를 적도 부근에 숙소를 정한다 날개를 수선할 때는 길고양이의 방문을 정중히 거절해야 한다 난 철새도 아니고 지금은 사냥철도 아니니까 너에게 이미 할퀸 부분을 다시 또 할퀴는 일 따윈 없어야 하니까
기착지를 뒤적이다 마지막 편지를 쓴다 마지막이 마지막으로 남을 때까지 쓴다 나를 전혀 마지막이라 생각하지 않는 너에게
삼일 전에 보낸 안부가 어제 도착한다 너는 나를 뜯지 않는다 흔한 통보도 없이 너는 멀어졌고 난 네가 떠난 지점으로부터 무작정 흘러왔다 너의 안부는 고체처럼 딱딱하고 나의 안부는 젤리처럼 물컹하다 몸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하는 기미조차 미약하여 난 비행(非行)이 너무나 쉽다
싸구려 여관방에서 보이는 야경이 주르륵 주르륵 흘러내린다 오늘도 나의 다짐은 추락하지 않고,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나의 착란은 뼈마저 버린다 너는 결코 이방(異邦)이 아니다 태초부터 회귀점이다
[당선소감]
시는 어쩌면 시인이 벼랑 끝에서 호명한 존재들의 처절한 몸짓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오늘 호명되었다. 누가 나를 이토록 간절하게 호명한 것인가? 나의 오랜 고독이, 운명처럼 달라붙은 시마가 나를 삼킨 것인가?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그것이 나의 마음 속 고향인 제주일지는 몰랐다. 여행 할 때마다 나를 기꺼이 다독여주었던 제주. 제주의 길을 걸으면 왜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는지를 이제 알겠다.
저수지의 둑길로 은륜의 바퀴가 굴러간다. 커다란 자전거에 타고 있는 사람은, 키가 아주 작은 소녀였다. 저수지에서 피어오르는 새벽 물안개는 소나무의 푸른빛을 머금어 몽환적이다. 소녀는 그 풍경을 보기 위해 십 리 거리 마다않고 달려온 것이다. 둑 위에 앉아서 해가 떠오르는 순간,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것을 본다. 소녀는 일기를 쓴다. ‘마흔 쯤 되면 시인이 될 거야. 시인이 될 거야.’ 오늘 그 소녀는 ‘시인’이 되었다. 조금 늦어졌지만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나의 시에 진정성과 젊은 피를 수혈해 주신 하린 선생님, 항상 뒤에서 어깨를 다독여 주시는 박선우 선생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열린시학아카데미>의 詩友님들, 일일이 말씀은 못 드리지만 저를 아껴 주신 모든 분들과 이 기쁨을 함께 하겠습니다. 영주일보와 심사위원님, ‘呼名’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밥 대신 시를 짓는 나를,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남편과 아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시를 향한 나의 태도는 끝끝내 ‘맹목’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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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참신한 비유와 이미지 돋보여
전국 각지는 물론 해외에서 보내온 많은 응모작들을 두고 심사위원들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지난해에 비해 응모 작품의 양도 양이려니와 눈에 들어오는 작품들이 많은 것은 심사를 하는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예심을 통해 고른 10여 명의 작품들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면서 오랜 시간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양세정의 「수면은 모든 것을 구부린다」, 임지나의 「나비의 자석」, 김탄의 「맹목」을 최종 후보작으로 선정하고 장고에 들어갔다.
모두 나름대로 혼신을 다하고 있었다. 양세정의 시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수면’에 반영하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어떻게 하면 시의 삼투압에 흡수되는지 그 방법에 아쉬움이 있었다. 임지나의 시는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바탕은 착실히 다져져 있으나, 중복되는 이미지를 걸러내지 않아 산만한 느낌을 주어, 초점화에 실패한 점이 아쉬웠다.
이에 반해 김탄의 시는 주제가 상투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앞의 내용을 극복하면서도 참신한 은유와 환유적인 이미지를 적절히 구사하면서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모두 소화해낼 줄 아는 능력이 돋보였다. 「맹목」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당선자가 걷는 문학의 길에 영광이 함께하기를 기원하며, 낙선한 분들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 심사위원 : 김영남(대표집필), 변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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